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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비판하던 '고르비'도 가고…군축 업적은 우크라전 속 '잿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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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비판하던 '고르비'도 가고…군축 업적은 우크라전 속 '잿더미'

권위주의 반대한 소련 개혁·개방 추진 지도자…우크라전 반대 목소리도

냉전 종식과 핵 전쟁을 막는 군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을 인용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장기간의 투병 끝에 30일(현지시각)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뒤 1990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91년 12월 퇴임하기까지 단 6년 9개월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간 핵 전쟁 위협을 포함해 극한 대립으로 치닫던 냉전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바꿨다. 1985년 11월 취임 8개월만에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대립국인 미국과 대화의 물꼬를 텄고 1987년 12월 역사적인 핵무기 감축 조약에 미국과 함께 서명했다. 1989년 냉전 종식을 선언했으며 이듬해 독일 통일을 수락했다. 냉전 종식에 대한 기여를 인정 받아 1990년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퇴임과 함께 소련은 공식 해체됐다.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체결 및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등 군비 감축은 소련 내부 개혁을 위한 동력과 여유를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구조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내세우며 정치를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려 했고 경제의 개방성도 높이고자 했다. 권력의 중심을 공산당에서 소련의 첫 의회인 인민대표회의로 옮겨 1990년 3월 의회를 통해 선출된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뒤 언론의 자유를 크게 확장해 국영 방송 독점을 해제하고 독립 언론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수용했다. 

개방이 이뤄지며 맥도날드 등 미국 프랜차이즈가 최초로 러시아에 문을 열기도 했다. 소련 해체 당시 6살이었던 러시아 출신 <뉴욕타임스>(NYT) 멕시코 특파원 아나톨리 쿠르마나예프는 자신과 동세대의 기억 속에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8년 피자헛 광고로 기억된다고 적었다. 광고에서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공과를 논하다 "덕분에 피자헛이 생겼어요!"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다만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이룩한 성과는 거의 그 빛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소련 간의 군축 약속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 그 자체로 대체된 모양새고 전쟁 발발 뒤 러시아 쪽은 핵 전쟁 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퇴임 무렵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부 경계에는 수천 명만이 남겨져 있었지만 지난 6월 나토는 동유럽에 집중 배치돼 있는 신속대응군 숫자를 현재 4만명에서 30만명으로 대폭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3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도 우크라이나 전쟁 뒤 거듭된 검열 끝에 사실상 운영이 중단됐다. 냉전 종식의 상징 중 하나였던 맥도날드는 지난 5월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친우이자 자유주의 라디오 방송의 모스크바의 목소리(Ekho Moskvy)의 전 보도국장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는 지난 7월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모든 개혁은 잿더미와 연기 속에서 0이 됐다"고 말했다. 이 방송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뒤 강제 폐쇄됐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설립한 고르바초프 재단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 뒤인 2월 26일 "적대 행위를 조기 중단하고 즉시 평화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다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이자 소련 붕괴를 "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으로 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종종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2011년 10월 미국에서 열린 공개 행사에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적 방법을 사용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미래를 위한 정책에 권위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20년 이상 통치하는 지도자들와 그 주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 뿐이다. 나는 이게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냉전 종식의 공헌자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개방 뒤 내부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고 많은 이들이 소련 시절 '강대국' 이미지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탓에 러시아 내부의 평가는 엇갈린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해 러시아 여론조사에서 70%의 응답자가 고르바초프 재임 시절 국가가 부정적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답했으며, 지난 세기 가장 인기 없는 지도자로 꼽혔다고 보도했다. 

다만 러시아 내 자유주의 집단에서는 그에 대한 추모가 이어졌다. <가디언>을 보면 베네딕토프는 "우린 모두 고아가 됐다. 하지만 아직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러시아 언론인 미하일 피시만은 "고르바초프는 기념비적인 정치인이었다. 1980년대말부터 90년대 초에 주어진 자유는 러시아에서 전무후무했다. 이것이 그의 업적"이라고 조의를 표했다.

세계 정상들의 추모도 쏟아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0일 성명을 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상상력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의 전체 경력에 대한 위험을 무릅쓴 보기 드문 지도자의 행동을 했다"며 "그 결과는 더 안전한 세상과 더 큰 자유"라고 애도를 표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유례 없는 정치인"이라며 추모의 뜻을 전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냉전을 종식시키고 철의 장막을 걷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것은 자유로운 유럽을 위한 길을 열었고 그 유산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조의를 표했다. 

푸틴 대통령도 조의를 표했다. <타스>는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이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별세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했다"며 "유족과 친구들에게 조전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2004년 12월 21일(현지시각) 독일 슐레스비히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러시아 전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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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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