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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협력 강조한 윤석열, 한반도에 자위대 끌어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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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과 협력 강조한 윤석열, 한반도에 자위대 끌어들이나"

[인터뷰] <정세현의 통찰> 펴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며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의지를 보였다. 취임 이후 미국과 일본, 서방 주요 국가들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인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도 이를 확인하듯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협력만을 강조했다.

최근 <정세현의 통찰>을 통해 한국 외교가 자국중심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기념사와 관련 "지금 정부가 올해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회의에 초청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해 일본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정 전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북한의 핵과 국제정세를 구실로 일본과 협력을 강조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향후 '한반도 유사(有事)'시 자위대의 북한 지역 출병, 평택이나 인천 등에 상륙 또는 정박, 동해상에서의 항해 등에도 동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정 전 장관은 과거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다 죽어가던 조선을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 살렸기 때문에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사실상 통치이념이었고, 이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의 굴욕을 당하게 됐다면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도 상대만 다를 뿐 '재조지은'의 개념이 우리나라 외교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6.25 전쟁 때 나라가 없어질 뻔 했는데 미국이 도와줘서 지금 우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논리"라며 "자국 중심성을 챙기라는 게 한미동맹을 깨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동맹은 그대로 가되 우리가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주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8년 동교동 사저에서 "정 장관. 시골에서 보면 도랑 속에 든 소가 이쪽 둑의 풀도 뜯어먹고 저쪽 둑의 풀도 뜯어먹으면서 유유히 걸어가지 않소? 앞으로 우리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도랑 속을 걸어가는 소처럼 외교를 해나가야 할 거요"라고 전했던 일화를 떠올리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국중심성'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정부뿐만 아니라 야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이어갔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 정책이 미국과 일본만 바라보는 종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야당이 대안 또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민주당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책적 혼수상태'에 빠진 거 아닌가 싶다"라며 "한미동맹을 강화하더라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험난한 국제질서 속에서 불이익을 적게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책 대안을 제시해 가면서 대안정당의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1년밖에 안 남은 총선에서 대안정당 수권정당으로 발돋움 하고 싶다면, 야당이 지금처럼 몽롱한 눈동자를 힘없이 굴리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희망은 없다. 방향을 잡고 어젠다 세팅을 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며 "당 내 주도권 싸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당 지도부가 대안정당 수권정당으로 나갈 수 있도록 신발 끈을 조여 매야 한다"고 주문했다.

인터뷰는 지난 2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지난 2월 신간 <정세현의 통찰>을 펴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이명선)

프레시안 : 이번에 펴낸 저서 <정세현의 통찰>에서 우리 외교의 미국 예속성을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는데, 지금까지 한국에서 고위관료를 지낸 인사가 이렇게 대놓고 지적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2019년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한국 외교가 책에서 강조한 '자국중심성'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대외적으로도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간 경제 전쟁 등으로 한국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고 부르며 과거사 문제를 접어두는 모양새를 보였다. 본격적인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단히 노골적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해 보인다.

정세현 :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3.1절이 무슨 날이었는지를 모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3.1절은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던 날이지 한일 협력 선언을 했던 날이 아니다. 일본에게 국권을 뺏긴지 만 10년이 돼가는 해에 다시 국권을 찾고 독립해야겠다고 선언한 건데 이와는 정반대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북핵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건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3.1절 기념사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피했어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외쳤던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어떻게 한일 협력정신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나? 논리성도 없고 이론적이지도 않고 일종의 역사 왜곡인 측면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한국 정부가 북핵 위협을 구실로 한미일 군사 협력을 강화한다면서 한일 간 군사협력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사전작업 아닌가?

정세현 :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자신의 힘이 모자라는데도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자국의 말을 잘 들으면서도 자국을 대신해 중국을 압박해 들어갈 나라를 찾는 것이다. 이 중 미국의 눈에 제일 먼저 포착된 곳이 일본이다.

일본은 미국이 자신들을 이른바 '오른팔'로 뽑아준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하면서 이 기회를 이용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한다. 이를 실현해보려는 것이 지난 2014~2015년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인도-태평양 구상이다.

이게 좋게 말하면 일본의 야망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흉계인데, 미국은 일본의 야망을 적당히 밀어주면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북핵문제 때문에 미국에 긴밀하게 협조하고 확장억제를 끌어내야 하는 필요성이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 미국 중심의 아시아 국제질서가 만들어지면 우리가 어떤 위치가 될지 생각해 봐야 한다.

