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가 3년 만에 다시 개강합니다. 2022년 5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답사 전문가)는 제79강(제5기 제1강)으로 조선의 법궁(法宮)이자 북궐(北闕)로도 불리던 경복궁(景福宮)과,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임금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진 왕실의 사묘인 칠궁(七宮) 등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이번 답사의 중점사항은 ‘한옥건축에 대한 이해’ ‘궁궐의 구조‘ ’당호(堂號)의 의미’ 그리고 ‘경복궁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서울학교 제79강은 2022년 5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경복궁 정문 광화문 앞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화문-수문장청-흥례문-금천교-기별청-조정-회랑-융문루/융무루-근정전-사정전-강녕전-흠경각-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흥복전-함화당/집경당-향원정-녹산-건청궁-열상진원-집옥재/팔우정/협길당-경회루-수정전-궐내각사터-영추문-점심식사-사직단-칠궁(일요일은 휴관)-경복궁후원-신무문-종친부-동십자각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 등의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경복궁의 발자취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李成桂)는 꼭두각시 왕들을 내세워 막후 통치를 하다가 고려왕조를 끝까지 옹위하려는 세력들을 이방원이 대부분 제거한 뒤, 1392년 7월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1394년 8월에 고려시대의 삼경 중의 하나인 남경의 연흥전(延興殿) 터에 왕도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에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창건한 조선의 법궁, 즉 정궁이 경복궁입니다.
지금은 그곳에 청와대가 들어섰지만 고려 숙종 때 지은 남경 이궁인 연흥전 터는 고려 때부터 명당으로 지목되어 오던 곳입니다. 북으로 주산인 백악(白岳), 동쪽으로 좌청룡 낙산(駱山), 서쪽으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이 둘러싸고 있는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터가 이궁으로서는 적당했으나 새로운 나라의 정궁의 터로서는 너무 좁아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째인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으니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된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입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 따 지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완공 당시 궁궐 중심부의 핵심 시절 위주로 건설되었으며, 궁궐 주위를 구분하는 담장도 없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증설 공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대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궁궐이 완성된 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이 궁궐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詩經)>의 한귀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경복일레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景福)’을 따서 경복궁이라 했으며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의 이름도 정도전이 정했습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이 한양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경복궁은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개경에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讓位) 받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다시 6년 8개월 만에 재 천도를 단행하여 비로소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태종은 창덕궁을 건립하여 주로 그곳에서 거처하다가 태종11년이 되어서야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이는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이복동생들인 방석, 방번과 정치적 동지였던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을 살육한 현장이 경복궁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기피하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세종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는데, 궁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건립함으로써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文),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의 4문 체제를 완성하고 각 문과 다리의 이름도 이때 지었으며 이로써 경복궁이 390여 칸의 명실상부한 조선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1553년(명종 8)엔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명종은 윤원형 등의 지지 하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을 완료했습니다.
경복궁은 완성된 후에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이 발생하였으며 그때마다 많은 개축과 증축으로 그 규모는 오히려 차츰 커져 갔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이후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되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는 갈 곳이 없어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와 주변의 주택들을 포함하여 행궁으로 삼아 정사를 살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까지도 모두 불타버렸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하자 바로 창덕궁을 중건하여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봤으므로 경복궁은 폐허가 된 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여 고종이 이어(移御)하기 전까지 273년간 방치되며 창덕궁에게 조선의 정궁의 역할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자존심만이라도 살리고자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와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 조대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경복궁 중건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정의 조달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각계각층으로부터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사대문을 통과하는 우마차에 통행세를 부과하기도 하고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하여 혼인한 모든 백성에게 인두세를 징수하였고 기존의 화폐 가치보다 백배나 되는 당백전(當百錢)을 찍어내는 등,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화폐의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백성들의 참혹한 고통의 대가로 마침내 1867년(고종 4년) 11월에 경복궁의 복원은 완료 되는데 그 총규모는 7481칸이고 공사비용은 모두 770만 냥이 들었고, 궁궐 안의 궁궐이라는 건청궁(乾淸宮)도 이때 새로 지어졌으며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복궁은 이때 중건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한지 28년 만인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주인을 잃어버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훼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삼한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반포하고 주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거처하였고 순종은 즉위 후 주로 창덕궁에 거처함으로써 1911년 일제는 주인 없는 경복궁의 부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탈취하고 많은 전각들을 헐어서 팔아버렸는데 이때 4000여 칸이 훼멸되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훼절의 결정판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흥례문(興禮門)과 좌우 행각,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영제교(永濟橋)를 철거하고 그곳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것인데 약 4000여 칸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때 광화문의 좌향도 기존의 관악산을 향하던 것을 조선신궁이 들어선 목멱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동쪽으로 약간 틀어 놓았습니다. 2001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흥례문 일원이 복원되고 콘크리트로 서 있던 광화문을 목재로 복원할 때 본래의 좌향으로 바로 앉혀짐으로써 비로소 광화문의 좌향이 바로 잡혔습니다.
복원사업
복원사업이 시작된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전각은 36동만 남았는데 이는 고종 당시 전각의 7% 수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공터가 되어버렸습니다.
1차 복원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이루어졌으며 총 89동의 전각을 복원하여 경복궁 내의 전각은 모두 125동으로,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25% 수준에 이릅니다.
