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신생 단체가 꾸린 기자회견에 이렇게 많은 관심이 쏠린 적이 있었을까?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우리는 이대남이 아닙니까'라는 주제로 열린 기자회견에는 수 십 명의 기자들이 몰렸다. 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면으로 준비된 보도자료가 동이 나 주최 측은 '보도자료는 파일로 보내드리겠다'는 손팻말을 들고 안내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의 '성황'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는데 회견 며칠 전부터 수 많은 '기자회견 예고 기사'가 나가며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단체는 회견 수 일 전에야 비로소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라는 단체명을 정했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기자들은 주최자 명도 기재되지 않은 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퍼진 '기자회견 참여자를 모은다'는 링크만을 보고도 연락할 방법을 수소문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1월 초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이가현 씨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페미니스트 이대남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그야말로 '이곳 저곳에서' 개별적으로 모였다고 한다. 지금은 17명이 활동 중이다. 기자회견을 공고한 뒤 2월4일~8일 사이에 375명이 연대서명에 동참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청년 남성인 우리가 겪는 문제의 원인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여성가족부를 없앤다고 내가 겪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와 언론이 펼치고 있는 성별과 세대 갈라치기는 그 어떤 세대와 성별의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며 '이대남'을 안티페미니스트로 단일화 해 호명하는 정치와 언론을 비판했다.
이들은 언론의 관심에 대해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고 자평하면서도 "한편으로 분하다"고 말한다. <프레시안>은 "'이대남' 프레임을 깨기 위해 모였지만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대남' 명명을 일단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씁쓸하다"는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의 고선도(24·회사원·이하 고), 김연웅(27·활동가·이하 김), 변현준(21·대학생·이하 변), 정재현(26·대학생·이하 정)씨를 9일 기자회견 직후 광화문 인근의 한 모임 공간에서 만났다.
아래 이들과의 인터뷰 내용.
"두려웠다, 하지만 너희가 우리를 불러냈다"
프레시안 : 기자회견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회견장에 기자도 많았고 기자회견 전에도 이례적으로 많은 기사가 나갔다. 소감이 궁금하다.
김 : 사실 조금 분하기도 하다. 이전까지 여성발 화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이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위시한 정치권에서 '이대남'을 호명한 이후에 '이대남', 20대 남성이 차별주의자라는 대표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이대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은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성별 간) '대결 구도' 자체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변 : 내부에서 회견을 준비하며 '이대남'이라는 '판'으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들어간 이유는 그래야 언론이 우리를 비춰주기라도 할 것 같아서다. (언론에 많이 인용돼서) 목표는 달성했는데 한편으로 '대결 구도' 안으로 들어가야 주목을 받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다.
프레시안 : 이번 회견에서 언론의 관심이 '대결 구도' 자체에 집중돼 있다고 느낀 건가.
변 : 그렇지는 않다. 어떤 기자들은 자극적으로 쓰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많은 기자들이 그렇지 않았다. '응원한다, 비슷한 생각이다, 반가웠다, 제대로 다뤄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근본적으로는 '이대남' 프레임이 잘못됐다, 남성이라고 무조건 성차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많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김 : 회견 전에 페미니즘이라는 의제에 대해 남성의 발화보다 여성의 발화가 더 주목 받아야 된다는 고민과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 이미 많은 공격을 당했고 또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남 현상'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사회 분위기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용인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한 마디로 '너희가 우리를 불러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발화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단체명을 굳이 '보통 남자'라고 정한 것에서도 논쟁이 있었을 것 같다. 기자회견에서 김연웅씨는 한부모 가족 경험을 이야기하며 '정상가족' 개념, '정상성'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나.
김 : 지금 정치와 언론이 '성차별을 하는 남자가 보통 남자'라는 메시지를 계속 내고 있다. 그것에 대한 대응의 의미를 담았다. '성평등한 사회를 지지하는 남자가 보통 남자'라는 의미다. 언론이나 정치권에 언급되지 않지만 성평등을 지지하는 남성들이 존재한다. 그 모두가 '이대남'이다. '이대남'이라는 집단 안에 수많은 다른 결의 사람이 존재하는데 한 데 합쳐 '이대남'이라고 묶는 것은 폭력적이다.
