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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 강화'라는 잘못된 표지판부터 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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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교권 강화'라는 잘못된 표지판부터 떼내야 한다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권위는 교사 개인이 아닌 교육과 학교에 실려야

한 초등 교사의 죽음 이후로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에 관해 많은 논의가 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가장 크게 들려오는 단어는 바로 "교권 강화"다. 정치권도 언론도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교권 실추' 때문이라며 교권을 강화해야 한단 주장을 반복한다. 심지어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까지 나서 교권 강화를 위해서라며 학생인권조례를 후퇴시키겠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사건과 직접적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학생인권조례를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여당의 모습은 과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대체 인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눈을 의심케 한다.

그런데 도대체 '교권'이 무엇일까? 교권이란 말은 너무나 자주 많이 쓰이지만 그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합의되지 않았다. 현행법을 봐도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에는 "교권보호위원회", "(교육활동 침해 발생 시) 교권 회복에 필요한 조치"와 같은 문구가 들어 있지만 교권이 무엇인지 정의하지는 않고 있다. 교권은 이렇게 정의되지 않은 덕분에 그저 막연하게 '교사를 위한 것', '교사의 지위나 권익 등 무언가'를 가리키며 남용될 수 있다.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심각한 문제점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권력이자 헌신 요구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과거의 교권 개념은 근대적인 동시에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주로 인격적 측면에서 교사의 우월함과 교사-학생 사이의 상하관계 권력, 존경심 등을 강조하는 맥락의 교권은 군사주의적이고 나이주의적인 학교의 질서와 '교사 성직자론' 및 유교적 문화가 결합되어 있는 권위이자 권력이었다.

이런 교권 개념은 이면에선 교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교사들은 임금과 처우가 열악하더라도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헌신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는 교사들의 권리 주장에도 걸림돌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989년 전교조가 출범했을 당시, 교사가 노동자라며 노조를 만드는 것이 교권을 실추시킨다는 언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교사들이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정치 참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선생님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전교조 등은 수업에 관해서 관리자에게 간섭받지 않을 권한이나 평가권 등으로 교권을 개념화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교권 개념은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되지 않았다.

이런 성격의 교권 논의가 옛날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지금도 교사들에게는 파업권이 없고 우리 사회에는 전교조가 노조 활동을 한 탓에 교권이 실추됐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어서 문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교육 문제의 해답" 따위의 교사의 인격적 뛰어남과 헌신을 교육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하는 문구도 언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좋은 교사상은 학생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로 이야기된다.

현행법상 '교권 침해' 역시 학생과 그 보호자(학부모)에 의한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교권의 개념은 여전히 학생에게 향해 있다. 그러므로 교권 담론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에 대한 교사의 우월성에만 초점을 맞추며 정작 교사의 권리나 노동조건의 문제를 논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학생인권의 대립항으로서 교권

이제 교권 담론은 변화에 대응하고 방어하는 논리로 등장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고 교사에게 대드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학교/교실 붕괴' 논의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 원인이 '교권 실추'에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때부터 교권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실추되는 것으로, 수호되고 강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소환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져야 하는 교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1999년 한 언론 기사에는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교사의 수업 시간에는 학급 붕괴 현상이 거의 없다"라는 교사의 멘트가 나온다.("스스로 매질할 규범 만들자", 〈경향신문〉, 1999년 5월 10일) 학교 붕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교권을 이야기하며, 그 실체를 폭력에 의한 공포와 통제로 가시화하는 대목이다. 이미 이때부터 학교 교육이 삐그덕거리는 것의 원인을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도 교권 담론은 주로 체벌 금지 주장, 학생인권운동, 스쿨미투운동, 아동학대 관련 법 강화 등의 이슈들에 대해 그 대립항으로 위치하며 활성화되어 왔다. 학생인권, 스쿨미투, 아동학대 관련 법 등에 의해 학교에 변화가 촉구될 때, 교사들이 압박을 받을 때 방어하는 논리로서 교권이 활용되어왔다는 이야기다.('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하영, <오늘의 교육> 75호, 2023) 예컨대 스쿨미투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지도·교육의 일환이었다고 했으며, 스쿨미투운동으로 '교사들이 겁나서 학생을 지도할 수가 없으며, 교권이 실추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교총, 언론 등을 통해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교권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학생인권과 대립하는 개념이었다. 학생에 대한 권력이자 학생인권을 침해·제한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 점이 '교사의 인권'이나 '노동자로서의 권리' 말고 '교권'이라는 말이 굳이 계속해서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사의 인권'이 아니라 '교권'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교사가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학생에 대해 어떤 행위를 할 재량을 적극적으로 허용하라는 식의 논의로 흐르기가 십상이다. 아동학대 관련 논란에서도 교사가 사법 절차에서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교원단체들이 '정당한 교육활동에 아동학대 처벌 적용을 면제해 달라'는 등의 주장을 한 것은 교권 담론의 필연적 연장선이었을지 모른다.

