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이 끝났다. 지난 8일 강릉·동해의 주불이 진화된 데 이어 13일엔 역대 최장 산불로 기록된 울진·삼척의 주불까지 진화가 완료됐다. 대피소에 모였던 이재민들은 각자의 집이나 임시거주지로 흩어졌다. 15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울진·동해 방문,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의 강릉·동해 방문을 기점으로 산불 현장에 대한 정계와 언론의 발길도 사위어갔다
다만 산불이 끝났어도 산불 이전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려앉은 집, 불타버린 농지와 농기계들, 화재의 영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산과 숲은 저절로 복구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가 지나간 현장엔 앞으로 감당해야 할 막대한 물질적, 시간적 비용이 부담으로 남아있다. 산불이 끝난 현장에서 '끝나지 않은 산불'을 말하는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다.
"다른 곳에 가느니 여기가 낫지"… 집 잃고 경로당에 남은 사람들
강원도 삼척시 북평항에서 시멘트 운반업에 종사 중인 이정만(63) 씨는 최근 시간이 날 때마다 강릉시 옥계면 남양2리 경로당을 찾는다. 강릉·동해 산불로 70년 넘게 지켜오던 집을 잃고 경로당에 홀로 거주 중인 어머니 김옥자(93) 씨를 돌보기 위해서다. 18일 남양2리 경로당에서 만난 이 씨는 "휑한 경로당에서 홀로 잠들 어머니가 걱정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재 당시, 젊고 움직일 여력이 있는 몇몇은 필사적으로 물을 뿌려 집을 지켰다. 집을 지켜내지 못한 일부는 나라에서 제공하는 임시숙소를 이용하거나, 친인척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마을 최고령자에 속하는 김옥자 씨의 경우 그중 어느 쪽도 여의치 않았다. 사고 이후 이정만 씨도 삼척의 본인 거주 아파트에 어머니를 잠시 모셨지만 "닭장 같은 아파트 생활"에 어머니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다.
산불은 집뿐만 아니라 집과 함께 구축해온 김 씨의 생활 그 자체를 파괴했다. 하루아침에 자식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불편했다. 집 근처 이웃들과의 소소한 네트워킹이 사라졌고 일상에 활력을 주던 소일거리들을 잃어버렸다. 얼마간 자식 집을 옮겨 다니던 김 씨는 결국 경로당에 혼자 남길 택했다. 불타버린 집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다른 곳에 있느니 그래도 여기가 나았다".
같은 날 울진·삼척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2리 경로당에서 만난 전원중(82) 씨, 주춘자(78) 씨 부부의 상황도 비슷했다. 산불이 일어나기 얼마 전 허리수술을 받았던 주 씨는 화재 당일에도 재활운동을 하러 집을 나섰다가 그대로 이재민이 됐다. 허겁지겁 마을로 돌아오자 눈에 들어온 것은 완전히 불타 내려앉은 본인들의 집이었다. "집 쪽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착잡한 마음을 전한 주 씨는 현재 마을 경로당에서 임시로 거주 중이다.
전 씨와 주 씨는는 원래 집 앞 공터에 임시조립주택을 설치해 달라 요청할 계획이다. 다만 화재로 잃은 것이 집 뿐만은 아니다. 기자의 질문 사이사이에 주 씨는 한숨을 내쉬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부부는 맨몸으로 나와 맨몸으로 이재민이 됐다. 화마는 그들에게서 집, 살림살이, 일거리와 생계까지 앗아갔다.
충분하지 않은 재난지원 …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빚내서 집 지으라 한다"
남양2리 4반에 흙으로 지어놓았던 김 씨의 집은 현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전소된 상황이다. 나곡2리 경로당 인근 전 씨 부부의 집 또한 뼈대를 제외하곤 모두 불타고 내려앉았다. 두 경우 모두 정부 지침상의 '완파' 상태다. 현행 기준 사회재난 시 집이 완파된 가구가 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 주거비는 1600만 원이다.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 입장에선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전 씨가 아들과 함께 추산한 주택재건 최소 견적만 해도 1억3000만 원이 나왔다.
행정안전부가 동해안 산불 피해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주거지원 정책에 따르면 주택전소 피해자들은 7.3평 규모의 임시조립주택을 지원받을 수 있다. 1년 동안 무상거주가 가능하고 상황에 따라 연장신청도 할 수 있다. 김 씨나 전 씨 부부처럼 임시숙소에 머무르고 있는 산불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컨테이너 숙소여도 좋으니 일단 내 집에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1년이든 조금 더 연장하든, 그 다음은 어떡하느냐"며 걱정을 내비쳤다.
주택복구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주 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됐든 집은 다시 지어야 한다. 집을 지으려면 상당한 수준의 비용이 필요하다. 모아놓은 돈은 부족하고, 피해자 대부분이 고령층인 만큼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노동수단도 마땅치 않다. 생계로 삼던 농사일이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본격적인 농사는) 내려놓은 지 오래"라고 주 씨는 설명했다. 화재 이후엔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대책은 융자다. 국토교통부 주관으로 산불 피해자들에겐 재해주택복구자금 융자가 제공될 예정이다. 최대 8840만 원의 융자가 연 1.5% 금리로 제공되며, 17년간 분할 상환이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고령의 피해자들이 이를 갚아나갈 수 있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는다. 주 씨는 "우리가 모은 돈이 어디에 있나, 결국은 갚지도 못할 빚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며 "자식들에게 신세지는 것이라 미안하다"고 말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가장 답답하다"
이 씨는 산불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끝나지 않은 산불'의 흔적이 그의 집 근처 현장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가 가리킨 소나무 숲만 해도 일대가 모두 검게 그을린 상태로 매캐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비슷한 풍경이 동해, 삼척, 울진 곳곳의 야산에서도 반복적으로 펼쳐졌다.
산이 입은 피해는 그대로 인근 거주민들에게 전가된다. 국내 유력 관광지인 동해에선 지난 12일과 13일 지역 대표 관광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입장객이 전주 주말 대비 80% 주는 등 관광객 감소세가 포착되기 시작됐다. 국내 최대의 송이 생산지로 꼽히던 울진에선 이번 산불로 추정 400가구 이상의 송이 채취 농가가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가 나오기도 했다.
산불 현장에 남은 피해자들은 특히 "구체적인 대책을 모르겠다"는 것을 현재 상황의 가장 답답한 점으로 꼽았다. "임시주택으로의 입주, 구체적인 생계지원 등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주 씨와 전 씨 부부의 경로당 생활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가 없다. 울진군은 죽변면 등에 임시주택단지를 설치하고 있으나 개별 단위의 임시주택 설치 일정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최근 부부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집 뒤쪽 대나무밭 아랫부분을 굴삭기로 깎아 놓았다. "언제 (입주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일단 준비라도 해놓고 있다"고 그들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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