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및 시민단체 통제에 악용될 수 있는 '외국 대리기관법'을 추진하던 조지아 집권당이 시민들이 "러시아식 법"이라며 반대 시위를 이어가자 법안을 철회했다. 2008년 러시아 침공을 겪은 조지아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보다 러시아 영향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며 경계감을 표명하던 상황이다.
영국 BBC 방송은 9일(현지시각) 집권당 '조지아의 꿈'이 이틀 전 의회 1차 독회에서 채택된 외국 대리기관법을 "무조건적으로" 철회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당이 성명에서 사회적 "대립" 해소를 촉구하고 대중의 "감정"이 가라앉으면 추후 다시 법안에 대한 설명에 나서겠다고 덧붙였다고 전했다.
지난 7일 조지아 의회가 일정 비율 이상 외국 자금 지원을 받는 언론과 비정부기구(NGO)를 '외국 대리기관'으로 등록하도록 하는 법안 초안을 1차 독회에서 채택한 뒤 이틀 간 수도 트빌리시에서 수천 명 규모의 항의 시위가 일었다. 시위 해산을 위해 경찰은 최루탄·물대포·섬광 수류탄 등을 사용했고 시위 참여자 66명이 체포됐다.
러시아의 외국 대리기관법과 유사해
시민들은 이 법이 2012년 제정되고 지난해 강화된 러시아의 외국 대리기관법과 유사한 것으로 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뉴욕타임스>(NYT)는 8일 시위 참여자들이 해당 법을 "러시아식 법"이라고 부르며 "러시아식 법에 반대한다! 조지아에 러시아식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시위에 참여한 변호사 티코 나디라슈빌리(23)는 "정부는 이 법이 미국식이라고 하지만 거짓"이라며 "우리는 러시아에서 (유사한 법 시행)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법 통과시) 여기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매체에 말했다.
외국 자금 지원을 받는 기관들을 외국 대리기관으로 등록하도록 한 러시아의 해당 법은 지난해 12월 현재 외국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기관이나 개인뿐 아니라 "지원을 받은 적 있거나 외국의 영향을 받는 이들"까지 적용 범위를 넓혔다. 미 CNN 방송은 지난해 개정 때 이 법의 적용 범위가 단순히 넓어진 것 뿐 아니라 한층 모호해졌다고 지적했다. 이 법은 러시아 내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단체 및 언론을 규제하고 신뢰를 깎아 내리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지아 교육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기아 노디아는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에 "조지아 독립 언론의 상당수가 외부 지원을 받는다. 정부는 이 법이 단지 투명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해당 법 초안은 러시아 법을 모델로 했고 러시아에서 그 법은 독립 언론을 억압하는 쪽으로 사용됐다"고 우려했다.
조지아 정부는 추진 중인 법안이 미국에서 1938년 제정된 외국 대리기관 등록법(FARA)과 유사한 법안으로 단순히 외국 자금 흐름에 대한 투명성 증진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7일 성명을 내 "미국의 해당 법은 주로 로비스트를 규제한다. 이는 시민단체와 언론을 약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외국 자금을 지원 받는 것과 외국의 지시나 통제를 받는 것을 동일하게 간주하지도 않는다"며 조지아 정부의 설명이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단체는 해당 법안이 "언론과 단체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능력을 제산하고 독립 조직에 낙인을 찍으려는 노골적 시도"라며 조지아 의회가 해당 법안을 통과시키지 말 것을 촉구했다.
집권당의 러·EU 사이 '모호한 태도'에 2008년 러 침공 역사 기억 시민들 '경계감'
외신들은 해당 법안 추진을 최근 조지아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취해 온 모호한 태도의 연장선상으로 봤다. 조지아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우크라이나·몰도바와 함께 유럽연합(EU) 가입을 신청했지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캅카스 지역 매체 <OC미디어>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난 2월부터 7월 말까지 5달 동안 집권당 조지아의 꿈 대표의 발언을 분석한 결과 서방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57회에 달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9회에 그쳤다고 지난해 8월 보도했다.
싱크탱크 유럽외교협회(ECFR)는 지난해 1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지난 18개월간 조지아의 집권 연정은 서방과 거리를 두고 점진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 안으로 옮겨가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보였다"며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큰 돈을 거머쥔 친러시아 성향의 전 총리 비드지나 이바니슈빌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러시아로부터의 침공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지아 시민들의 경계심은 높아진 상태다.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 침공으로 남오세티야 지역의 통제권을 획득했다. 유럽외교협회는 보고서에서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과 2014년과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사한 맥락"에서 이뤄졌으며 두 나라로의 침공이 "러시아의 단일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전 대통령은 2011년에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조지아로 확장됐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구실 중 하나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방지였다.
자신의 이름을 리지라고 밝힌 시위 참여 학생은 영국 BBC 방송에 "우리 정부는 러시아 영향력 아래 있고 이는 우리 미래에 매우 나쁘다고 본다"고 말했다. 시위 참여자 루카 키메리드제는 정부가 "우리를 EU에서, 유럽적 가치에서 계속해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방송에 비판했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지아인의 85%가 EU 가입을 지지한다. 집권당과 여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법안 철회에는 시민들의 항의와 국제 인권단체의 비판 외에도 조지아가 가입을 희망하고 있는 EU의 압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7일 성명을 내 해당 법안이 "EU의 가치 및 기준과 양립할 수 없다"며 "이는 조지아 시민 다수가 찬성하는 유럽연합 가입 목표에 반하며 법안 최종 채택은 우리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지난해 가입 신청 뒤 EU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엔 회원국 후보 지위를 부여했지만 조지아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룬 상태다. EU 쪽은 가입 조건으로 조지아에 법치주의·언론 자유 등 부문에서의 개혁을 요구했다.
조지아 주재 EU 대표부는 9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해당 법안 철회를 "환영"하며 "조지아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포용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EU 친화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을 권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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