"남초에서 성차별은 '게임', 이준석은 그 게임에서 유능한 선수가 되고자 한다"
프레시안 : 기자회견에서 남성들의 '조롱 문화'가 언급됐는데 그것이 현재 성평등 및 페미니즘이 공격 받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을 부탁한다.
김 : 남성들 사이엔 풍자, '밈', '드립' 등으로 나타나는 조롱문화가 있다. 그 중 일부, 예를 들어 남초 커뮤니티 같은 곳은 극단적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짓밟는 방식의 조롱문화가 나타나는 곳이다.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것도 조롱 문화의 한 양태다.
고 : 놀림거리를 잡아서 놀리는 게 남초 커뮤니티의 문화다. 페미니즘도 그 소재 중 하나다. 페미니즘에 대해 개선책을 제시하거나 더 나은 논의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니라 그저 꼬투리를 잡고 때린다.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것을 일종의 게임이나 스포츠로 삼는 것이다.
김 : 구조적 문제인 성차별을 스포츠 경기하듯 '대결 구도'로 환원하는 거다. 남성들이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할 사회적 문제를 마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대 페미니즘 대표의 경기에서 이번엔 누가 이겼더라'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준석 대표는 이런 '대결 문화' 그리고 '패자를 조롱하는 문화' 속에서 본인이 이 대결에서 '가장 유능한 선수, 가장 잘 싸우는 선수'로 여겨지기를 바라며 '이대남' 프레임을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의 '복어 요리' 발언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꼈다. 결국 '내가 제일 잘 하는 선수'라는 것을 어필한 것이다. 여성차별 현실을 하나의 대결, 게임으로 가져가려 하고 그를 통해 정치적 세력화를 꾀하는 모습이다. 그로 인해 이준석 대표는 이득을 보지만, 성차별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져 버렸다. 정치권과 언론이 성차별을 대결 구도로 몰아가며 이 문제가 공론장에 놓일 기회를 빼앗은 거다.
정 : '게임'이라는 시각 자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대결하는 쌍방을 대등하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 '역차별' 주장이나 표현이 나오는 맥락이 일부 이 시각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이준석 대표와 소위 '이대남'으로 표상되는 이들이 말하는 '공정'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을 공정성의 게임에서 탈락한 존재로 본다.
고 :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들은, 혹은 성평등을 지지하는 이들은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룰을 깨자고 하는 존재라는 거다.
정 : 사실 그들이 숭상하는 '공정' 자체가 맥락적으로 맞지 않다. 같은 공격도 여성이 당하는 것과 남성이 당하는 것이 다르다. 예를 들어 똑같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공격을 당한다 해도 여성들은 신체적 위협까지 느낄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남성들은 아주 심할 경우에 사회적인 매장을 당하는 식이다.
김 : 사실 남초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은 현재 사회에서 커다란 줄기의 조롱 문화, 여성 혐오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서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그 흐름에 반응한다. 모든 남성이 남초 커뮤니티나, 표상되는 '이대남'처럼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들이라고 밝힌 것이 이런 식의 사고에 균열을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의 '이대남' 호출은 오히려 20대 남성을 위협한다
정치권에서 연일 '이대남'을 호명하면서 20대 남성들은 더 힘이 세지고 자유로워졌을까? 인터뷰이들은 오히려 이 호명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성차별에 동의하지도 않는 '중간 지대'의 무수한 20대 남성들에게 자유로운 사고의 기회를 빼앗고 위기감을 안겨준다고 봤다. 정치와 언론에서 20대 남성을 성차별주의 집단으로 단일하게 대상화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에 동참하지 않으면 "남성 집단에서 끝장"이라는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변 : 어떤 남성들은 이준석 대표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차별주의자를 지지한다. 하지만 꽤 많은, '중간'에 있는 남성들은 구체적인 성차별 의제나 소재를 얘기하면 이해하는 반응을 보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페미니즘 사냥'이 남성들 사이에서 '게임'이 된 상황에서 사냥 당하는 게 무서워서 굳이 발언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준석 대표를 위시한 정치권과 언론이 '이대남'은 페미니스트일 수 없다, 이들은 '안티페미니스트'다, 라는 메시지를 계속 발산하면서, '중간'에 있던 20대 남성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있었더라도 성차별 관련한 구체적 의제에는 동의하던 남성들이 계속해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가는 '끝장이다', 즉 20대 남성 사회에서 배제되고 낙오된다는 위기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내 여동생을 그 (여성 혐오가 심각한) 군대에 보내라고?' 라는 식으로라도 여성징병제가 군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남성들도 저런 메시지를 접하면서 입밖으로 이런 말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 '안티페미니스트'로 호명되고 있는 20대 남성 안에 분명히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이번 행동에 나선 것이기도 하다.