미국은 한일 간 과거사 문제는 대충 해결됐다고 퉁치고 한일 양국 간 본격적인 관계 개선을 통해 지소미아(GSOMIA‧한일 군사정보 보호 협정)를 복원한 후 일본에게 한국을 맡기고 자신은 유럽 또는 중동 관리에 나서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듯 일본의 흉계를 역이용하려는 미국의 속셈을 잘 알아채고 미국과 관계는 계속 유지하면서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그대로 챙겨야 한다. 한미, 미일 관계를 별개로 한 채로 미국과 협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과 군사적으로 손잡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우리도 미국과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확장억제를 끌어내서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과 협력 없이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 굳이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해에서, 독도 근해에서까지, 한미일 연합훈련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일본이 호주 필리핀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원활화 협정'을 체결했는데 일본 자위대가 호주까지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 자위대의 해외 출병을 헌법 개정 없이 양자협정으로 가능하게 한 셈이다.

물론 해외 출병 양해는 이미 2014년 아베 총리가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 허용되기도 했다. 미국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일본 자위대의 해외 출병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호주 필리핀과도 유사한 방식으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아시아에서 일본 자위대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을 열러 나가는 중이다.

일본은 자위대의 한반도 출병을 원활하게 하려고 한일 간에 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일본이 주요 7개국(G7) 회의에 한국을 초청하는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하고 원활화 협정 체결하자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일본에서 열리는 G7에 초청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일본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한반도 유사(有事)'시 자위대가 북한 지역에 출병할 수 있다고 했고, 그럴 때 한국 동의가 필요한지에 대해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국가니까 한국의 동의는 필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즉 대한민국 헌법 3조 때문에 일본이 한국 정부와 자위대의 북한 출병 문제를 협의할 하등의 이유 없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태도로 보면 한일 간 이 부분을 사실상 문서로 합의하고 기정사실화할 수도 있어 보인다.

더 나가면 북한의 군사적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자위대가 평택이나 인천 쪽에 상륙 또는 정박하거나 동해상에서 항해하는 등의 행위도 할 수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국제정세 흐름으로 보아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허용해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이미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도 국제정세를 명분으로 들었다. 북한 문제, 중국-대만문제 등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안보를 강화해야 하는데 한미 동맹만으로는 안 되겠으니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과 군사 협력을 정당화시키는 논리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중이다.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관계도 미국과의 관계처럼 확장억제 식으로 발전시키려고 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되면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던 1905년 을사늑약이 재연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안보를 일본에 의존하면 외교도 자동적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이명선)

비료지원으로 북한과 대화 유도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 2019년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사실상 멈춰있는 상황인데, 지금 이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남북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정세현 : 이런 상황이 처음부터 생긴 건 아니다.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대북관에서부터 시작된 건데 북한은 달래서는 안 되고 힘으로 눌러야 한다는 적대적 생각이 있었고, 여기에 북한이 반발하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를 막기 위해 남한은 미국에 확장억제를 요청하는 등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템포만 늦추는 것이 필요하다. 올해 연합 훈련이 한미 간 이미 합의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북한에게 더 위협이 되는 방식의 훈련을 하지 않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미 훈련을 방어라고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기들이 두렵고 겁나는 일이다. 북한 사람들이 그동안 남북회담 과정에서 비공식적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미 훈련을 두고 "오금이 저리는 일"이라고 하더라.

북한이 원유를 100만 톤 수입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는 1억 톤 이상 들여오던 때 였다. 북한은 도입한 100만 톤 중 기본적으로 40만 톤 정도를 군에 배정해주는데 한미훈련이 세게 진행되면 40만 톤 보다 훨씬 더 많이 기름을 끌어다 써야하기 때문에 허리가 휜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100만 톤에서 남은 60만 톤 중에 상당 부분을 군 쪽으로 돌려써야 하다 보니 인민경제에 쓸 수 있는 분량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훈련 규모를 조금만 줄여줘도 남한에 대해 욕할 일이 없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것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도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게 꼭 이득이라고 보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확장억제를 끌어내는 것이 성과라고 하지만 이게 절대로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장억제가 되려면 우리가 미국 무기를 그만큼 많이 사줘야 하고, 안보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다 보면 경제 쪽에서도 미국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대기업들더러 미국에 투자하라고 압박하는 게 요즘 미국 대통령의 일인데 우리가 꼼짝 못하고 끌려가고 있지 않나? 그 앞에서 우리 대기업들의 국내 고용창출 같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미국은 우리 기업들에게 중국 말고 미국에 투자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그만큼 어려워지고 무역 적자도 커지게 된다. 미국은 한국이 6.25전쟁 직후와는 달리 지금은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미국에 굽히고 들어오니까 이걸 이용해서 경제적으로 더 이득을 가져가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 한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북핵 문제 때문에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 경제가 골병들고 있다.

프레시안 : 저서인 <정세현의 통찰>에서 강조하고 있는 이른바 '자국 중심성' 외교를 발휘해서 우리가 남북 간 긴장 완화를 위해 북한에 식량 지원이나 비료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제안을 할 경우 북한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을까?

