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 싸우며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우리나라의 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3.1절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기념했던 날로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3.1절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겠다는 민족의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독립의 기반을 닦아나갈 수 있었다. <프레시안>은 3.1절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독립운동가의 후손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편집자
김은병(경기도 광명시, 81세) 선생님은 이곳에 계신 애국지사 김성은 선생님의 손녀로 교직에 계시다 현재는 농업에 관심을 두고 계신다고 본인을 소개하였다.
프레시안 : 김성은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김은병 : 저의 조부님은 서울 북아연동에서 태어나셨다. 이후 전북 군산에 가서 터를 잡으시고 생활하시다가 영명학교에서 3.1운동을 주도하시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옥고를 치루셨다. 조부님은 이일로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셨다. 실은 저희 아버지도 조부님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하셨다. 지금 아버지는 보훈처에서 추서 심사중이시다.
프레시안 : 대를 이어서 독립운동을 하셨으니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
김은병 : 그런데 저희 아버님께서는 당연히 국민이 나라를 위해 해야할 일인데 무슨 상이시냐면서 그 공로에 대해 상을 나라에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가 없다면서 절대 추서를 못하게 유언으로 남기셨지만 어떻게 심사에 들어가게 됐다. 아버지는 독립운동 이후 5.18 수습위원으로 활동하시고 YMCA에서 젊은 청년들을 위해 평생을 몸 담으셨다.
프레시안 : 조부님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주신다면.
김은병 : 저희 아버지의 애국심은 조부님께서 심어주셨다. 저의 아버지가 여덟살 때 군산 개복동 교회 철탑위에 함께 올라가서 “우리나라가 지금 일본하고 싸워야 하는데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애국심이 자리 잡으셨을거라 생각한다. 아버님께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애국심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마음 깊이 애국심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교회 지하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드시는 일을 했다고 들었다. 재봉틀을 준비해서 태극기를 만들면서 교회 종탑에 올라가 일본군이 오는지 감시하고 일본군이 오면 재봉틀을 지하에 숨기고 여전도들이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위기를 넘겼다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태극기를 무사히 만들었고 영명학교에서 3.1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그러시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셨다.
프레시안 : 할아버지와 아버님이 자랑스러우시면서도 힘들었을 당시를 생각하시면 너무 안타까우실 것 같다.
김은병 : 서대문형무소를 가봤다. 그때 첫 느낌은 정말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이겨냈을까? 어떻게 동료를 배신 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실 수 있었을까? 나는 정말 “안해”, “못해” 이랬을 것 같다. 너무 무서웠을 것 같다. 나는 못 버텼을 것 같다. 그 많은 형틀, 무서운 괴상망측한 것들. 정말 나는 이겨내지 못했을 것 같다. 이후 할아버지께서 형무소에서 나오시고 나라를 위한 일들을 계속 하셨을 때 나는 그게 창피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창피해할 일이 아닌데 그때는 어린 나이에 너무 모르는 나이였기 때문에 창피했다. 그점이 너무 죄송하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 전통 무예인 택견을 무척 잘하셨다. 그게 생각난다. 그리고 할머니도 생각이 나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 옥바라지를 하시다가 지쳐서 할아버지가 출소하시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게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독립운동을 하신게 너무 자랑스럽다. 어렸을 때지만 할아버지의 동지들이 집에 모이셔서 이야기 하던 모습들도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저도 지금 광복회 회원으로 나라를 위한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프레시안 :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김은병 :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의 바른 역사를 배웠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민족성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나라가 잘 발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또한 개인주의와 자주적인 삶도 좋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따뜻한 인격을 형성해서 서로 아끼며 살아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은 최연식(서울시, 75세) 선생님으로 애국지사 최장윤 선생님의 자제분이다.
프레시안 : 최장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최연식 : 아버님께서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셨다. 임시정부 화북지구 특파원인 이규학 선생이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을 때 이를 구출하여 함께 탈출해 성공해서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때 김구 선생으로부터 소절지구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초모와 통신 연락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셨다.
프레시안 : 아버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가정을 돌보시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버님을 원망한 적은 없으신지?
최연식 : 물론 어려웠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다. 독립운동을 하시고, 후세를 위해 학교까지 설립을 하셨기에 어렸을 때는 삶이 어려웠지만 그때도 지금도 아버님이 무척 자랑스럽다.
프레시안 : 독립운동의 후손으로 3.1절을 하루 앞둔 오늘 애국심에 대해 젊은 세대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연식 : 세대에 따라 생각이 다 틀린 것 같다. 본인들이 역사를 배워서 이해하는 것에 따라 달린 것 같다. 요즘 강제로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아온다는게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컸을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 부족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만나본 이 두 분은 조금의 원망 없이 70세, 8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혼자 먼 거리의 현충원을 찾을 정도로 애정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본인들의 어려움을 나라에 보상을 요구하지도 또 바라지도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 대한 걱정, 올바른 역사관을 가졌음을 소망했으며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이해의 모습을 보였다. 역시 큰 나라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분들의 후손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담 / 문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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