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번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상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명분을 찾았다고 해도 최소한 갖춰야 할 것이 있다. 조율된 사전 합의이다. 측량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공통된 의견의 분포도를 미리 살펴야 하는 것은 도리이다. 그래야 내세운 명분이 구차한 핑계로 퇴색되지 않는다.
경남교육감 박종훈. 그는 4년 전 재선에 성공한 다음날 공식 기자회견 자리에서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경남 교육의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앞으로의 임기에 다 쏟을 것이고, 이후에는 정치의 언저리에도 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 약속은 어떻게 됐을까. 약속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그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을 뒤집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니라는 단서를 첨병으로, 경남 교육의 미래를 위해 또 한 번 기회를 달라는 데 화력을 집중하며 읍소했다. 그래야만 되는 것처럼 호소했다. 명분은 있다. 그럴싸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의중과 성취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건 여론이 돼 버렸다.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가 지난 3일 발표한 ‘2022 대선 및 지방선거 여론조사(경남)’ 결과가 그것이다.
박종훈 경남교육감은 이 설문조사에서 21.1%의 후보 적합도 응답률을 보였다. 반면 보수진영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김상권 학교바로세우기운동본부 상임대표는 2.7%에 그치며 확연한 격차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허기도 전 산청군수가 2.6%, 김명용 창원대 교수가 2.4%, 최해범 창원대 교수가 2.0%, 진영민 경남교육청 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이 1.9%로 나타나 보수진영 후보군에 대한 평가 결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적합한 후보가 없다’는 응답률이 39.8%에 달하고 ‘모름/무응답’도 24.5%여서 마땅한 후보를 마음에 두고 있지 못한 비율이 64.3%에 달한다는 점이다.
KBS창원이 의뢰한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해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무선전화면접 방식으로 경남 거주 만 18세 이상 4만720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1610명이 응답을 완료해 17.1% 응답률과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는 ±2.4%p이다.
박종훈 경남교육감의 신년기자간담회는 이 발표가 있은 이틀 뒤인 지난 5일 열렸다. 내용은 2022년 경남교육의 방향성이었지만, 오는 6월 1일 치러지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140여일 앞둔 시점에서 3선 출마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2021년에 이뤄낸 경남교육 대전환의 성과를 바탕으로 2022년에 미래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했다. 디딤돌을 놓았으니 새로워진 결과물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키워드는 ‘새롭다’이다.
구체적인 방향성과 목표도 제시했다. 2021년에 경남의 모든 학교에 보급한 ‘빅데이터-AI 플랫폼, 아이톡톡’을 보다 확대해 제공하는 학습 문항을 3만개에서 30만개로 늘리고, 관련 교육 콘텐츠도 1만5000개에서 3만개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논란이 됐던 학생용 스마트 단말기 보급도 차질 없이 진행한다는 방침과 초등학교 1학년 학급당 정원을 27명에서 23명으로 대폭 감축하겠다는 정책도 발표했다. 돌봄교실 운영도 오후 7시까지 연장하고 거점통합돌봄센터 ‘늘봄’도 추가로 개관하겠다고 했다.
올해 말에는 의령에 미래교육테마파크가 준공되고, 밀양에 경남진로교육원을 마련하기 위해 설계 공모와 콘텐츠 개발도 추진될 예정이다. 2025년 전면 시행을 앞둔 고교학점제도를 위해 지원 플랫폼을 구축하고 일반 고등학교의 80%를 연구학교와 선도학교로 지정해 고교학점제 운영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생태전환교육 중심의 환경교육특구도 모두 11개 기초자치단체로 늘려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박종훈 교육감은 “올해 다시 한 번 미래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며 “지켜봐 달라,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경남의 미래교육을 시작한 책임자로서 완성하고 싶은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선 도전을 해야겠다는 명분이다.
나름 겸손함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뭇 다르게 “미래교육 구축을 위한 리더십을 완벽하게 해야 하는 것이 경남의 미래교육을 시작한 사람으로서의 책무”라고도 했다.
3선 교육감 도전이 장기 집권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16년 동안 국가교육의 수장을 맡았던 핀란드 국가교육청장의 사례까지 언급하며 교육을 위해서는 그런 정도의 비난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렇게 일단 명분은 제시됐다. 교육정책의 연계성과 지속성, 완결성을 담보로 한 결자해지. 내가 시작했다. 여기에서 끝낼 건가?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다. 하고 싶다. 계속 맡겨 주고 믿어 달라. 자신 있다. 약속한다. 보여줄게. 이런 것들. 조금 미안하고 겸연쩍기는 할 수도 있겠지만 설득하고 동의를 얻기 위한 나름의 전략은 마련된 셈이다.
그럼에도 이런 명분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건 ‘교육자’와 ‘약속’의 교차점 때문이다. 경남교육의 수장이 “그땐 그때이고, 지금은 달라”라고 한다면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도 교육공동체 다수의 공감과 동의를 얻기는 힘들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현재 경남교육감님은 왜 약속을 어기고 다시 선거에 나오신다고 하시는 거죠?”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게다가 선거 연령이 낮아져 학생 유권자 층도 있지 않은가.
교육은 한 국가 또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미래를 향한 도구이고 과정이다. 순수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그것을 보장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약속과 신뢰이다. 따라서 정파적 정치 개입이나 사적 이해관계는 철저하게 배제돼야 한다. 약속은 이행돼야 하고, 구축된 신뢰를 깨뜨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징검다리를 놓고 먼저 건너보는 선의, 다음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고 안정적으로 돌을 더 놓을 수 있게 도와주려는 배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된다면, 스스로 만들어낸 명분이 아니라 모두가 ‘당신이 또 필요해’라고 만들어주는 명분이라면 더없이 좋지 않을까.
박종훈 경남교육감의 3선 출마 재확인과 공식화가 염려되고 못내 아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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