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동네마다 수리·수선 가게가 있어 어떤 물건이든 오랫동안 고쳐 사용했다. 그냥 버린다는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물건을 잠깐 쓰다 버리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어느새 전자제품도 고치기보다는 버리고 새로 사기 시작했다. 이제 동네 수리 가게는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전자제품을 고치기 위해 A/S 센터를 찾아 멀리 돌아다니고 온갖 사이트를 검색해야 한다.
시민들의 전자제품 수리 실패 이유는?
점점 더 대형화되고 스마트해지는 전자제품 시장 속에서 전자쓰레기는 더 다양한 제품군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자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제품의 내구성을 높이고, 고장이 나더라도 쉽게 수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따라줘야 한다.
그 중 수리는 제품의 수명을 늘려 폐기물 발생을 줄이고, 재활용보다 추가적인 에너지·자원이 덜 소모되면서도 제품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유럽환경국(EEB)는 유럽 내의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할 경우 매년 210만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전자제품 수리 실태는 어떠할까?
서울환경연합은 전자제품 수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7월부터 한 달간 전자제품 수리실패 사례를 제보 받았다. 제보기간 중 접수된 제보는 총 111건으로 TV, 세탁기, 노트북, 휴대폰, 선풍기, 프린터, 전자사전, 빔프로젝트, 즉석카메라 등 48가지였다. 이 중 수리하지 못한 사유로는 '부품이 없어'가 42건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A/S를 제공하지 않거나 각기 다른 이유로 업체에서 수리를 거절한 경우'가 28건으로 많았다. 그 외에도 '수리점이 없어서'와 '수리비가 너무 비싸서'가 13건, '수리 대신 제품교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3건 있었다.
사례 중에는 여름에 많이 사용하는 전자제품 중 하나인 선풍기와 관련된 사례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선풍기 3대가 고장 났다. 목이 부러진 선풍기는 기둥부분 부품은 따로 구매가 어려웠고, 날개가 고장 난 선풍기는 날개 별도구매가 안 된다고 했고, 버튼이 고정이 안 되는 선풍기는 수리하려고 하자 새로 사라는 답을 들었다. 결국 고장 난 선풍기 부품들을 서로 조립해서 선풍기 한 대를 새로 만들었다'는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선풍기 110볼트인 걸 220볼트 고치고도 아직 잘 돌아간 것을 망을 고정시키는 부분이 망가지고 날개가 조금 떨어져나가 부품이 없어서, 케이블타이로 묶어서 쓰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다. 이처럼 시민들은 구매한 전자제품을 가능한 오래 이용하기 위해 구매한 업체를 통해 수리를 시도했지만, 부품이 없거나,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양하게 전자제품을 수리해오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필립스 핸디스팀다리미가 고장 나 서비스센터를 방문하니 정책 상 수리는 불가, 비슷한 품목 구입 지원이었다. 제품을 만들어 판매는 하는데 수리는 안 된다는 점이 정말 충격적이고 화가 났다.'는 제보도 있었고, '무선 이어폰에 연결이 끊기는 문제가 발생해 A/S를 받으러 가자 수리불가라며 새 제품으로 교체를 해줬다. 그 후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또 새 제품으로 교체를 해주었다. 그 이후로는 그 업체 제품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이처럼 '수리를 문의하니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가격이나 사용하기에도 더 좋으니 새로 구매하라'고 제안 받은 사례는 무려 17건이나 있었다.
삼성, 미국에서 자가수리 프로그램 시작
이번 수리실패 사례 조사 결과에도 나타나듯 현재 국내 전자제품 시장은 자사 서비스센터에서만 수리할 것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독점해 비용을 높이고, 부품이 없거나 차라리 새 제품을 사는 것이 돈이 덜 든다는 식으로 새 제품 구매를 강요해 구제품 폐기를 늘리고 있었다. 우리는 돈을 내고 전자제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이용하는 전자제품을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한 기술과 부품 등의 인프라는 생산자가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8월 2일, 삼성전자는 갤럭시 시리즈 등 일부 제품을 직접 수리할 수 있도록 부품 구입과 수리 가이드라인이 포함된 자가수리(Self-Repair) 프로그램을 미국에서 시작했다. 애플과 구글도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지원 중이다.
이는 지난해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가수리권 보장을 위한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자가수리 논의가 급물살을 탔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리권(right to repair)'은 소비자가 스스로 제품을 수리해서 오래 사용할 권리를 뜻한다. 이미 미국은 12개 이상 주에서 소비자의 '수리권'을 지원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영국 또한 이미 수리권이 법제화됐다. 유럽연합(EU)과 인도 또한 수리권 법제화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했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주요 내용은 일정 기간 부품 단종을 금지하고, 사설 수리센터를 통한 수리를 허가하여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원 절약을 통해 '탄소 중립' 정책에도 기여하자는 취지의 법안이다. 그러나 현재 정부 부처와 제조사들은 "제품 개발에 장애 요소가 될 수 있다.", "자가 수리 시 배터리 폭발 등 위험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수리권에는 소비자가 쉽고 간편하게 수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기업이 교체 가능한 부품과 수리 기술을 민간 수리업체와 공유하고, 부품을 확보해두는 등의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며 또한 애초에 전자제품을 설계할 때부터 쉽게 수리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수리용이성까지 요구할 수 있다.
수리권을 보장하라
수리 기술이 민간 수리업체와 공유된다면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주민 커뮤니티 곳곳에 '수리 카페(Repair cafe)'가 생겨날 것이다. 수리 카페는 20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곳에서는 주민들이 저마다 고장 난 물건을 가져와 수리할 수 있게 필요한 도구와 방법을 제공하고, 수리 기술을 가진 자원봉사자가 옆에서 돕는 카페다 (전 세계 수리 카페 : repaircafe.org/en). 더 나아가 지자체도 수리에 대한 지원도 해야 한다. 주민센터에서 집을 수리하기 위한 생활 공구 대여를 해주듯 전자제품 수리에 대한 물품 지원과 기술 지원도 함께 해야 한다.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15분 거리에 수리 카페를 방문하거나 지자체에 방문해 수리 도구와 기술을 이용하는 일상이라니 상상만 해도 정말 좋다.
이제 소비자가 스스로 제품을 수리해서 오래 사용할 권리, 수리권은 소비자의 새로운 권리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은 수익을 위해 제품 모양새 또는 기능에 치중하고 재사용이나 재활용을 위한 용도는 외면해왔다. 그러나 수리권은 순환경제 핵심 개념이 되고 있고, EU를 비롯해 각 국가에서는 소비자 수리권을 법률로 보장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이제 소비자가 이야기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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