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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의 거울? 유리창!

[프레시안 books]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일본의 굴레>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더 분명해지는 생각이 있다. 내가 연극의 출연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술집에 들어간다. 일단 입구에 서서 보디랭귀지로 방문 인원을 알려준다. 점원이 정해진 대사를 뱉고 일행을 자리로 안내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점원이 다시 정해진 대사를 읊는다. 나는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잉글리시 메뉴 플리즈" 정도의 대사를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말한다. 점원이 알아듣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점원은 그 상황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대사를 건네고 나를 애타게 쳐다본다. '바카야로! 이제 당신 대사가 나와야 할 차례라고. 뭣 하는 거야?'

일상에도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순서가 있고, 정해진 행동이 있다. 외출 후 집에 들어올 땐, 아무도 없는 집이라도 반드시 "타다이마(ただいま)."라고 한다.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손을 모으고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라고 한다. 면은 반드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끊지 않고 한 번에 먹어야 한다. 매년 2월 3일 절분(세츠분, 節分)에는 신사에 들러 액막이를 하고, "귀신은 물러가고 복은 들어오라"고 외치는 마메마키(豆撒き)를 한다. 초등학생은 반드시 란도셀을 매야 하고, 남성 직장인은 서류가방을 든 통일된 복식코드를 갖춰야만 한다.

비단 일본에 살지 않는 이라도, 만화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경험한, 변하지 않는 일상의 풍경이다. 한국에도 가족이 모여 김장하는 풍경과 같은 전형이 있지만, 일본처럼 그 풍경이 정형화하고, 광범위하며, 일상적인 데다, 이를 지키는 이들의 연령과 성별에 차이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너무나 우리와 닮아서 익숙하다가도 어느 순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상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일본이다.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한민 지음, 부키)에서 문화심리학자인 저자는 한국이라는 거울을 통해 일본을 조명한다. '한국인은 삶에 지치면 산으로 들어가고, 일본인은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으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한국과 일본을 일대일로 대칭해 비교하고, 이 다름이 어디에 연원하는가를 책은 알기 쉽게 설명한다. 책은 두 나라 문화의 차이가 두 나라 사람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행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한다. 책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동일선에 놓고 비교하지만, 아무래도 가깝지만 (특히 요즘 들어 더) 소원한 이웃인 일본인의 심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일본인들은 갓난아기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승차하는 일은 일본 민영 철도 협회가 발표하는 지하철 민폐 행위 중 7위에 해당합니다. 쓰레기 투기나 음주 승차보다 순위가 높을 정도죠. (…) 심리학자 기타오리 미쓰다카는 일본인들은 유모차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타인의 사적 영역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한다고 분석합니다."

이 대목을 읽자 몇 년 전 오사카(大阪) 국제공항에 도착해 도심으로 들어가던 열차에서 경험한 섬뜩한 광경이 되새겨졌다. 한 부부가 갓난아이와 함께 열차에 탔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순간, 그 차량 내 상당수의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시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던 긴장감의 원인을 책은 이처럼 쉽게 요약했다. 민폐(메이와쿠, 迷惑)나 은혜(온, 恩) 등 일본인을 대표하는 이미지나 일상적인 일본어인 '스미마센(すみませ)' '아리가토(ありがとう)' 등의 단어가 우리 생각 이상으로 엄격한 상호 간 의례와 형식미를 갖췄음을 알려면, 다시 말해 일본 문화의 뿌리를 더 깊이 알려면 이 분야 고전인 <국화와 칼>을 필요로 해야겠으나, 일본 이해하기의 시작은 <선을~>을 통함이 부담 없을 것이다.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한민 지음) ⓒ부키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할 서적 역시 시간에 맞춰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불황이 일상이 된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서로서 4쇄를 찍는 기염을 토한 <일본의 굴레>(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박경환 옮김, 글항아리)는 일본에 관해 가장 최근에 소개된 새로운 고전일 것이다. 일본에서 장기간 거주한 지은이는 600여 페이지에 걸쳐 일본의 역사부터 문화와 경제, 정치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일본의 모든 것을 다이제스트하고, 과거의 굴레가 오늘의 일본에 어떻게 얽혔는가를 흥미롭게 서술했다.

