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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라고 불리던 그녀들의 사연, 더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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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라고 불리던 그녀들의 사연, 더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⑪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上

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연재의 마지막은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입니다. 김 교수는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 과거청산, 그리고 여성노동사 분야를 연구해왔습니다.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의 시기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을 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 사회운동 단체의 상근자로 생활하다 뒤늦게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여성노동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김 교수의 연구는 2007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임용되며 해방 후부터의 국가폭력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습니다. 특히 국가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과 여성 노동자에 대한 구술사 연구를 통해 여성사, 지방사적 측면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일에 주력해왔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담아 지난해에 <젠더폭력 과거청산, 어떻게 할 것인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최근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부터 해방 후 한국현대사에 나타난 국가폭력을 젠더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에 대한 과거청산 방안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이뤄졌습니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프레시안(최용락)

프레시안 : 국가폭력 사건을 오래 연구해왔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임용되기 전에도 여성 노동사를 연구해왔는데 이 분야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

김상숙 : 20대 중반에 잠시 몸담고 있을 때 섬유 노동자 10~20대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섬유 노동은 굉장히 고되다. 종일 서서 일하는데, 저임금·장시간 노동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지난날 한국 경제가 발전했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작업장 안에서는 회사의 관리자로부터 온갖 모욕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성희롱·성폭력을 많이 당했다. 실제로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성폭행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 현장에서도 그 10~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어리지만 너무나 당차고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봤다. 보면 전부 가난한 집안 출신에 가족부양의 짐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생활력도 강하고 일도 잘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알고 정이 깊었다. 그런 모습이 기억에 남아 나중에 그 친구들의 삶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관련한 연구를 이어오다 2007년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임용됐다.

프레시안 : 그때부터 과거사 여성 피해를 연구한 건가.

김상숙 : 진실화해위원회는 접수된 사건을 조사해 진실 규명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 안에서는 조사관으로서 주로 사건보고서를 썼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을 조사하면서 여성 민간인의 학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됐다. 2010년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뒤에 여성 민간인 학살에 대해 더 깊이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가 이명박 정권 시기라 조건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10월 항쟁' 등 국가폭력과 과거사 청산 전반에 대해 연구하면서, 마음속으로만 큰 틀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연구자로서, 또 조사관으로서 많은 국가폭력 사건을 접했다. 인터뷰 주제인 여성 피해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연구나 사건이 있나.

김상숙 : 많은데 공개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그런 사례(공개할 수 없는 사례)가 더 기억에 남는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두 분의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제주4·3항쟁과 관련해 증언해주신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임실군 청웅면 폐금광 사건 관련 분께서 증언해주신 사례이다. 둘 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에 속하는 사례이다.

제주4·3사건 생존자께서는 학살로 남편을 잃었다. 제주4·3항쟁이 일어날 당시 18살 임신부였다. 마을의 남성들은 학살을 피해 한라산으로 도망간 뒤였고 여성, 아이, 노인들이 마을에 주로 남아있었다. 그분도 그랬다. 군인·경찰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어와 가족 중에 입산자가 있는지 주민들을 취조했다. 그분은 임신한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다. "남편 어디로 갔는지 대라"면서 자빠트려놓고는 배 위에 나무토막을 놓고 토벌대가 양쪽에서 시소를 탔다. 남자들이 자기 어머니한테는 얘기 안 해도 각시한테는 어디로 가는지 얘기한다고.

토벌대가 마을, 집 모두 태우자 남은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도망갔다. 기록을 보면 당시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몇만 명이 피신했다고 한다. 그분은 한라산에서 한겨울 혹한기를 보냈다. 임신한 상태에서 시어머니와 어린 시누이 시동생들 데리고.

이듬해 봄부터 군인들이 일종의 '회유 작전'을 펼쳤다. 자수하고 내려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이분도 그때 산에서 내려갔다. 당국은 이런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 귀순자라고 하면서 수용소에 몰아넣었다. 이분이 갇혔던 수용소는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창고였다. 거기서 출산하는 여성들 많았다. 이분도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 생각해봐라. 그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반 남성들 잡아갔는데, 당시엔 결혼을 일찍 하니까 다 또래의 어린 여성이었고 임산부가 많았다. 이분도 17살에 결혼했다.

프레시안 :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을 텐데 제주4·3항쟁 당시 죽은 여성이 많았나.

김상숙 : 여러 자료에서는 그 당시 제주에서 2만5000명~3만 명이 죽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4·3위원회가 유족의 신고를 바탕으로 심의 결정한 희생자 중 20%가 여성이라고 한다. 여성들이 많이 학살당했던 시기는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초까지,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고 주민들이 학살을 피해 한라산으로 도망 다니던 시기라고 한다. 당시 토벌 작전 과정의 학살로 죽은 사람도 많지만, 그 뒤에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도 많다고 하다.

