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17세 이하 코로나보다 총격으로 더 많이 죽는데…미 총기규제 '도돌이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17세 이하 코로나보다 총격으로 더 많이 죽는데…미 총기규제 '도돌이표'

공화당, 거듭된 참사에도 "총기규제는 정치적" 매도…CNN 기자 "바뀐 것 없어 예전 기사 다시 꺼내 쓸 정도" 절망감

"이제 자전거 타는 법을 막 배운 일곱살 짜리 아이가 학교에서 총격 사건에 대비에 책상 밑으로 숨는 연습을 하는 곳은 미국 뿐입니다."

7살 딸을 둔 부모이자 덴마크 공영라디오 DR의 미국 특파원인 스테펜 크레츠가 초등학생 19명을 포함해 최소 21명이 사망한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 지역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25일(현지시각)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논쟁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똑같은 결론만 났다. 근본적 변화는 전혀 없다. 미국의 총기에 대한 애증관계는 돈과 미국총기협회(NRA)와 같은 로비 집단이 어떻게 정치를 부패시켰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했다.

미국 CNN 방송은 25일 지난해 한 해 동안 총기 폭력으로 숨진 미국의 17살 이하 아동청소년은 1560명으로 2020년부터 현재까지 코로나19로 숨진 같은 연령대 아동청소년(1070명)보다 많다고 보도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최근 5~11살 어린이에 대한 화이자 백신 3차접종을 승인하는 등 미 정부는 코로나로부터 아동청소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는 반면, 이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 총기규제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앞에서 열린 대중미사에서 숨진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무분별한" 총기 유통이 중단돼야 한다고 말한 것을 비롯해 연이어 일어난 총격 사건에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미국의 총기규제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데 반해, 총격이 일어난 텍사스주에서는 사건 당일 규제는 커녕 학교에 더 많은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해묵은 주장이 되풀이됐다. 켄 팩스턴 텍사스주 법무장관은 24일 보수매체 뉴스맥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장한 교사들과 교직원"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텍사스 공화당 상원의원인 테드 크루즈는 CNN에 총기 규제는 총격 사건 예방에 효과가 없으며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 방법 중 하나는 학교에 무장 경비를 배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 무장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총격 사건 때마다 들끓는 총기규제 여론에 맞서 나왔다. 26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2년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격 사건 당시 NRA 부회장 웨인 라피에르는 "총을 든 나쁜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건 총을 든 좋은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이를 두고 소셜미디어(SNS) 트위터에 "놀랍게도 무장 교사와 무장 경비원이 필요하다는 '총을 든 좋은 사람' 주장이 또 나오고 있다. (14일 인종혐오 총격으로 적어도 10명이 사망한) 버팔로와 유밸디에도 총을 든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건을 막을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라며 해당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지적했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주지사는 이번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그는 25일 기자회견에서 총격범 샐버도어 라모스(18)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총격을 가하는 이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애벗은 지난해 총기소지면허 없이도 권총을 소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실상 21살 이상이면 누구나 총기 소지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에 서명한 바 있다.

미국 대중들은 총격 사건이 터져 총기규제 주장이 분출하면 오히려 총기 소지를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 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총기구매시 신원조회 자료를 분석해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뒤 한 달만에 200만정의 총기가 팔렸다고 추정했다. 매체는 적어도 14명이 숨진 2015년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 총기난사 뒤에도 총기규제 움직임이 보이자 다시금 총기 판매가 급증(150만정) 했다고 추정했다. 미 연방수사국(FBI) 신원조회 자료를 보면 실제로 샌디훅 총격이 있었던 2012년 12월 신원조회 건수는 278만건으로 전달보다 70만건 급증했고 샌버나디노 총격이 있었던 2015년 12월 신원조회 건수는 전달보다 100만건 이상 증가한 330만건을 기록했다. <뉴욕타임스>는 정부가 미국 내에서 판매되는 총기를 추적하지 않으며, 개인 간 거래도 많이 때문에 신원조사 데이터도 유통되는 전체 총기량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내 존재하는 총기는 4억정으로 추정된다.

