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의 신간을 발간한 실천문학사 내부에서 고은의 문단 복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이승하 시인은 19일 의견서를 공개하며 '고은 시인 출간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올해 봄호부터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자문위원에서 내 이름을 빼주기 바란다"라며 편집위 사퇴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 시인에 따르면 윤한룡 실천문학사 대표는 고은의 신간 <무의 노래>와 <고은과의 대화>를 발간하는 데 있어 편집자문위원 11명을 모두 '패싱'했다. 앞서 <실천문학> 146호(2022년 겨울호)에는 고은 시인의 김성동 작가 추모시가 실리기도 했는데, 해당 호의 책임편집인 또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날 의견서에서 이 시인은 "편집자문위원들이 있고 나도 그중 한 명인데 아무 상의 없이 고은의 시집과 대담집을 냈다는 것에 서운함을 감출 수 없다"며 △11명 편집자문위원 전원에게 사과하고 △<실천문학> 2023년 봄호에 사과문을 게재할 것을 윤 대표에게 요구했다.
이어 이 시인은 "왜 실천문학사가 이 시점에 고은의 '기댈 언덕'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고 나선 것일까"라며 "윤한룡 대표는 두 권 책을 회수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은 시인의 변호인 노릇을 해주어야 하는가" 되물었다.
앞서 지난 2018년 출판사 창비는 성추행 폭로와 관련한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고은의 신간 시집을 출간하지 않은 바 있다. 반면 윤 대표는 언론 등에 이번 고은의 신간을 '회수할 예정은 없다'고 밝힌 상태다.
이 시인은 윤 대표의 이런 태도가 결국 "실천문학사에서 책을 낸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난 9일 실천문학사가 고은의 문단 복귀를 발표한 직후 소셜미디어 등지에선 문학 독자들을 중심으로 실천문학사 도서들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이 번졌다. 문학전문매체 <뉴스페이퍼>가 진행한 고은 복귀에 대한 독자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99.2%가 고은의 복귀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에 이 시인은 "실천문학사는 독자들의 불매운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물으면서도 "책 불매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문학사가 간신히 회복해 가고 있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위를 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 시인은 1980년 당시 실천문학사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였을 당시 고은이 5인의 편집위원 중 한 자리를 역임했음을 언급하며 "(고은의 신간을 출간해 준 것이)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였을까" 되묻기도 했다.
원로인 고은이 문단 내에서 여전히 견고한 인적 자본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은의 성폭력 사건이 '끝나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로 지적돼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12일 성명을 내고 "고은은 1980년 실천문학의 설립멤버이자 편집책임으로 있었다. 그리고 실천문학사에서 이번 신간을 냈다. 누가 권력을 가졌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고은이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카르텔이 작동한 결과"라고 평했다.
최영미 시인도 지난 17일 <헤럴드경제>에 기고한 칼럼에서 "내가 싸워야 할 상대가 원고 고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거대한 네트워크, 그를 키운 문단 권력과 그 밑에서 이런저런 자리를 차지하고 이익을 챙긴 사람들, 작가, 평론가, 교수, 출판사 편집위원, 번역가들로 이뤄진 피라미드 전체"라고 쓴 바 있다.
최 시인은 지난 2017년 시 ‘괴물'을 발표하며 고은의 성추행 사실을 최초 폭로한 이다. 그는 고은의 문단 복귀 사실일 알려진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선을 실천하는 문학"이란 문구를 업로드한 후 같은 이름의 칼럼을 언론에 기고했다.
의견서를 쓴 이승하 시인은 이날 "시집과 대담집을 다 회수하는 게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전 지구적 시인 고은의 신작 시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시집 띠지라도 벗겼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고은에 대한 문단 구성원들의 옹호가 최 시인 등 피해자들에게는 2차 가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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