▲제73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유가족들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분이 있던 곳처럼 당시 제주도에는 그런 수용소가 많았다. 이분은 수용소에서는 그런 피해를 겪지 않았는데 제주4·3사건 보고서를 보면 수용소에서 성고문, 성폭행도 빈번했다.

프레시안 : 임실 청웅면 폐금광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

김상숙 : 1950년 9‧28 이후부터 호남이나 경남 서북부의 군경 토벌 작전 지역에서는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군대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니까, 마을에 군인이 들어온다 하면 주민들이 산속이나 굴로 피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임실군 청웅면에는 일제강점기에 금을 캐던 큰 폐금광이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곳에 숨었다. 유족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 굴 안에 몇 백, 몇 천 명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 주민들은 갱도가 미로처럼 얽혀 벌집처럼 된 캄캄한 곳에 각자 식구들끼리 숨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을 수 없으니까, 1951년 3월에 토벌대가 어떻게 했냐면 굴 입구가 36개인데 그중 28개를 비밀리에 막고 나머지 입구 앞에서 불을 피웠다고 한다. 태우면 연기가 매운 고춧대 같은 것으로 사흘 동안 불을 피웠다. 굴 안에 있던 주민들은 대부분 연기에 질식돼 죽었다. 아기, 어린아이들이 가장 먼저 죽고. 연기 못 견디고 굴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입구에서 총 쏴 죽였다.

이분은 엄마, 오빠 내외와 같이 들어갔는데 다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굴속에 연기가 들어오고 아비규환이 됐다.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오빠 내외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군인들이 사흘간 불 피운 뒤에 횃불 들고 남은 생존자를 확인했는데 이분이 그때 끌려 나왔다. 생존자가 몇 안 됐다. 그분이 그때 나오다가 엄마가 쓰러져 있는 걸 보고는 엄마 가슴에 손을 대니까 돌아가셨는데도 가슴이 따뜻하더라고 했다. 군인에게 끌려 나가니까 더 그냥 나왔는데 그게 그분의 평생 한이라고 했다.

그때 그분과 사람들은 지서에 갇혀 취조 당하다 열흘 뒤 모두 총살됐다. 그분만 살아남았다. 군인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이분을 풀어줬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프레시안 :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 같다.

김상숙 : 사건 당시 그분이 15살이었다. 그 사건 후 평생 폐가 안 좋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겪은 후에 몇 년간 매일 엄마가 꿈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꿈에 엄마가 "이제 놓고 가라"라고 하시더니 다시는 안 나오셨다고 한다. 꿈을 통해 외상을 재경험하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치유해 나가신 것 같다. 그런데 지금도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하신다. 그분이 지금 80대 중반이신데 그 이야기를 하실 때는 15살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폐금광 안의 주민들의 시신은 나중에 군경의 토벌 작전이 다 끝나고서 겨우 수습했다. 그분도 나중에야 큰오빠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인근 지역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가족이다.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낸다. 아예 가족이 모두 몰살됐거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시신은 수습도 못 했다. 1951년에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유족들이 100여 구의 시신을 찾아갔고 200여 구를 굴 반대편에 수습했다는 증언도 있어 유족회에서는 사망자를 최대 700명까지로 보고 있다.

이분과 제주4·3사건 피해자는 그래도 증언을 공개적으로 해 주신 분들이다. 트라우마가 심해 공개적으로 증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국가폭력 생존자들을 알음알음 소개받아 구술조사를 했다. 10년 전만 해도 피해자 네트워크 형성이 안 돼서 피해자 찾는 게 어려웠다. 지금은 유족회나 그런 네트워크는 많지만 피해자분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그건 당연하지 않습니다"…'팔자'라 불리던 것들

프레시안 : 여성피해는 남성피해와 어떻게 다른가.

김상숙 : 국가폭력 사건 자체가 다양하다. 그런데 여성이 국가폭력 피해를 겪은 경우, 피해자가 국가폭력과 동시에 가부장제하의 성차별적 폭력, 함께 겪었던 경우가 많다. 서산개척단 사례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서산개척단은 1960년대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다. 황무지였던 서산 염전을 개척하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켰다. 주로 10대 후반~20대 초반 남성이었다.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참혹하니까 개척단원들이 자꾸 도망갔다.

그래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든 대안이 결혼이었다, 가난한 여성들 끌고 가 강제결혼시켰다. 여자 막사, 남자 막사 따로 두고 어느 날 갑자기 다 나와서 줄 서라고 해서 결혼시킨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다. 미혼은 군대 막사 같은 곳에서 생활하다가 결혼하면 판잣집을 지어줬다.

