제 이름은 이제 잉거-톤 유랜드 신(Inger-Tone Ueland Shin)입니다. 저는 1964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본명은 김정아입니다. 노르웨이에 있는 저의 양부모는 제 본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78년 3월 23일, 한국인 김정아는 갑자기 노르웨이인 잉거-톤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13살이었습니다.
누군가 "입양돼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때, 그들은 입양인이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또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다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이런 말이 제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노르웨이에서 온 55세와 54세 부부가 저를 데려가기 위해 서울로 왔습니다. 노르웨이 부부는 어린 소녀에게 줄 것이 많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탄탄한 재정과 크고 아름다운 집을 가진 기업가입니다. 저를 입양한 노르웨이 부부는 저를 구해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부를 가졌고, 제가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노르웨이 부부는 양부모가 되려고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노르웨이 당국의 결정과 두 차례의 입양 거부를 무시하고 서울에 있는 입양기관인 홀트에 와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노르웨이 입양기관의 도움을 받아 관광비자로 노르웨이에 입국하게 됐습니다.
이들 부부가 거주하는 하(Hå)시의 사회 관리자, 사회 큐레이터 및 아동 보호 위원회는 입양 거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78년 여름 휴가 직전, 이 부부가 한국에 가서 아이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의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어를 한 마디도 몰랐고, 음식도, 기후도, 문화도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양부모님 곁으로 갔을 때 한국에서 가졌던 많은 어른들, 아이들과의 유대감, 안전한 느낌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어를 한 마디도 모른 채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언어 혼란이 심했고 모국어인 한국어도 결국 잊어버렸습니다. 양부모님과의 관계는 제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저는 제 새 집에 있는 아름다운 골동품이나 예술품을 부수거나 망가뜨릴까 두려웠습니다. 양어머니는 제 다리가 너무 짧다고 말했을 때, 제가 이 집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양어머니는 제가 키가 커지는 수술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에서 왔고 유전자에 따라 정해진 키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입양은 불법이었습니다. 노르웨이 부부는 입양 서류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입양이 거부됐지만 저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노르웨이 왕도 이 신청을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법무부로부터 총 2건을 거부 당했습니다. 이들의 입양 신청은 1978년 1월 27일 거부됐습니다. 법무부의 결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아동복지상담사는 입양 약속을 부인합니다.
● 아이가 나이가 들수록 적응 과정이 더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 나이가 많은 아동을 입양하는 것은 너무 많은 추가적인 문제를 수반하므로 거의 승인되지 않습니다.
●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자녀와 양부모의 나이 차이는 40세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저의 입양은 '세계의 아이'(Verdens Barn)라는 이름의 기관에서 노르웨이 한국협회와 협력해 이루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입양이 거부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한국과 노르웨이 간의 입양을 중재하는 노르웨이 한국협회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협회에는 직원이 2명 있었습니다. 핀치 부인(Mrs. Finch)이라고 불린 잉거 요한느 스트롬 핀치(Inger Johanne Strømme Finch)는 총무 겸 발기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부의 재정, 집 크기, 관심사 및 입양 동기를 설명하는 사회 보고서를 하(Hå) 지방자치단체로 보냈습니다.
저는 노르웨이 국왕에게 2008년 12월 19일 입양기관인 홀트에 대한 "한국 노숙 아동을 위한 인도주의적 활동과 기여에 대해" 하랄 국왕이 수여한 노르웨이 왕립 훈장 메달을 철회해 달라는 요청 서한을 보냈습니다. 메달은 불법 입양을 도운 사람들에겐 수여돼서는 안됩니다. 불법 입양은 돈 때문에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메달이 잘못된 근거로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제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남자와 결혼했고, 우리는 강한 유대감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저 스스로 건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KBS TV팀과 함께 지내면서 5시간 동안 녹화하였고 한국 TV를 통해 방송됐습니다.
저는 입양 서류를 찾아 제가 살던 고아원, 제가 다닌 초등학교, 그리고 1주일만 다녔던 중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또 미혼모를 위한 지원시설에 기부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본국의 미혼모들을 계속 돕고 지원하겠습니다. 제 목표는 한국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지 않고 본국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조사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6월 8일 추가로 237명에 대한 조사 개시 입장을 밝혔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만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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