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이 사람들은 깡패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었다, 무고한 시민이었다' 한마디만 해주면 고맙지. 그리고 이제 진실화해위원회 인정을 받았으니까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을 때 빨리 보상 문제를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여."(정영철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
진실규명 소식에도 정영철(81) 위원장은 오래 기뻐할 수 없었다.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사람들 때문이다. 잔인하게 흘러버린 60년 세월 속에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
5월 20일 충남 서산시 모월리 마을에서 정영철 위원장과 서산개척단 피해자들을 만났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서산개척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1961년 11월 정부는 '사회정화' 정책으로 서산 지역에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설립했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전국에서 고아와 부랑인 등을 적법 절차 없이 단속해 강제 수용했다. 그중에는 일정한 주거와 직업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수용인원은 1,700여 명에 이른다.
정영철 위원장은 부산에 있는 하숙집에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서산개척단에 도착하자마자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당했다. 몽둥이에는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곡괭이하고 삽만 가지고 여기를 전부 만들었잖어"
폐염전을 농토로 개간하는 일이 그들 앞에 놓였다. 돌을 날라서 둑을 만들고 집도 지었다. 맨손에 삽 한 자루 쥐여주는 것 말고는 아무 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열두 시간 동안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여성과 노인, 아동들도 예외는 없었다.
떠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24시간 감시가 이어졌다. 틈을 노려 도망치다 잡힌 사람들은 곡괭이 자루로 '죽을 만큼' 맞았다. 강제노역과 감금, 그리고 폭행이 매일 반복됐다.
밥이라고 배불리 먹었을까. 소금국에 보리밥을 '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것이 식사였다. 개구리나 뱀을 잡아먹으며 굶주림을 달랬다. 성재용(80) 씨가 "못 먹어본 게 없네, 별놈의 걸 다 먹고 살았지"라고 하자, 정영철 위원장이 "쥐약만 빼고 다 먹었어"라고 말을 받는다.
"여태까지 산 것이 참 기가 막히네요"라며 성재용 씨가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들의 하루하루는 삶과 죽음의 좁은 경계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렸다. 맞아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작업 중 사고로 죽는 이들이 흔했다. 그 수가 250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는 관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자, 장례도 없이 그냥 가마니에 싸서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1978년 서산시는 관내 무연고 묘지 및 개척단원이 묻힌 공동묘지를 전부 개장해 '무연총'을 만들어 합장했다.
정부는 단원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행해진 것이 놀랍게도 강제결혼. 서산개척단의 '부랑인'들과 서울 등지의 '윤락여성'들을 결혼시키겠다는 거였다. 1963년 9월 서산개척단 운동장에서 열린 1차 합동결혼식에서는 125쌍이 결혼했다.
이듬해 11월 2차 합동결혼식은 서울시민회관에서 서울시장의 주례로 개최됐다. 규모도 1차 때보다 늘어, 225쌍이 결혼했다. 식순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축사도 포함돼 있었다.
정부가 '윤락여성'이라 부른 신부들 중에는, 실제로는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오거나 경찰의 단속에 의해 끌려온 여성들도 있었다. "이쪽에는 여자, 저쪽에는 남자가 한 사람씩 나오면 짝이 정해지는 이상한 방식"(성재용)의 결혼이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답변이 '법이 그렇다' 그걸로 끝이여"
1966년 9월 서산개척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땅’ 때문이다. 처음부터 정부는 '개간으로 만들어진 농토를 단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오직 그 기대 하나 때문에 고된 노동을 버티고 버텼다.
모월리에 남은 개척단원들은 스스로 개간 작업을 이어갔다. '서산자활정착사업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 마을에 온 이들도 함께했다. 내 땅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정말 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싶은 때도 있었다. 1968년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됐다. '자활지도사업으로 생긴 토지는 근로구호 대상자에게 무상분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농지가 '가분배'됐다.
하지만 가분배증만으로는 당장 먹고살 수가 없었다. 개간한 땅에서 제대로 된 소출이 나기까지는 또 많은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가분배증을 헐값에 넘기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만든 내 땅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소박한 꿈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무상분배에 관한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못한 채 1982년 폐지됐다. 국가는 이들에게 땅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변상금을 내라고 독촉했다.
국가가 이들을 멋대로 끌고 와서 가두고, 때리고, 강제로 일을 시킬 때는 법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 노동의 대가인 농토를 돌려달라는 이들의 주장 앞에 국가는 '법'을 이유로 귀를 막아버렸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 모두가 저마다 원통한 마음을 토해낸다.
국가에 인생을 빼앗기고 땅마저 빼앗겼지만, 세상의 편견은 오히려 이들을 손가락질했다. 가난은 죄가 아니었지만 이들은 죄인이 됐다. '개척단'이라는 꼬리표는 차별의 표식이었다.
"세상에 끝까지 숨겨지는 일은 없구나 생각했죠"
"누구 하나 붙잡고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유병엽, 65) 호소할 길 없었던 이들의 사연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018년에는 피해자 80여 명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지난 5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개척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강제수용 및 강제노역, 폭력 및 사망, 강제결혼 등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함께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또한 토지 무상분배에 대해서도 보상 및 특별법 제정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규명 결정은 이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한목소리로 '시간'을 이야기했다. 지금껏 기다려온 시간은 너무 길었고, 더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사과든 보상이든 '살아 있을 때' 해달라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인터뷰 5일 뒤, 정 위원장이 말한 윤기숙 씨는 사망했다. 윤기숙 씨는 '수예학원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이곳으로 왔고, 1963년 1차 합동결혼식에서 처음 본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다. 윤기숙 씨가 숨을 거둔 날은 진실규명 결정 통지서가 발송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위원회 사무국장인 유병엽 씨는 또 다른 바람을 말했다. 이곳에 위령비와 함께 작은 역사전시관을 세우는 것. 많은 국민들이 그곳을 방문해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알고, 모월리 사람들의 모진 인생에 위로의 마음 한 조각 얹어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이들의 표정에서 웃음을 찾기는 힘들었다. 2018년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대통령님, 우리들의 한을 풀어주십시오!"라고 외치며 눈물 흘리던 그들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인다. 정영철 위원장은 마지막까지 '순표 아우' 이야기를 거듭했다.
※ 이 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6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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