고 : 동의한다. 이대남=안티페미니스트로 몰아가는 기조가 형성되면서 성차별 관련, 페미니즘 관련 발화를 하면 나는 20대 남성 사이에서 '손절'당하겠구나,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개별 성평등 의제에 동의하던 남성들도 발화하지 못하고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한국 페미니즘은 오염됐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는 식의 왜곡된 언설이 범람하고 성차별주의적인 '이대남' 담론이 정치와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심지어 '성평등에 찬성한다면 페미니즘에 반대해야 한다'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까지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이대남' 현상이 경제적 문제? 차별에 서사 부여하지 말라"
프레시안 : '이대남'이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갖는 것에 대해 경제적 문제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지금 20대 남성들이 취업, 주거 등 여러 문제를 겪고 있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인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변 : 20대 남성들이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여성 때문은 아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여성이 더 힘들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남'의 성차별 발화를 경제적 문제로 설명하는 건 가해자에게 과한 서사를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김 : '안티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불편하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결국 '차별주의'인 거다.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지금 '안티페미니스트'라는 그럴 듯한 말을 부여 받은 사람들은 차별을 하는 사람, 차별을 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정치권에서 정말 이 현상이 경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성차별주의를 호출하지 말고 경제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오히려 '나는 성평등한 사회를 지지하고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선언해야 하는데 그 대신 페미니즘에 대한 발화 자체를 꺼리고 논의의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정치권 전체가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프레시안 : 정치인들이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얼마 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김 : 윤석열 후보처럼 큰 정당의 대선 후보가 구조적인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많은 절차가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정리하는 절차, 입 밖으로 발화되는 절차, 캠프에서 논의하는 절차 등. 우리 사회가 성평등한 사회였다면 그 절차 중 어딘가에서 제지를 받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이 나왔을 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한다거나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발언이 그대로 나온다는 것은 그런 제지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성차별적 환경이라는 것, 구조적인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로 곡해하는 시선, 혹은 성차별을 '남녀 대결'로 보는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비중심성, 소수자성을 발견하는 순간 페미니즘이 자연스레 다가왔다고 말한다.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니 페미니즘에 도달하게 된 경우도 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인식하게 된 경로는 여러 가지지만, 그리고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을 구성하는 이들도 단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뿐 아니라 모든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안전한 하한선'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김 : 나는 나를 배제하는 정치에 동의하는 게 아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며 사회에서 상정하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게 됐다. 가정에 엄마가 있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발화들에 상처 받으며 '나 자신은 차별과 배제의 언어를 쓴 적이 없을까' 하고 돌아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만나게 됐다. 나는 페미니즘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별에 반대하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지한다.
고 : 나는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고졸 노동자다. 고졸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 운이 좋아서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를 비롯해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차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적으로 내가 노동시장에서 소수자이고 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다른 소수자 이슈를 통해 페미니즘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게 된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이익만을 위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기 때문이었다.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은 모든 소수자에게 '안전한 하한선'을 만들어주려 한다. 차별의 하한선을 올렸으면 하는 희망으로 페미니즘 운동에 임하고 있다.