정세현 :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북한이 지난 2월 26일부터 3월 1일까지 4일 동안 노동당 중안위원회 8기 7차 전원회의를 진행했는데, 거기서 결정된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공개된 것으로 보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늘려야 한다는 건데, 이게 가능하려면 논밭의 지력이 높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비료와 농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1998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북한에 비료 20만 톤을 줄 테니 이산가족 상봉하자고 했다. 그 때 북한이 김대중 정권 초기라서 비료를 줄 수 있다는 데도 남한 정부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통해 남한 정부가 지지율을 높이려고 한다며, 이산가족 상봉이 인도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때 나는 우리 측 회담 수석대표로서 북한의 농업문제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었다. 북한의 총 경지면적으로 볼 때 당시 비료 수요량은 150만 톤 정도였다. 그런데 북한이 생산하는 비료는 30만 톤이었기 때문에 120만 톤이 부족했다. 게다가 우리의 비료 농도가 북한보다 1.8배 강했다. 그래서 북한은 쌀도 고맙지만 비료 20만 톤을 주면 그 이듬해 생산량이 60만 톤 늘어나는 효과가 있으니 쌀보다 비료를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이명선)

2020년 5월 북한은 순천 인비료공장을 준공했다. 비료의 3요소가 질소, 인산, 칼리인데 흥남에 질소 비료 공장이 하나 있고 이번에 인비료공장을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비료는 질소 인 칼리가 다 복합된 것이다. 북한은 아직 복합비료 공장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다가 인비료공장 설립 이후에도 생산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 생산량이 늘어났다면 노동신문에 대서특필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북한이 농업문제를 의제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4일이나 했다는 것은 식량 사정이 급박하고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봄 농사철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북한이 비료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세계식량계획(WFP)이나 세계식량농업기구(FAO)를 활용하든 적십자 통로를 활용하든 비료 지원에 대한 운을 띠우면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물론 미국이 이런 지원을 막을 수도 있다. 북한이 상황을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구실을 대는 것이다. 하지만 식량문제는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다. 이런 명분으로 우리가 비료를 줄 수 있다는 제스처만 취해도 북한의 대남 공격적 언사와 군사적 위협은 줄어들 수 있다.

북한이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인 '담대한 구상'을 걷어찼지만, 북한이 이걸 받아들이게 만들고 싶다면 북한의 정치-군사적 불안을 해소시켜 줘야 한다. 북한이 미국한테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우려(중국은 이걸 '합리적 우려'라고 부른다)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 훈련을 그야말로 '쎄게' 하면서 선문답하듯이 '담대한 구상'을 읊조리기만 하면 북한이 그 구상에 응하겠나.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북한이 대내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해, 쉽진 않지만 인도적 지원 등을 부활시켜서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400km∼600km 단거리 미사일을 쏠 것처럼 위협을 하지 않을 상황은 만들 수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을 우리가 따라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한반도의 주인은 우리 아닌가?

"너희는 조선의 신하냐, 명나라의 신하냐"

프레시안 :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넘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대놓고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고 있다. 정부 입장이 난처한 상황인데.

정세현 : 우리가 미국에 판매한 탄약이 우크라이나까지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무기 지원을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언젠가는 끝난다. 나중에 한러 관계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 역시 자국 중심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한반도 정세에도 도움이 안 된다. 6.25의 경우 전쟁 1년 정도 지난 뒤에 휴전협상이 시작된 바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나 G7 중 누군가가 나서서 우-러 휴전 협상을 리드해 나가야 한다.

프레시안 : 책에서 우리 사회의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우리나라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인정하고 되돌아 봐야 한다면서, 그래야 한국이 보다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했다.

정세현 : 문제는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나라가 대미종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배우 한석규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천문>이라는 영화를 보면 세종은 계절 변화를 독자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해시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농력(農曆)'을 받아 써왔다.

이 농력에는 우수, 경칩, 춘분 등 주요 절기가 언제인지 적혀있는데 문제는 중국의 시간대와 기후를 표준으로 삼다 보니 우리와 맞지 않는 경우가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한양 중심의 해시계를 만들려고 했더니만 대신들이 명나라가 알면 큰일 난다, 명나라에 물어봐야 된다고 한다. 그러자 세종이 "너희는 조선의 신하냐, 명나라의 신하냐"라고 꾸짖는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종속성이 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게 살길이고 도리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다 죽어가던 조선을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 살렸기 때문에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 통치이념이 되다시피 했다.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전략전술과 역할 때문에 왜군이 결정타를 맞았고, 때마침 조선침략을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었기 때문에 왜군도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지 명나라 원군 때문에 조선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건 아니다. 그런데 무슨 재조지은 타령을 한다는 말인가. 참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명나라는 이미 기울어 가는 반면 새롭게 청나라가 일어서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재조지은 타령이나 하다가 10년 동안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은 뒤 삼전도의 치욕적인 굴욕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상대만 다를 뿐 '재조지은'의 개념이 우리나라 외교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에 대해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6.25 전쟁 때 나라가 없어질 뻔 했는데 미국이 도와줘서 지금 우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이런 개념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 더 강화된 것 같다.