결혼한 여성들은 이후에 가사·돌봄 노동을 전담했다. 여성들이 자기 남편은 물론이고 개척단 안의 다른 미혼 남성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 당시 서산개척단은 원조물자를 받아 배급해줬는데, 위의 간부들이 다 빼돌렸다. 그래서 배급은 거의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나왔다. 그럼 여성들은 그 적은 배급식량으로 식사를 준비하면서, 남성들과 아이들에게 먼저 주고 남은 걸 먹는 것이다. 아이 양육도 책임져야 한다. 그러면서 간척에도 함께 동원된다. 이중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분들은 분명 피해를 겪었음에도 자신의 피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면 그렇게 사는 게 당연했으니까. 강제결혼도 마찬가지다. '팔자려니'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결혼한 건데 어쨌든 결혼하면 그렇게 살아야 했다. 소수이지만 이런 피해자를 만나면서 그동안 과거 청산을 하면서 왜 이런 피해는 다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 부분들이 사회적 의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여성피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있나.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어땠나.

김상숙 :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젠더 관점의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이 젠더 관점을 가지고 있거나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국가에 의한 성폭력, 즉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 등에 의한 과거사 성폭력 피해도 최근에야 5·18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됐다. '미투운동'이 있었고 그 흐름 속에서 2018년에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성폭력 피해자가 '미투'에 나서면서부터다. 5·18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따로 다루고 있다. 그 외의 다른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여성피해는 또 성폭력 피해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섹슈얼리티 측면의 폭력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적 폭력이 있다. 이처럼 성폭력을 포함한 더 넓은 범주의 폭력을 '젠더폭력'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도 국가폭력의 범주에서 발생했다면 국가가 가해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프레시안 : 서산개척단 사례처럼 피해가 피해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김상숙 : 제가 다뤘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있으면서 조사 과정에 유족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여성 유족은 주로 자신의 남편, 아버지, 오빠 등 남성 가족의 유족으로서, '2차 피해자'로서 증언한다. 진실화해위원회 측의 사건 조사도 죽은 사람을 1차 피해자로 두고 그 중심으로 조사한다. 그런데 그 피해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냐면, 그건 전혀 아니다. 되레 죽은 사람은 총 한 방에 돌아가셔도 남은 유족은 이후 70년을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빠가 죽으면 엄마가 가장이 돼 수십 년을 고생한다. 이런 건 피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실제로 유족인 증언자를 만나도 스스로 자신이 1차 피해자라 생각지 않는다. 피해자의 가족으로서 2차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 살아온 걸 보면 그들은 1차 피해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프레시안 : 여성피해에 관한 기록이나 증언은 많은 편인가.

김상숙 : 성폭력 사건의 경우, 일반 성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성폭력 사건도 피해 생존자가 스스로 증언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성폭력은 2차 피해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피해자 스스로 드러내는 걸 꺼린다. 또 어머니가 그런 피해를 겪었어도 자녀가 그 피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명예를 훼손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관에서 진실규명을 위해 사건을 접수할 때도 그렇다. 남성피해가 많이 접수된다. 남성 희생자는 자녀가 있는 경우에 아버지의 피해를 진실규명 신청하는 일이 많다. 자녀가 없는 경우엔, 우리나라 풍습에 양자를 들이는 게 있다.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려고. 그런 분들은 양자가 어릴 때부터 양아버지가 어떻게 학살됐는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 사연을 좀 안다.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다.

그때 그 여성은 다른 이유로 죽었다

프레시안 : 기록하는 과정에서 누락이 많았다. 이 역시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공적인 영역에 진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기 어렵다는 성차별적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민간인학살에서 사건 유형에 따라 여성이 많이 학살된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이유가 있나.

김상숙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은 1950년 6월 25일부터 국군에 의한 9‧28 서울 '수복' 이전의 시기와 이후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9‧28 이전에는 인민군 비점령지역에서는 한국 군경에 의한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이하 '미군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그 외 인민군 점령지역에는 인민군이나 지방 좌익, 이른바 '적대 세력'에 의한 학살 사건이 있었다.

둘째, 9‧28 이후에는 한국 군경에 의한 부역 혐의 학살 사건과 군경 토벌 작전 과정의 학살 사건(이하 '군경 토벌 사건')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도 있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여성 희생자 수가 9‧28 이전에는 미군 사건이 많고, 9‧28 이후에는 부역 혐의 학살 사건과 군경 토벌 사건이 많은 편이다.

ⓒ프레시안(최용락)

프레시안 : 여성피해가 가진 특성이 있나.