변 : 나는 경우가 다르다. 나는 촛불시위 등을 보며 중고등학생 때부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권·기후·노동 등 사회적 의제 전반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페미니즘은 그 중 하나의 의제였다. 문제를 체감해서라기보다는 '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 그리고 승리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임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 여성 후배와 대화를 하게 됐다. 교내에서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를 하던 후배였는데, 그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 내가 자습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쟤는 메갈, 페미야, 상종하지 마' 하고 지나갔다"고 말했다. '나 오늘 점심에 빵 먹었어' 정도의 일상적인 말투였다. 나라면 크게 화를 냈을 텐데 그저 담담한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여자들은 그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면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승리에 대한 확신' 같은 태도가 남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페미니즘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다.
정 : 대학에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게 됐다. 군대에서 여성 혐오적이나 소수자 혐오적인 발화가 농담처럼 오가는 것을 목도한 것도 한 몫 했다. 외국생활 경험이 있는데 이때 인종차별 피해를 당했다. 가해자들은 동양인의 외모, 한국의 문화 등을 소재로 수많은 차별 발언을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친해지고 싶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 말을 흘려 듣거나 방어적으로 받아치는 등의 전략을 사용했지만, 학교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나는 바꿀 수 없는 출신 때문에 '특이한 녀석'이었고 항상 평가의 대상이 됐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 : 인종차별을 포함해서 누군가가 약자일 수 있는 것을 망각하고 해로운 발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발화자는 그것이 차별적이고 배제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데 그 점을 조망하고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엔 연대의 힘이 있다.
정 :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 배제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이유다. 장애인 이동권 운동 덕분에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설치됐다. 이 시설을 장애인 뿐 아니라 노약자를 포함한 비장애인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덕에 사회 전반의 인프라가 나아지면 다수도 이득을 본다. 이 의제를 이끌고 나가고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김 : 결국 페미니즘은 남성에게도 이득이라는 뜻이다.
"차별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목소리 냈으면 한다"
이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다. 주변 남성들에게 배척 당하기도 하고 다른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동료를 만나더라도 페미니스트로 자처한 남성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밝혀지는 등의 사례를 목도하며 서로 "어쩔 수 없이 의심하게 된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 지금껏 남성으로서 살아 온 삶에 대한 "속죄" 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페미니스트에 남성과 여성, 퀴어 등의 구분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앞에 나서서 발언할 때는 "여성의 마이크를 여기서도 빼앗는 것이 아닐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탈진"하는 사례도 많이 봤다고 한다. 동료를 만나지 못하고 지금껏 혼자 활동해 왔다는 이들은 이번 활동이 "감동적"이었다며 "성평등을 지지하는 남성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고 했다.
변 : 페미니즘 운동을 제대로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남성 친구들과 제대로 적대하기 시작했다. 남성 친구들이 방금 전까지 같이 밥 먹던 여성 친구에 대해 성적인 품평을 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존 남성 집단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고 있었지만 고민은 있었다. '정말 남자는 가능성이 없는 존재일까? 그러면 나는?' 그러다 이 단체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남성 페미니스트를 만날 기회라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
김 : 모였을 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의심하고 경계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비롯해 페미니스트로 자처했던 남성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의심을 풀지 못하다가 이번 활동에 참여한 이들이 정말로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로 연대하는 것을 봤을 때 감동을 받았다. 그 자체로 큰 위안이 됐다.
정 :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집단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지 않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다가 탈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데 강한 매력을 느꼈다.
고 : 성평등을 지향하는 남성들이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온라인상에서 이미 심각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고 오프라인 집회 때도 차별주의자들이 몰려와서 위협한다. 더 이상 나만 '안전한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다른 '샤이'하게 계신 분들도 목소리를 내 줬으면 한다. 또 여성가족부 해체나 여경을 없애라는 주장, 여성징병제 등의 주장이 모두 이뤄진다 해도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단지 일부 남성의 기분이 나아질 뿐이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발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정 : 우리는 특이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를 대표하고 있지도 않고 특정 세력을 겨냥하고 있지도 않다. 기자회견에서 한 이야기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차별에 저항하고 차별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로 생각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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