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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엄마·언니·누이들의 '팔자'에 '역사성'을 입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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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엄마·언니·누이들의 '팔자'에 '역사성'을 입히기까지

[기자의 눈] '국가폭력과 여성' 연재를 마치고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2021년 12월 소식지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 바로 가기)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③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上 대한민국이 간첩으로 내몬 한 여자의 '평생 자술서' 
④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下 "내 아들 내 놓아라" 엄마들은 밤새 철창을 잡고 흔들어 댔다
⑤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上 "15년 만에 알게 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 범인은 '국가'였다"
⑥'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下 "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 그 한 줄로 시작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
⑦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上 1968년, 실미도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
⑧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下 실미도 사건, 남은 사람들의 절규 "사형하고 암매장…어디 묻었는지도 말 안해요"
⑨ 전 YH 노조 지부장 최순영 上 "깨질 거면 크게 깨지자"던 여성들의 결의, 유신 붕괴의 도화선 되다
⑩ 전 YH 노조 지부장 최순영 下 경찰 천명을 동원한 국가폭력도 이 여성의 양심을 꺾지 못했다
⑪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上 "'팔자'라 불린 그녀들의 사연, 더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⑫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下 "과거사 진상규명, 이젠 젠더관점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최순영 전 의원. YH사건 당시 노조지부장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아버지의 고향, 내 할머니가 거의 평생을 사신 작은 시골 마을에는 오래전 '전라도'라고 불리던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옛 어르신 대부분 그렇듯 그분도 어렸을 때 시집와 남은 평생을 그 마을에서 사셨으니 아마 족히 50년은 그 마을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 50여 년간 그분은 '전라도'였다.

그분의 남편은 툭하면 "전라도 X 때문에 재수가 없다"면서 그분을 때렸더랬다. 그때만 해도 밤에 가로등은 고사하고, 넓은 논 사이로 차 한 대 겨우 지날 법한 비포장길을 굽이굽이 따라 들어가야 했던 마을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밖으로 거의 나간 적이 거의 없었을 테다. 전라도가 어디 있는지는 알았을까. 그런데도 '전라도'는 낙인이었다. 그 작은 시골 마을에까지 언제부터 어떻게 뿌리내린 지도 모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아주 어린 아이에게도 그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다는 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젠가 그분을 보고 "할머니가 전라도예요?"라고 했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곽정례 씨. 1950년 나주경찰부대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이 기획 연재를 제의했을 때 기억 속 희미해진 그 할머니가 떠올랐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분. <국가폭력과 여성>은 과거사를 여성의 시각에서 재맥락화하자는 취지의 기획이었지만 나에게는 좀 더 다른 의미로도 다가왔다. 내가 목격한 폭력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이기도 했고 그분을 향한 사과이자 위로이기도 했다. 꼭 해야겠다고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처음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사'의 틀부터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과거사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과 그 이후의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국가 및 적대세력에 의한 인권유린 등. 기록된 피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여성 피해자의 수는 남성에 비해 적은 데다 주로 민간인학살 영역에 집중됐다.

그렇다고 그 시절, 폭력의 칼날이 여성을 피해갔을 리 없었다. 그저 이 세상은 거의 대부분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고 기록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사(History)의 흐름은 그게 자연스러웠다. 여성은 기록하지 않았고, 기억되지 못했고, 그래서 지워졌다. '젠더데이터'라는 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매우 최근의 일이니 놀라울 일도 아니다. "여성의 경험과 남성의 경험은 다르다." 취재는 그 명제에서 출발했다.

▲김순자 씨. 삼척 고정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 ⓒ프레시안(최형락)

언제나 있었지만 늘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겨진 삶의 모습엔 이름이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었고, 자신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고문을 당했고 또 가족을 잃었다. 남은 평생을 누명과 낙인 속에 고통받으면서 살아갔다. 파괴된 가정을 지키고 생계를 책임지면서. 또 억울한 죽음의 책임을 물으며 맞서 싸웠다. 그렇게 사는 걸 '팔자'라 부르기도 했다.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기도 했다.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더 약한 대상에게 향하는 것, 국가폭력이 가정폭력으로 재현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차별과 혐오, 낙인은 여성에게 더 잔인한 법이다. 폭력이 휩쓸던 시절,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남성 보호자가 없는 여성의 삶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기억하고 말하며 싸우는 것. 여성의 역사는 민중의 역사이기도 했다.

▲ 김호정 씨가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11명의 이야기와 진실 규명을 기록한 책 <발부리 아래의 돌> ⓒ우리학교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을 마주했다. 여성 당사자를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자신을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허다했다. 또 옛 여성의 삶이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을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출가한 딸이 친정 일에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서는 일도 상상하기 어려웠으니 더욱 그랬을 테다. 또 여성에게만 가해진 모욕과 폭력은 기억을 마주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말하고 싶지만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됐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많은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편, 혹은 아들을 통해 전했다. 만났던 한 분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인터뷰였음에도 남동생의 허락을 구했다. 교육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아 구체적인 설명이 어려운 분도 있었고, 더욱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몸을 사리는 분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도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여성의 경험을 좇는 건 더 많은 시간과 더욱 섬세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이런 한계 속에서도 기꺼이 만남에 응해 주신 분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할 말이 참 많았다. 한자리에 앉아 여섯 시간을 내리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 시간도 모자라 여러 차례의 만남과 전화로 이야기를 했다. 약속이나 한 듯 오랫동안 모으고 모은 자료를 가득 들고 왔다. 무슨 영화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 그것도 국가가 저지른 일이 수십 년 치 삶에 배어있었다. 앞에 놓인 차가 식고 목이 쉬어도 한 많은 세월 앞엔 부족할 뿐이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를 수백 번도 더 했을진대 몸이 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메어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계속 눈물을 흘렸다. 국가폭력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한순간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임충빈 씨. 실미도 부대원 故 임성빈 씨의 동생. ⓒ프레시안(최형락)

처음 네 편으로 계획한 이번 기획 연재에서 취재를 이어갈수록 점점 욕심이 생겼다. 여성의 경험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차별과 혐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 어마어마한 경험이었다. 그만큼 그 폭력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

공교롭게도 취재를 이어가던 중 두 독재자가 죽었다.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전두환, 국가장을 치른 노태우. "공과는 따로 봐야한다"거나 "경제는 잘 했다"는 말들이 객관과 중립이라는 포장을 쓰고 떠돈다. 마침 그때 온 가족이 간첩단으로 몰린 여성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글도 모르던 그의 아버지는 간첩단 수괴가 돼 내란음모죄 등등의 혐의로 사형당했다. 처절한 투쟁 끝에 가족이 간첩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기까지 4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뒤틀림의 끝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다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는 이름을 찬찬히 되뇐다. 취재를 모두 마칠 즈음, 이 이름에서 깊은 쓴맛을 느꼈다. 이 폭력의 잔해를 차마 과거사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부정한다는 이들이 한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세상. 감히 누가 누구와 화해할 수 있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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