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후정책 문서를 제법 오랫동안 읽고 분석해왔다. 특히 한국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자 했다. 정책 문서에 담긴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 국가별 배출 순위, 부문별 혹은 지역별 배출량, 국내총생산(GDP)당 혹은 일인당 배출량 등의 추세와 전망을 추적해왔고, 필요할 경우에는 원 데이터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따라가면서 분석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다. 정부 정책문서는 누가 얼마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지, 사회계층적 불평등과 책임이 어떠한지에 대한 분석을 한 번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누가 먼저 그리고 얼마나 감축해야 하는지도 다루지 않는다. 분석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고칠 수 없다.
많은 기후운동 활동가와 언론들은 이미 공개된 기업별 온실가스 배출량 현황을 분석하여, 20대 기업이 우리나라 배출량의 57.4%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 문서에 이런 분석은 결코 실리지 않는다. 대신 정부 문서는 '전환(발전)'과 '산업' 부문로 뭉뚱그려 각각 37%와 35.8%의 배출량 비중을 가진다고만 밝히고 있다. 그 부문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대부분은 소수의 기업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그 기업들에 온실가스를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줄이라고 규제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기업 이름들을 강조한다: 철강(포스코 1위, 현대제철 7위), 발전(남동발전 2위, 동서발전 3위, 중부발전 4위, 서부발전 5위, 남부발전 6위, GS동해전력 15위, 포스코에너지 18위), 전자(삼성전자 8위), 시멘트(쌍용양회 9위, 삼표시멘트 16위), 석유화학(S-Oil 10위, 엘지화학 11위, 지에스칼텍스 12위, 현대오일뱅크 13위, SK에너지 14위, 롯데케미칼 17위, 한화토탈, 20회), 지역난방(한국지역난방공사 19위).
정부 문서에 실리지 않는 것이 기업의 책임에 대한 분석만은 아니다.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소득 계층에 따라서 온실가스 배출량에 극심한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분석해왔다. 예를 들어 옥스팜과 같은 국제 비정부기구(NGO)는 2020년 <Confronting Carbon Inequality>라는 보고서에서 1990-2015년 사이 전지구적 소득계층별 누적 배출량의 불평등 정도를 정리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1%의 사람들이 배출한 온실가스량은 전체의 15%에 달했고, 상위 10%의 비중은 52%이었다. 그에 반해서 지구상 인구의 50%인 가난한 이들의 배출량 비중은 단지 7%에 불과했다. 전지구적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53%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에게는 8% 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탄소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의 양상이 정확히 겹쳐진다. 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는 가운데, 온실가스도 엄청나게 배출하고 있다.
이런 탄소불평등 양상은 국가 수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세계불평등연구실(World Inequality Lab)이 최근(2021)에 내놓은 보고서(Climate change & the global inequality of carbon emission, 1990-2020)는 흥미롭다. 사적인 소비, 정부 지출, 그리고 개인 투자에 의해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에서 각국의 부유한 계층의 일인당 배출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의 가난한 절반이 배출하는 양은 1990년 이래 감소해왔다. 그 영향으로 미국,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소득 하위 50%의 현재 일인당 배출량은 각국이 국제사회에 공약한 2030년 감축목표에 따른 일인당 배출량보다 낮거나 거의 근접해 있다. 가난한 이들은 더 줄일 이유도 여력도 없는 셈이다. 보고서는 각국의 감축 정책이 초점을 맞춰야 할 대상은 부유한 인구 50%, 특히 상위 10%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온실가스 감축은 가난한 계층이 아니라 부유한 계층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번역되어 출판된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창작과비평, 2021)는 탄소 불평등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높은 소득, 그리고 더 많은 소비는 더 많은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분석은 운동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히켈은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와 그 소비의 높은 에너지 집약도, 그리고 그 소비 지출 이후에도 남은 소득을 이용한 투자 활동이 가져오는 생태적 파괴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이는 우리를 단순하지만 급진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최상위 부유층의 소득을 줄이는 모든 정책은 긍정적인 생태적 효용을 가질 것"(247쪽)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불평등 전문가', 토마스 피케티도 "최상위 부유층의 급격한 구매력 감소는 결국 그 자체로서 세계적인 수준의 배출 감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247쪽: 재인용)고 분석한다.
한국 정부의 기후정책 문서에서 소득계층별 온실가스 배출의 불평등을 분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면, 국내에서 그와 관련된 분석을 진행하고 있는 연구기관 혹은 연구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우선 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까지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과거 불편한 진실이었던 기후변화는 요즘 잘 팔리는 아이템이 되었고, 이제 탄소불평등이 새로운 불편한 진실이다. 누가 불편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불편한 진실은 위험할 수 있다. 정부 관료, 정치인, 심지어 그것을 분석한 연구자에게도 그렇다. 반대로 기후정의운동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정보다.
최근 동료 연구자 및 활동가들과 함께 <기후정의선언 2021>(한티재, 2021)이라는 팜플렛을 발간하였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기후정의에 대한 관심도 점증하지만, 과연 기후정의가 무엇인지 오해와 혼란도 가중되고 있다. 기후정의는 단순히 사회적 취약계층을 더 배려하고, 보호하고 지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밝히는 이야기다. 이 팜플렛에서 가장 의미있는 문장을 하나를 뽑으라면 다음의 문장일 수 있다.
이 문장으로 기후정의운동이 추구하는 광범위한 '기후정의동맹'의 가능성은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 더욱 커졌다고 생각한다. 과거 한국의 기후정의운동은 기후위기의 원인을 인류 전체에게 돌리는 주류적인 설명에 크게 도전하지 않는 대신, 그 영향이 차별적이고 불평등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강조하면서 주류적 기후정책과 차별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기후정의의 과제는 일부 취약계층 보호와 지원의 문제로 정책·제도적으로 번역되기 쉬웠다. 또한 현재 불평등에 직면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자신들에게 가중되는 또 하나의 불운으로만 간주될 뿐, 그에 맞서 싸워야 할 의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 탓에 기후정의운동은 환경운동의 좀 더 급진적 확장판에 머무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원인으로서 불평등이 선언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여러 운동들의 승리가 바로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운동의 전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정의운동은 새로운 관점에서 폭넓게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번 대선이 기후위기를 위한 정치적 계기가 되어야 한다면,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겠다는 등의 정책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정책이 어떻게 기후위기 해결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주4일 노동시간 단축이 기후정책"이라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공약을 주목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더 많은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다.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위해 싸우자! 그것이 지구'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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