1차 복원사업을 단계적으로 살펴보면,
1단계(1990년~1995년)는 강녕전 및 침전 권역의 복원으로 석조 문화재를 이전하고 강녕전 등을 복원하였습니다.
2단계(1995년~1999년)는 자선당 및 동궁 권역 복원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동궁 권역을 복원하였습니다.
3단계(1996년~2001년)는 흥례문 권역 복원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였습니다.
4단계(1997년~2005년)는 태원전 권역 복원으로 30경비단을 이전하고 태원전과 주변 행각을 복원하였습니다.
5단계(2001년~2010년)는 광화문 및 건청궁 권역 복원으로 기존 콘크리트 광화문을 철거하고 목재로 복원하였습니다.
2차 복원사업은 2011년 10월 3일부터 2020년대 후반까지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계획이었으나, 2015년 12월 15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총 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조정하였습니다. 복원 추진 과정에서 문화재에 대한 방제 여건, 복원 후 활용, 관람객 불편 최소화 등을 이유로 254동을 복원하기로 했던 것을 80동으로 줄이며 공사 기간은 2045년까지로 15년 연장하였습니다.
1단계(2011년~2021년)는 궁중 생활 권역 복원으로, 소주방 및 흥복전 영역의 건물 28동을 복원하였습니다.
2단계(2019년~2026년)는 제왕 교육 및 궁중 군사 권역 복원으로, 동궁 및 오위도총부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3단계(2026년~2034년)는 궁중 통치 권역 복원으로, 궐내각사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4단계(2031년~2042년)는 궁중 의례 권역 복원으로,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복원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철거하는 것입니다.
5단계(2040년~2045년)는 궁중 방어 권역 복원으로, 동, 서 십자각 및 내사복 영역의 건물 1동과 궁장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북원(北苑)이라 불렀던 경복궁후원
경복궁후원은 지금의 청와대 일원으로 고려시대에 남경 궁궐, 조선시대 후기까지 회맹단,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는 후원으로, 대한제국 시기에는 수궁 터였습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고려시대의 남경 터가 좁아서 그 남쪽에 경복궁을 짓고 남경 터에는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을 모아 충성서약을 받는 회맹단(會盟壇)을 설치하였습니다. 태종, 세조, 중종 등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주들과, 전란 등의 책임을 져야 할 선조, 3차례 친위쿠데타로 정국을 주무른 숙종까지 주로 정변이나 전란, 친위쿠데타의 장본인들이 회맹단에 앉아 신료들의 충성을 저울질했습니다.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진 후원에는 1868년(고종 5)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춘안당(春安堂) 등 모두 488칸의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융문당은 왕 또는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를 열던 곳으로 당시 실시하던 과거 시험의 중심건물이었습니다. 융무당 역시 과거 시험의 무과와 활쏘기 시합, 군사들의 교체훈련 및 사열 때 사용됐습니다.
일제는 1928년에는 융문당과 융무당 등 후원의 건물을 모두 헐어버리고 총독관저를 지었는데, 이때 융문당과 융무당의 두 건물은 일본불교교단 진언종소속 융흥사(隆興寺)에 무상 대여하여 용산에 일본인을 위한 절 용광사(龍光寺)를 짓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광복 후 원불교 서울교당은 용광사를 사들여 융문당은 법당으로, 융무당은 생활관으로 사용했으나 두 건물이 있던 용산구 한강로 2가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2006년 전남 영광 백수의 원불교 성지로 옮겨졌습니다. 부지가 넉넉하지 않아 융문당은 영산성지에, 융무당은 영산성지에서 7km 떨어진 옥당박물관 안에 세워졌습니다.
수궁(守宮)은 경복궁후원을 지키는 금위군 군사들을 위한 건물인데 한일병합 이후 다른 건물과 함께 훼철되었고, 1939년 조선총독부가 이곳에 총독관저를 지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최고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의 숙소였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의 경무대와 윤보선의 청와대를 거쳐 지금까지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임금을 낳은 후궁의 사묘(私廟), 칠궁
육상궁(毓祥宮)은 왕실의 사묘로서 달리 칠궁(七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왕실의 사묘란 조선시대 정실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즉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육상궁은 원래 1725년(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으로 개칭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습니다.
1908년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연우궁(延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경우궁(景祐宮),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선희궁(宣禧宮),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의 대빈궁(大嬪宮),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의 저경궁(儲慶宮)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의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습니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사직단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사지내던 곳입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임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해서 대대로 세습이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씨가 마르지 않게 대를 잘 잇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비옥한 토지와 튼실한 씨앗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중심으로 임금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宗廟]을 왼쪽에 두고 조상의 음덕으로 대를 잘 이을 수 있도록 기원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지내는 곳[社稷壇]을 두어 임금이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조선 초기의 사직단을 보면, 한 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으며 그 밖으로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쌌으며 이 담장에도 역시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속 건물로는 13개의 주요 전각들이 있었는데 서쪽에 제기고, 재생전, 전사청, 잡물고, 수복방 등이 위치하고, 동쪽에 악기고, 안향청, 차장고, 악공청, 부장직소 등이 위치하는 등 양쪽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일제가 1922년에 공원을 만들면서 제단 주변 주요 전각들을 심하게 훼손하거나 철거했는데 현재는 재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 있으며 최근에 전사청 구역이 복원되었고 안향청 구역이 발굴조사 중입니다.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중춘(仲春), 중추(仲秋), 납일(臘日)에 지내고,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 가뭄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5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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