총기규제를 인명의 문제보다 정치적 문제로 보는 시각이 공화당원들 사이에 늘고 있는 것도 거듭된 참사에도 규제안 통과가 어려워지는 이유다. 퓨리서치센터의 연구결과를 보면 2000년 공화당원의 38%가 총기규제보다 총을 소지할 권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는데 이 비율이 2018년에는 76%로 치솟았다. 민주당원의 경우 해당 비중은 2000년에 20%, 2018년에 19%로 거의 변함이 없다. 공화당 의원들은 총기규제안을 "정치적"이라고 매도해 왔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24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살인범이 등장했을 때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화시키려 한다"며 민주당의 총기규제 주장을 비난했다.

르몽드 "미국 학교엔 학살, 고통, 대통령 연설이 있고 다음엔 아무 것도 없다"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인 다수가 총기 규제를 더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제시한다. 지난해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폴리티코 조사에서 응답자의 64%가 총기규제 강화를 지지한다고 답했고 2018년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도 57%의 응답자가 규제강화에 찬성했다. 그러나 지난달 실시된 이코노미스트-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6%는 더 강한 총기 규제가 대량 총격을 막지 못했을 것이라 답해, 총격 사건에 직면해도 미국인들이 규제 강화안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다만 총기 구매시 신원조사 강화 등 특정 규제안에 대한 찬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지난달 실시된 이코노미스트-유고브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신원조사 강화에 응답자 71%가 찬성했다. 여론이 호의적인데도 관련 규제를 통과시키지 못하는 민주당이 무능하다는 질타를 받는 이유다.

민주당은 이번 사건 뒤 하원에서 올라온 인터넷 및 총기전시회에서 총을 구매할 때도 신원조회를 거치게 하고 총기 구매시 신원조회 기간을 늘리는 2개의 총기규제 법안에 대한 상원 표결 전에 최대한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해 보겠다는 방침이다. 총 100석인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뚫고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최소 60표가 필요하지만, 현재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50석씩 양분하고 있어 법안 통과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뉴욕타임스>가 25일 공화당 상원의원 전원에게 해당 법안들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일단 논의라도 해 볼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의원은 패트릭 투메이 등 4명 뿐이었다.

사건 뒤 뉴욕주 및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더 강한 규제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법원에서 막힐 가능성도 제기된다. 연방항소법원은 최근 21살 미만에게 반자동총기 판매를 금지하는 캘리포니아주 조치를 수정헌법 2조가 연령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달 초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명시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판결문 초안이 유출되며 비난을 받은 연방대법원은 공공장소에서 총기 휴대를 제한하는 뉴욕주의 조치에 대해 심리 중이다. 보수성향 판사가 다수인 대법원이 6월 해당 규제안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반복되는 총기 참사와 또 반복되는 총기규제 법안 좌절에 곳곳에서 피로에 가까운 절망감이 표출된다. 사건이 발생한 24일 민주당 상원의원 크리스 머피는 동료 의원들에게 "우린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지는 연설을 하며 총기규제 필요성을 역설했다. 샌디훅 초등학교가 위치한 코네티컷주 민주당 의원인 그는 "어린이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리는 중에 우린 아무 것도 안 했다. 이런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의원님들은 왜 여기 있는 건가"라고 질타했다. 머피의 이 격정적 연설은 소셜미디어에서 널리 공유되기도 했다. 

프랑스 언론 <르몽드>는 25일 사설에서 "미국의 학교에는 학살, 끝없는 가족의 고통, 대통령의 엄숙한 연설이 있고 그 다음엔 아무 것도 없다, 다음 사건이 있을 때까지"고 썼다. CNN 기자 자카리 울프는 25일 기사에서 "총기 폭력의 반복은 슬프고, 예측 가능하며, 또한 영구적"이라며 "나 같은 기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거의 없다는 내용의 새 기사조차 쓰지 않는다. 예전 총격 사건 때 썼던 기사를 다시 게워낸다. 아무 것도 바뀐 게 없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했다.

지난 24일 미 텍사스주 유밸디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용의자 라모스가 난입해 총기를 난사해 학생 19명을 포함, 적어도 21명이 사망했다. 총격범은 당일 사살됐고 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히스패닉계가 90%를 차지하는 이 학교는 7~10살의 저학년 아동들을 위한 기관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10살 이하의 아동이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한국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으로 알려져 소셜미디어에서 팬들을 중심으로 추모 물결이 일기도 했다.

▲25일(현지시각) 한 여성이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에서 전날 일어난 총격 사건으로 희생된 어린이의 사진을 품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효진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