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뚜렷한 변화는 여의도 정치에 대한 적대의 정도가 높아졌다는 점과 '법치' 중심의 국정 운영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는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협치'라는 단어는 아예 자취를 감췄고 여소야대 분점정부의 단점만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여야의 대치국면이 최소한 1년 4개월여 남은 차기 총선까지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정 이슈가 발생했을 때 이를 대하는 '정치'의 태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여권이 보인 태도는 이전 정부들과 사뭇 다르다. 국가적 대참사가 발생했을 때 지난 정부들은 소관 부처의 장관을 해임하고 책임을 물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인 대표성과 책임성, 반응성의 차원에서 봐도 당연한 조치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사와 국정조사 이후 책임의 유무와 법적 책임을 따져보고 문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철저하게 법률적 잣대에 의존하는 정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와 '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정치는 법치에 의존해서만 작동될 수 없다. 정치 영역과 사법적 영역이 엄연히 다른 이유이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재명 대표에게 조여 오는 수사를 야당 탄압과 정치 보복의 프레임으로 맞서면서 정당이 온전히 당 대표의 사법문제에 '올인' 하는 인상을 줌으로써 여당과 대통령의 저조한 지지율이 야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과 여야의 지지율이 30%대에서 고착화되고 양대 정당의 지지율 하락이 상대 정당의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은 중도층과 무당층의 정치 불신과 외면 때문이다. 한국 정당체제가 일상적으로 적대적 체제를 유지해 왔지만 강도와 기간에서 역대급인 것은 20대 대선에서 보인 대치구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야 모두 자신들의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탐닉한 결과이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적대적 체제가 유지될 수는 없다. 총선 공천을 의식한 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행보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온건파의 목소리를 협소하게 만들고 여야 강경파의 목소리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다수결의 정치에서 합의의 정치로 가는 것이 정치 발전에 부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수결의 정치는 승자독식의 정치에 어울린다. 원론적으로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단수대표제 등의 제도가 승자독식을 강화하는 제도들이다. 합의제 정치는 흔히 내각제와 친화적이라고 하지만 정치가 갈등과 이해의 충돌을 조정해서 제3의 대안과 합의를 모색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굳이 권력구조와 연관시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여야의 이견이 두드러지고 투쟁과 대립의 정도가 강할수록 합의제 정치가 설 공간은 없다.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모두 중도성향의 유권자보다 자신들을 지지하는 열렬 지지층을 의식하는 정치가 지배적일 때 이성적 공론의 장은 열리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당의 최대 계파라는 '국민공감'이 출범했다. 공부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친윤(친윤석열)계 의원들이 주도했고, 집권당 전당대회에서 친윤계가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면 당과 정부, 대통령실의 수평적 거버넌스보다 여당이 대통령실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 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때도 여당이 집권당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지 못했던 결과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여야의 대치가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지율은 상승과 하락, 반등을 반복하면서 큰 추세를 형성한다. 약간의 지지율 상승이 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시민들의 동의라고 과대해석해선 안 된다.
현재의 여야관계에서 합의제 정치의 단초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여야 정치의 작동방식이 지속된다면 여야 갈등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정치체제의 변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단순한 이합집산의 차원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는 야당이 의회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다운 모습을 보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정과 정치적 자원을 장악하고 있는 대통령실과 여당이 합의제 정치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개혁과 국정운영 방식의 변화를 추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정치'가 '법치'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나 본령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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