여러 사람이 학생인권조례 등을 옹호하고자 하면서 '교권과 학생인권은 상충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지만, 안타깝게도 실은 상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권은 본래부터 학생을 향해 있는 권력이었고, 학생과 보호자에 의해 위협받고 실추당하는 것으로, 학생인권 등의 대립항으로서 의미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학생인권에 상충하는 교권은 폐기되어야 한다. 인권을 침해하는 데 쓰이거나 인권과 대립하는 권력 또는 권한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교권을 '교사의 교육권'이나 '가르칠 권리'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그걸로 교권 개념의 문제점이 해결되진 않는다. 교사에게 교육권이 있다는 말은 곧 학생이 그에 대하여 배울 의무가 있다는 함의를 가진다. 최근 학생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나 딴짓을 하는 게 교권 침해라는 교육부의 해석과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이처럼 학생의 수업 불참이 곧 교사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는 건 교권·교육권 논리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교사를 교육의 주체로,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교육관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도, 교사가 학생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건 마찬가지라는 점에서도 교권을 '가르칠 권리'로 대체하는 건 그리 새롭지 않다.

교권이라는 표지판을 내리자

물론 교사에게는 필요한 권리들이 있다. 최근 문제가 된 경우들은 대부분 교사가 폭력을 당한다거나 부당한 압력을 받거나 과중한 노동을 강요받는 등 교사의 인권이나 노동권이 보장받지 못한 사례다. '독박 교실'을 당연시하는 교직 사회 내 문화와 체계, 부당한 폭력이나 요구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학교, 파업권도 정치적 권리도 제대로 없는 교사들의 상황 등이 배경에 있다. 이러한 권리 말고도 교사로서 교육에 관해 보장받아야 할 것들이 있다. 가령 헌법상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으로부터 도출된 수업이나 평가, 교육과정에서의 자율성과 독립성 등이 있고, 이를 위해 교사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나 재량 등이 존재한다. 이는 교사 개인의 권리라기보다는 교육 체계 속에서의 권한 및 역할이다.

우리 사회의 교권 논의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권리와 가치들은 뒤로 미뤄둔 채, 포괄적이고 애매한 의미의 교권이 곧 교육의 핵심인 양 이야기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 교권 실추와 학교 붕괴가 함께 쓰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교권은 곧 학교의 질서와 동일시되곤 했다. 이런 논리는 교사에겐 권리를, 학생에겐 의무를 부과하여 학교를 작동하게 하겠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배울, 공부할 의무가 있다"라고 규정하면 학생들이 교육에 잘 참여하게 될 거라고 상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학생은 교육의 주체이고, 교육활동이 원활하게 되려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학교 교육이 의미 있고 존중할 만하다는, 교육 참여가 좋은 일이고 감당할 만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소위 학교 붕괴, 교육 불가능 현상은 현 사회에서 학교 교육이 가지는 의미가 변질되고 약화되면서 초래된 결과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결국 사회와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

교권 강화에 방점을 찍는 접근법은, 단지 교사가 학생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강화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거의 교권 개념은 교사들이 권리를 보장받거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가로막아왔고 교사 개인이 헌신을 발휘하면 된다고 해서 문제였다. 최근의 교권 담론은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사에게 법적 재량권을 더 부여하거나 학생 및 보호자에게 더욱 강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면 될 거라고 본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그런 점에서 교권은 예나 지금이나 교사를 위한 척하지만 교사의 구체적 권리는 가린 채 교육의 문제를 호도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말하자면 '교권 강화'라는 커다란 표지판은 우리가 교육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논의할 수 없게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학생들의 교육권 실현을 위해서도, 교사의 인권 보장을 위해서도 문제를 바라보는 프레임과 초점을 달리해야 한다. 교사의 교육 행위가 아니라 교사의 존재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교사의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아닌 인권과 노동조건에, 그 취약성에 주목해야 한다. 교사 개인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이 함께 지원하고 책임을 공유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권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교사가 아니라 바로 교육과 학교,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는 교육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공교육의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 신뢰를 쌓아가려면 학생인권 존중, 교사 노동조건 보장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숙제부터 해결해야 함은 물론이요, 우선 '교권 강화'라는 잘못된 표지판을 떼어내야만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사들이 2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사거리 인근에서 열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집회에 고인이 된 서이초 담임교사를 추모하기 위한 검은색 복장으로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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