김상숙 : 여성 민간인학살의 경우엔 학살된 이유가 남성과 다르다. 대살(代殺)이 많다. 아버지, 남편 등 남성 가족 대신 죽이는 것. 남성 가족이 도망가고 없으면 그 대신 죽이는 것이다. 실제 그 여성이 빨갱이인지 여부는 상관없이. 대살은 다른 나라에선 잘 안 보이는 사례다. 우리나라, 동아시아 특유의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다. 가족이나 일가를 한 덩어리로 보고 가족 중 한 명이 빨갱이면 나머지 가족도 빨갱이로 낙인 찍고 같이 죽이는 식이다. 여성 민간인이 학살된 사유는 그런 경우가 많다.

프레시안 : 토벌과 부역 혐의 학살은 어떻게 다른가.

김상숙 : 부역 혐의 학살은 9‧28 이후에 '부역 혐의자'라고 해서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을 도운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인민군 점령지였던 곳에서 "너 빨갱이 했지?", "빨갱이 가족이지?" 하면서 죽이는 것이다.

개전 직후 한국 정부는 피난민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인민군이 빠르게 남진하면서 점령하다 보니 인민군 점령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의 통치를 수용해야만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국군이 수복한 후에는 이런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부역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월북하거나 피신했으므로, 스스로 별다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가 학살된 경우가 많았다. 부역 혐의자 중 일부는 당국에 체포되거나 자수하여 법적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법적인 재판 없이 현장에서 학살된 경우가 많다.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

부역 혐의 학살 사건은 사람을 선별해 죽이는데, 가족 단위, 일가 단위로 학살된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여성 희생자가 많다. 이때 여성을 학살한 것은 재생산 방지라는 목적도 있다. 후손을 없애 집안 전체의 씨를 말리는 것이다.

물론 9‧28 이전 인민군 점령했던 지역에서 일어난 적대 세력에 의한 학살 사건에서도 여성이 가족 단위, 일가 단위로 학살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난 70여 년 동안 분단 반공체제에서 적대 세력에 의한 학살 사건은 상대적으로 그 진상이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반면, 부역 혐의 학살 사건 등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고 사회가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년 사이의 일이라 볼 수 있다.

호남 쪽 일부 지역과 경남 서북부 지역, 특히 지리산 일대에는 9‧28 이후에 미처 북쪽으로 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숨어있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이들의 편에 선 지방 좌익도 지리산으로 도망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이쪽에 군경의 토벌이 집중적으로 있었다. '11사단'이라고 군대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산속을 수색하기가 어렵지 않나. 그러니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주변 마을을 없애는 것이다. 집을 다 불태우고 식량, 가축도 모두. 빨치산 보급기지가 될까 봐. 마을주민도 학살했다. 피난 가기 어려운 여성, 아이, 노인들이 주로 남아 있다가 학살됐다. 또 피난 가다 학살된 경우도 있었다.

토벌은 작전의 성격이 강하다. 연행·구금·학살 현장에서 성고문, 성폭행, 성기 등의 신체 훼손 폭력도 잦았다. 지역단위 학살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미군의 공중 폭격에 의한 학살 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바탕으로 통계를 냈을 때 개전기, 즉, 6·25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 이전까지 낙동강 전선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 폭격이 많았다.

후방의 주거지역이나 낙동강 전선 부근의 교전지역에서 많이 일어났다. 큰 집이나 주요한 시설이 있거나 장터처럼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그런 폭격이 자행됐다. 피난민 무리를 대상으로도 있었다. 피난은 보통 무리 지어 가니까.

피난민을 대상으로 한 미군의 학살 사건으로는 '노근리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노근리 사건도 여성학살 비율이 높다. 피난민들이 쌍굴다리에 숨어있는데 미군이 2박3일 총을 난사했다. 쌍굴다리 밑에 숨은 피난민 중에서도 여성과 아이들은 남고 남성들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밤에 피신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여성 희생자가 많은 것은 그런 가부장적 이유도 작용했다.

겨울에는 1951년 1·4후퇴가 일어나고 그해 초쯤 인민군이 중부 전선에서 내려온다. 1월에 그 중간지역 폭격이 많았다. 소백산 인근의 지역 전체, 단양·김천 쪽의 피해가 컸다. 여기에서도 여성 민간인 학살 비율이 높다.

프레시안 : 민간인은 죽일 수 없게 돼 있지 않나. 제네바협약이 그때도 있었을 텐데.

김상숙 : 그때도 제네바협약은 있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 이승만 정권도 피난민 대책이 제대로 없었다. 정부가 가장 먼저 부산으로 도망가버렸다. 나머지 지역을 인민군이 빠르게 점령했다. 점령지에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 노인, 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은 피난이 어려워 집에 남아있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 희생자들은 가족이 함께 학살됐다.

김상숙 교수의 인터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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