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역에는 경부선 철길과 갈라지는 선로가 있다. 의왕역을 뒤로하고 오르막길로 이어진 단선 철로를 따라 달리다 계곡 사이 좁은 입구를 지나면 거짓말 같이 넓디넓은 부지가 나타난다. 바로 오봉역이다. 오봉역은 화물 전용 역으로 일반 시민들은 접근할 수 없다. 산속 비밀기지 같은 느낌도 풍기는 이 넓은 땅 위에는 수많은 선로가 부채살처럼 갈라져 있다.
오봉역 입구에서 보면 중앙에는 선로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화물열차 착발선이 있다. 오른쪽으로 광대한 컨테이너 하역장이 있다. 부산, 광양 등지에서 수도권을 오가는 열차들이 평판 화차 위에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리는 곳이다. 왼쪽으로는 수도권 최대의 시멘트 출하기지인 이른바 양회선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성신양회, 한일시멘트 등 국내 시멘트 생산 회사의 사일로로 연결되는 전용 선로가 깔려있다. 바로 이 선로에서 지난 5일 33세의 푸른 청춘을 살아가던 청년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숨졌다.
오봉역에서의 사망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14년 5월 24일에도 32세의 청년 노동자가 희생됐다. 이들은 모두 입환 작업이라고 부르는 화물차량을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열차 조성 업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다. 철도 현장에서의 위험도를 나누자면 오봉역에서의 열차 조성 업무는 최고 등급에 속한다. 일반 역에서 어쩌다 일어나는 열차 조성 업무와는 격이 다르다.
수시로 화물열차가 들고 나는데 이 모든 열차들을 도착선에 유도한 뒤에 각 화차들을 이후 작업에 용이하게 선로 별로 배분해 분리하거나 하치장에 유치해놔야 한다. 이런 현장은 기계적인 기준에 의한 인력배치를 해서는 안된다. 또한 안전 관리에도 특별한 주의와 감독을 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력확보와 특별한 주의로만 사고를 예방할 수는 없다. 위험 요소가 상존해 있는 현장에서 100번 주의를 기울였어도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연결될 수 있다. 오봉역의 안전 목표는 현장 작업에서의 위험도를 0으로 수렴시키는데 맞춰져야 했다. 시설 개선 역시 필요하다. 38년 전인 1984년 영업을 시작한 오봉역은 화물열차를 유치하는데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인간의 안전을 지키는 설계는 고려되지 않았다. 선로들은 빽빽하게 들어차 유치된 열차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열차 조성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에게 부여해야 할 기본 수칙은 어떤 경우라도 선로 안쪽에서 이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봉역은 선로 위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안전보행로를 만들어 달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는 번번이 예산의 벽에 부딪혔다. 더구나 시설을 뜯어고치는 데 드는 비용은 너무 크다는 인식 때문에 시설 개선은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더 이상 돈 때문에 생명이 무시되는 조건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오봉역 선로 몇 개를 걷어내어 안전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열차 조성 업무에 나선 노동자들이 안전통로를 이용하게 되면 생명을 걸고 일하지 않아도 된다.
거대 중량물이 움직이는 현장의 특성상 작업자 상호간의 긴밀한 소통과 협의는 필수적이다. 열차조성 업무가 위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열차 움직임을 책임지는 주체가 두 곳이라는 곳이다. 기관사가 하나이고 조성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다른 하나이다. 두 부분의 어느 한 쪽이 오류를 범하게 되면 고스란히 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작업 수행 프로세스의 일원화는 안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바람직한 구조는 열차 조성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가 기관차를 통제하는 것이다. 도입이 추진된 적이 있었던 조성 업무 담당 노동자에 의한 무선제어 기관차를 투입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구조적으로 일원화가 힘들 경우 어느 한쪽의 실수를 상대방이 방어하거나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열차 조성과정을 주시하고 위험을 알리는 인력 배치도 필요하다.
시설 개선, 인력 충원, 시스템 개선, 안전 문화 개혁 등 모두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런 현실에서 근본적 철도 안전 대책에 나서야 하는 국토부는 사고를 노동자와 노조 탓으로 돌리고 있다. 원희룡 장관은 코레일 사측과 노조가 야합을 했다는 망말을 거침없이 내놓고 있다. 한국철도공사에 대한 경멸과 저주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사자후로 정점을 찍었다. 장관의 이 같은 행태는 한국철도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줄 뿐이다. 결국 장관의 말은 관료들의 생각이다.
장관의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달려있다. 이 끈은 국토부 관료들의 손 끝에 잡혀있다. 사실 정치인 출신 장관이 철도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전 세계 열차 화장실 세면대에 쓰여있는 "이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란 문구를 KTX에서 보고는 대단한 걸 발견한 양 KTX 수질 개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다.
철도 안전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안전해야 한다. 단순한 진리다. 국토부는 철도공사 노사가 자신들이 승인도 안 했는데 3조2교대에서 4조2교대로 멋대로 합의한 후 인력 충원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3조 2교대 근무 형태는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인정한 불규칙 근무 형태로 1급 발암물질과 같은 존재로 규정한다. 특히 밤샘 근무를 마친 날 밤에 다시 밤샘 근무를 하게 되는 근무 형태는 노동자들을 집중력 저하, 오판, 오류 등을 유발 할 수 있어 개선이 필요했다. 4조 2교대로의 근무 형태 변경은 유별난 철도노조만의 고집이 아니라 전국의 지하철 운영기관에서도 도입된 근무체제이다.
코레일 노사 합의를 야합이라고 규정하는 장관은 정부가 줄곧 강조한 대화를 통한 노사합의 존중이라는 원칙을 부정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 때문에 중요한 철도 현안에 대해 노조가 국토부와 협의를 요구하면 철도노조의 협의 대상은 국토부가 아니라 사측이라며 대화를 거부했던게 국토부의 행태이다. (관련기사 : '코레일 비난' 원희룡에 野 "현장 탓이 윤석열 정부 기조냐")
노사대립으로 파업 위기로 치달으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자고 나서던 국토부가 막상 타협을 통해 합의한 내용을 야합이라고 우기면 노사의 자율교섭 원칙은 어디에서 지켜지는가?
문재인 정부에서 눈치만 보던 국토부 관료들은 윤석열 정부에서 물을 만났다. 원희룡 장관을 앞세워 한국철도공사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고있다. 이 혐오 속에는 노조에 대한 경멸,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무시, 한국철도 공사에 대한 멸시가 혼합되어 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다. 원희룡 장관은 한국철도에 희망이 없다고 선언한 것과 같다. 이런 선언이 철도 민영화를 확대하거나 경쟁체제를 가속화 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민영화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일어난다. 먼저 모든 자금 지원을 끊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한 후, 사람들이 화나게 한 뒤, 이를 빌미로 민자에 팔아 치운다." 석학 노엄 촘스키의 말이다.
이상한 자유가 넘치는 대한민국이다. 관료 과두지배체제가 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점점더 위험에 빠지고 있다. 이 어둠 속 한국철도는 어디로 달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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