프레시안 : 책에서 역대 정부 중 자국 중심성이 있는 외교를 펼친 사례로 노무현 정부를 꼽았다.

정세현 : 군사 정부의 경우 국내적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을 찾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 전에 이승만 대통령도 당시 상황에서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이 중요했다. 즉 이들 정부는 태생적으로 모두 대미종속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이기 때문에 태생적 한계가 없었고 그래서 대미 종속성에서 좀 벗어나보려고 했다. 실제 대통령은 의지가 있었지만 참모들이 받쳐주질 못한 측면이 있다.

▲ <정세현의 통찰>, 정세현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 굉장히 해박하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클린턴과 부시 등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나가면서 한국 중심의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를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당시 이라크 파병과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를 거래한 일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과 협조하되 그 밑으로 들어가진 않겠다는 것으로,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종석 당시 NSC 사무처장이라는 참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도 자국 중심성을 가지려고 했었다고 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자서전에서 "미국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에 많은 것을 합의하고도 그 해 11월 20일 한미 워킹그룹이 생기면서 사실상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게 됐다.

한미 워킹그룹이 족쇄가 된 것인데 그걸 뿌리치고 나갈 용기가 없었고,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줄 참모도 없었던 것이다. 참모들이 미국이 싫어하는 일을 해서 남는 게 뭐가 있겠냐는 식으로 나오더라도 문 대통령이 치고 나갔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같았으면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크다.

대통령 참모들이 국제정세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외교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빈틈없는 한미동맹과 미국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우리가 자진해서 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면,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생각이 있어도 마음대로 하기 어렵다.

대통령과 참모의 소위 '쿵짝'이 맞지 않으면 자국 중심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대통령의 자국 중심성을 지키려는 의지가 워낙 강해서 참모를 끌고 갈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질 수 있지만.

프레시안 :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미중 경제전쟁 심화 등으로 국제 질서가 달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립 구도가 커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남북한이 어떻게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이나 청사진 등을 정부가 제시할 수 없다면 다른 정치세력인 야당이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선도하며 정부가 따라올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국중심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정세현 : 윤석열 정부의 대외 정책이 미국과 일본만 바라보는 종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자국 중심성을 담론화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여론을 선도해 나가야 하야 하는 데 민주당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책적 혼수상태'에 빠진 거 아닌가 싶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더라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험난한 국제질서 속에서 불이익을 적게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책 대안을 제시해 가면서 대안정당의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1년밖에 안 남은 총선에서 대안정당 수권정당으로 발돋움 하고 싶다면, 야당이 지금처럼 몽롱한 눈동자를 힘없이 굴리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희망은 없다.

민주당 정신 차려야 한다. 방향을 잡고 어젠다 세팅을 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해법이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총선도 어렵다. 당 내 주도권 싸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당 지도부가 대안정당 수권정당으로 나갈 수 있도록 신발 끈을 조여 매야 한다.

자국 중심성을 챙기라는 게 한미동맹을 깨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동맹은 그대로 가되 우리가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주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관계도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된다. 중국과의 관계도 앞으로 복원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키워나가고 미국의 요구도 우리 손해가 크지 않은 범위 내에서 들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기시기 1년 전인 2008년 동교동 사저에서 뵈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정 장관. 시골에서 보면 도랑 속에 든 소가 이쪽 둑의 풀도 뜯어먹고 저쪽 둑의 풀도 뜯어먹으면서 유유히 걸어가지 않소? 앞으로 우리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도랑 속을 걸어가는 소처럼 외교를 해나가야 할 거요"

선견지명이 있는 말씀이었다. 중국이 G2가 된 건 2010년이다. 그리고 그 때 미국과 중국의 GDP 비율은 100 대 40이었지만, 2022년에는 100 대 74로까지 좁혀졌다. 이 격차는 시간에 비례해서 더 좁혀질 것이다.

미중 국력격차가 점점 좁혀지면서 미국이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미중 갈등이 날로 심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인데 우리가 땅덩어리를 들고 멀리 이사 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한쪽에 바싹 붙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눈치껏 양쪽을 왕래하면서 제 실속을 챙겨 나가야 할까? 후자가 그나마 결과적으로 우리 국력도 커지고 국격도 올라가는 것이 아닌지 따져가면서 살아 나가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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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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