현대 일본의 뿌리라 할 만한 헤이안 시대-센고쿠 시대-에도 시대-메이지 유신과 2차 세계대전의 패전까지 역사를 저자는 가능한 가장 짧게, 약 160여 페이지를 들여 요약한 후 본격적으로 현대 일본의 빛과 그늘을 조망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일본 현대사의 한 장면을 책을 통해, 아마도 우리는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재조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특히 민감한 역사적 얽힘이 있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출발과정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이렇다.

"군사정부가 직접 통치했던 전후 독일과는 달리 일본의 미군정은 기존 정부 조직을 통해 '간접' 통치를 했다. 이는 항복 이전의 일본 정치체제에서도 가장 비민주적이었던 두 가지 제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다름 아닌 관료제와 천황제다. (…) 미군정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정치적 정통성의 상징인 천황을 메이지 지도자들이 어떻게 근대 국가주의의 신화로 탈바꿈시켰는가 하는 미묘한 부분까지는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던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히로히토를 천황 자리에 그대로 두도록 했을 뿐 아니라, 과거 수십 년간 벌어진 일에서 천황이 했던 역할에 대한 모든 논의를 검열하려고 했다. 이런 조치는 일본 대중에게 심각한 인지 부조화를 가져왔다. (…) GHQ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하고 잘못의 재발을 막기 위해 과거의 비극을 다시 들여다보기보다는, 과거를 묻어두고 가라고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독일은 젊은 세대가 성인이 되어 강하게 요구해 마침내 과거를 받아들였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토론하고 얘기하는 것 자체를 GHQ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 그 큰 이유다."

과거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출발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 일본은 다른 한편 전근대의 굴레에도 얽매여 형식상의 민주 국가 시대를 열었다. 이는 책의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에서 '남편이 종신 고용된 회사에서 종일 근무하고 아내는 집에 갇혀 남편을 보좌하는' 바로 그 모델이 어떻게 일본의 고속 성장을 뒷받침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체되어갔는지를 보며 확인 가능하다. 주식회사 일본이 해체되자, 이 모델도 변화를 맞았다.

"일본의 회사들과 관료 기구는 급여 체계와 고용 관행을 시대에 맞게 바꾸는 데 실패했다. 1955년에 형성된 급여 체계와 고용 관행은 당시 일본의 인구와 경제 상황에는 잘 맞았는지 몰라도, 1975년에는 적용에 무리가 있었고, 1995년이 되면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졌다. 집권층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던 사회적 합의를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재검토한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문제들만 건드렸다. '종신고용' 대상자를 적게 채용한다든지, 예전 같으면 신입사원들이 담당하던 일을 훨씬 낮은 보수를 주고 계약직에게 맡긴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 1975년이 되면 일본의 출산율은 1940년대의 여성 한 명당 네 명에서, 총 인구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숫자인 두 명 아래로 떨어졌다. 2005년에는 기록적으로 낮은 1.26명을 기록했다."

