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292.1시간 일해 300만 원 버는 사람의 삶은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일까 아닐까. 적어도 2018년 정치는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가 안전운임제다. 저 숫자는 제도 시행 직전 해인 2019년 컨테이너 화물노동자의 노동시간과 급여다. 계절적 요인에 대한 고려가 없는 집계라는 지적도 있지만 시멘트 화물노동자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이들은 월 375.8시간을 일해 201만 원을 벌었다(한국교통연구원, <화물차 안전운임제 성과분석 및 활성화 방안 연구>).
안전운임제 시행 뒤 화물노동자의 노동조건은 개선됐다. 2021년 컨테이너 화물노동자는 월 276.5시간(▼5.3%) 일해 373만 원(▲24.35%)을 벌었다. 시멘트 화물노동자는 월 333.2시간(▼11.3%)을 일해 424만 원(▲110.9%)을 벌었다. 급격한 인상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면 한국 노동자 월 평균 노동시간과 임금이 2021년 164.4시간, 327만 원이라는 점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고용노동부). 바꿔 말해 평균적인 시멘트·컨테이너 화물노동자는 평균적인 노동자보다 월 112~169시간 더 일해 46만~97만 원 더 벌고 있다.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 확대 적용을 요구 중인 위험물, 곡물사료, 카 캐리어, 철강, 택배 지·간선 등 5개 품목 화물노동자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화물연대가 지난 6월 조사해 발표한 <안전운임 확대를 위한 조합원 실태조사>를 보면, 이들 5개 품목 화물노동자는 월 343시간 일해 342만 8000원 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안전운임제 일몰 직전 해에 화물연대가 일몰제 폐지와 적용 품목 확대를 요구하며 파업에 나서리라는 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예측이었다. 실제로 화물연대가 올해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동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지난 6월 합의·타결로 마무리된 화물연대 파업에 나서며 경고등도 커졌다. 당시 정부·여당은 "안전운임제를 지속 추진하고, 품목확대 등을 논의한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뒤로 정치는 이 문제를 외면했다. 결국 예고된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 이후 상황은 더 고약하다. 다수당인데다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더불어민주당도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여당은 아예 적대적이다. 당 지도부는 물론 관계 장관, 심지어는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까지 "민노총"(민주노총을 지칭)이라는 '멸칭'이 거침없이 나온다. 화물노동자의 삶에는 관심 없이 민주노총에 대한 혐오 정서에 기대 지지율을 반등시킬 기회로 삼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대응 논리에도 구멍이 보인다.
윤 대통령이 파업 5일차인 지난 2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는 노사 법치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한 일부터 보자. '반지성주의'는 안 된다더니 개념 사용부터 틀렸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상층은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다. 하층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 중소기업 노동자와 간접고용·특수고용 등 비정규직 노동자를 말한다.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화물노동자는 이 중 특수고용에 해당한다. 윤 대통령이 말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피해자"의 대표 사례가 바로 화물노동자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대통령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도 논란 소지가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과 8일 발동한 '업무개시명령'과 관련해서다. 업무개시명령은 국회가 비준한 ILO 협약 중 '결사의 자유' 규약에 위배된다. 국회가 비준한 국제 규약은 국내법적 지위를 가진다.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르면, ILO 규약과 '업무개시명령'이 충돌할 때 ILO 규약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법치주의'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구부려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면 정부 대응에는 이 점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어야 했다.
윤 대통령이 안전운임제 확대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고, 김은혜 홍보수석이 지난달 30일 "다양한 옵션을 검토하고 있다. 안전운임제가 정말 안전을 보장하는지 검토하려는 취지"라며 제도 자체의 폐지를 암시한 것도 문제다. 이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김 수석의 말대로 안전운임제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개선 방향은 여전히 화물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쪽이어야 한다. 작게 보면 임금 저하 없는 일일 운행시간 제한, 크게 보면 장시간 노동 유인이 큰 개인사업자에서 법적 노동자로의 지위 전환 확대 등을 고민하는 게 타당하지 안전운임제를 폐지해 화물노동자의 운임을 낮추는 일이 안전에 도움이 될 수는 없다.
한술 더 떠 주호영 원내대표는 "안전운임제의 안전은 허울뿐"이라며 선동에 가까운 말을 꺼냈다. 교통연구원 연구를 보면, 컨테이너·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종인 사업용 특수 견인차 사고 건수는 안전운임제 시행 첫해인 2020년 674건으로 전년 대비 167건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해당 차종 사고 부상자도 991명으로 88명 줄었다. 단 사망자 수는 25명으로 4명 늘었다. 경합하는 결과라고 봐야 할 이 집계에 교통연구원은 "제도 시행 기간이 짧아 교통안전 개선 효과 확인에는 한계"가 있다는 단서를 단다.
한국보다 오래 화물차 운임과 사고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해외에서는 긍정적인 연구결과가 더 많다. 미 연방회사운송안전청(FMCA)의 지원을 받아 2002년 작성된 연구보고서 <안전을 위한 비용(Paying for Safety)>을 보면, 화물차 운임이 10% 오를 때 사고율은 9.2% 감소한다. 데이비드 피츠 그리피스대학교 고용관계 명예교수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1989년부터 2021년까지 안전운임제 시행으로 205명의 생명을 살렸다"고 분석한다. 마이클 벨저 웨인주립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화물차 운임이 1% 오를 때 사고율이 3.16% 줄어든다는 연구를 지난해 발표했다. 요컨대 길게 보면 안전운임제는 결국 화물차 사고 감소에 기여할 확률이 높다.
정부·여당 대응의 바탕 중 하나일 '안전운임제가 경제에 부담이 된다'는 재계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시멘트 화물노동자의 노동시간과 급여 기준으로 환산할 때 월 166.6시간 동안 사회에 필수적인 일을 하며 217만 원 버는 노동자도 '경제에 부담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부의 고통스러운 삶에 기대 다른 구성원이 풍요를 누리는 사회 구조를 유지해도 되나'라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의 실제 효과를 봐도 '경제부담론'에 무리가 있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화물노동자의 저임금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 할 안전운임제 시행 첫해 운임 증가율은 12.5%였다. 그 뒤 두 해 동안 안전운임제 해당 품목의 운임 증가율은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밑돌았다. 2021년 운임 증가율은 1.93%인데 같은 해 물가상승률 2.5%다. 2022년 운임 증가율은 1.57%인데 2022년 9월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은 5.6%다.
이런데도 정부·여당은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지지율이 오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화물연대 파업 전후 발표된 국정수행 긍정 평가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갤럽(29%→31%)에서는 오차범위(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포인트) 내 변화뿐이었지만, 리얼미터(36.4%→38.9%,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2.0%포인트), 미디어토마토(29.9%→35.5%, 표본오차 95% 오차범위 ±3.0%포인트) 등에서는 오차범위 밖 상승을 기록했다.
이대로 정부 여당의 구상이 실현되면 남는 건 뭘까. 한 달에 300시간 넘게 일하며 3~400만 원 버는 화물노동자의 삶은 그대로일 거다. 그들의 고통은 그대로이기에 갈등도 언젠가 다시 불거질 거다. 정부·여당이 주장하고 민주당이 받아들인 '품목 확대 없는 안전운임제 3년 연장'은 이 갈등을 3년 미뤄 또 한번의 파업을 불러오는 결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진전이라곤 전혀 없을 그 상황에서 분명하게 남는 건 용산과 여의도의 승리뿐이다. 그런 일 하라고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준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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