책은 일본인의 일상사에서부터 일본 정치 체계, 일본 경제의 흥망성쇠를 모두 훑는다. 단순한 다이제스트가 아니라, 저자의 통찰과 견해가 깊이 책 전면에 새겨져 있다. 특히 일본 외교 문제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필연적으로 한국이 얽혀 소개되기도 한다. 일부 대목은 한국 독자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하지만 책에서 저자는 일본과 미국에 관해서도 책에서 한 걸음 떨어져 최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함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1930년대 과거사의 진정한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도 맞지만, 한국 권력층의 많은 사람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일본군이 한국의 모든 젊은 여성에게 위협이 되었던 성노예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경우 중개업자들은 한국인이었다. (…) 그 사업은 식민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이 아직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일본 남성에게 한국이라는 말은 섹스 관광과 동의어일 정도로 지저분한 농담의 대상이었다. 일정 나이대 이상의 일본 남성들은 모두 '기생집'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안다. 한국 여성을 착취한 데 대해 한국 정부가 이제 와서 일본으로부터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많은 일본인에게 있어 마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르노 대위가 도박을 금지시키면서 자기가 딴 돈은 따로 챙기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일본을 향한 깊은 애정과, 또한 최근 과거의 굴레에 얽혀 장기간 침체의 늪에서 새로운 동앗줄로 우경화를 택한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식견은 현재 한국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시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특히나 한국인의 일본을 향한 격한 감정을 고려한 듯, 한국어판 후기에서 특별히 한국 독자에게 당부의 말을 건넨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의 나라가 얼마만큼 악해질 수 있는가를 직시하지 못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이 현실"인 데다 "견디기 힘든 사실을 '회피'해버리는 방식에는 일본인만의 특유의 무언가가 있"는데 이는 "일본 문화가 가진 특징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한국 독자도 이해해야 한다고 말이다. 예컨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낭만적 피해자주의와 체념의 정서가 어디에서 연원했는지도 우리가 유념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의 제목이 지정하듯, 현대 일본은 과거사와 주어진 민주주의라는 현대사, 그리고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경제 현상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많은 한국인은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중진국형 함정이라는 '선을 넘어 버리고'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현재와 일본의 오늘을 비교하며 어쩌면 고소해할 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가 지적하듯, 오늘날 일본은 '일본화(Japanification, 통화 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현상, 초장기 제로금리가 유지된 일본 상황으로 세계 각국이 점차 이행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본의 장기침체는 점차 초국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의 늪에서 탈출할 길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 고소해하고 말아도 될까. 지금이 일본의 정점(Peak,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탁월한 관련 서적인 <피크 재팬>이 있다.)이라면, 지금은 한국의 정점이기도 하지 않을까. 과연 한국이 더 성장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재앙적이라는 일본의 출산율은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2020년 한국의 출산율이 0.84로 떨어졌지만 일본의 출산율은 1.34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출산율을 높일 어떤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많은 전문가들이 적극적인 이민 정책, 여성 인권 신장 정책을 출산율 제고의 해법으로 꼽는다. 단언컨대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종신 고용이 무너지고 블랙기업이 창궐하는 일본의 노동 환경을 가장 빠른 격차사회화를 통해, 그래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노동자를 죽여 가며 외환위기의 늪을 벗어난 한국이 비웃는다는 건 제법 객쩍다. 일본의 여성인권 수준을 논하려면 한국의 여성인권 현주소도 함께 논하는 것이 올바를 터이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크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선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도 책에서 숱하게 강조하듯, 모든 일본인이 '선을 긋고' 사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당장 '오사카 사람=부산 사람'이라는 식의 가벼운 비교는 웬만한 한국인도 안다. 궁금한 건, '일본화'가 비단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라면, 빠른 속도로 일본화하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선을 넘던' 과거를 버리고 선 긋기에 몰두하고 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청춘은 부모 세대 한국인과 더 가까울까, 아니면 동년배 일본인과 더 가까울까. 오늘날 한국 지하철에서 아이가 계속 울어댄다면, 과거 어른들처럼 그 아이를 인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을까, 그 아이의 '민폐'에 화를 내는 한국인이 많을까. 사토리세대 바람은 한국에도 곧바로 불었다. 지방소멸이 일본에서 의제화하자 곧바로 한국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고성장시기 대체로 한국에서 통하던 말이 '20년 격차'였다. 한국이 일본을 20년의 시간을 두고 그대로 따라간다는 설이다. 정점 이후 한일 시간 격차가 극적으로 좁혀젔다는 감각이 비단 필자만의 것일까. 한국이 일본을 비추는 거울이듯, 한국은 또한 오늘의 일본을 보여주는 유리창이기도 하지 않을까.

▲<일본의 굴레>(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박경환 옮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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