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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서울대 중문과 초대(初代) 교수, 이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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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서울대 중문과 초대(初代) 교수, 이명선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해방과 전쟁으로 인해 없어진 기억

1946년 5월 5일,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 이명선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중국현대단편소설선집>(선문사, 1946)의 서문을 마무리지었다. 1915년생인 이명선은 해방 직후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사회운동과 학계 양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해방기 최대의 문학자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고전문학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중국문학 작품의 번역, 그리고 한국문학과 관련된 동시대 중국문단의 사례들을 한국학계에 다수 소개했다.

그런 그가 오늘날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누명'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요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식민지시기 친일파는 대체적으로 우파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 그리고 북한이 해방 직후 남한에 비해 강도 높은 친일청산을 수행한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두 가지 각기 다른 맥락의 요소를 묶어서 배치하는 데에는, 과거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이분법과 배제의 '타자화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도교수라는 원죄?

1926년, 한반도 최초의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졌다. 이 위치는 오늘날 마로니에 공원 일원에 해당한다. 경성제국대학의 시설은 해방 후 고스란히 서울대학교로 승계됏다.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대학본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됐다. 유일하게 남은 대학본부 건물은 오늘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해방 후 한국에서 대개는 사회의 엘리트들로 건국과 이후의 국정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제헌헌법을 기초(起草)한 유진오(兪鎭午, 1906-1987)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명선의 경우는 중문과 출신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성제국대학 중문과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1903-1967)와의 긴밀한 관계가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가라시마 다케시는 식민지시기 일본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한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는 <친일문학론>(1966)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일본인으로, 일본의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에 나갈 것을 강요하는 연설을 하여 "악질 중의 악질"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라시마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는 좌파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중국문학 연구자로서 중국현대문학, 특히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일본과 조선에 소개하였다.

일본학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잡지인 <시분>(斯文)에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소개글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당시에 가라시마가 '젊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려는 좌파지만 본심은 파쇼'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선은 학부 졸업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가라시마의 조수로 활동했다. 중문과 교수가 한명 뿐이었으므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명선이 대학원을 졸업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41년경에는 휘문중학교에서 강의를 했었던 것이 확인되어,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별도의 학위논문을 준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명선의 연구 관심분야가 경성제국대학 중문과의 커리큘럼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중국문학 인식의 수립

경성제국대학 중국문학과 커리큘럼의 특징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중국 속문학(俗文學)에 대한 강조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문학론은 시문(詩文)을 중요시하고, 소설이나 희곡 같은 대중문학 장르를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대중문학 장르를 문학연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 도쿄제국대학 중문과의 연구경향이었고, 경성제국대학에 부임한 가라시마 다케시가 훈련 받아 온 환경이기도 했다.

둘째, 중국현대문학에 대한 관심이다. 당시 일본의 학계에서 중국현대문학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경성제국대학의 강좌가 거의 유일했다. 이명선이 중국현대문학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뿐만 아니라, 같은 과 선배 김태준(金台俊, 1905-1949)도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로 중국의 문학혁명에 주목하고 한국에 소개하는 글을 다수 쓰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중문과의 중국문학 인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루쉰에 대한 평가절하였다. 여기에는 '패션좌파' 가라시마 다케시의 영향력이 컸다. 가라시마 다케시는 자신의 스승인 시오노야 온(鹽谷溫, 1878-1962)과 루쉰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하며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라시마는 루쉰을 '지는 별'로 보고, 거장의 쓸쓸한 뒷모습을 묘사하며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이명선은 루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경성제국대학 중문과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중국유학생 출신 정래동(丁來東, 1903-1985)을 제외한다면 독자적으로 루쉰에 대한 관점을 세운 케이스는 매우 드물었다. 중국문학을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한 이육사조차 일본어 참고문헌에 기반하여 루쉰을 소개하고, 자신의 경험을 잠깐 덧붙이는 수준이었다.

이명선은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루쉰전집>(改造社, 1937)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중문과를 졸업하여 중국어 문헌들을 직접 볼 수 있던 것도 강점이었다. 그렇게 1930년대 후반 이명선은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 선배 김태준의 영향에서 벗어나 루쉰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해나가기 시작한다.

과거 신문학 운동의 영수였으나,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존재로서의 루쉰이 아닌 외세의 침탈과 국민당 정부의 무능, 그리고 곡학아세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죽을 때까지도 끝없는 전투를 이어나간 '전사로서의 루쉰'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해방기, 한국에서 중국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

1946년 5월 5일, 이명선이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서문을 마무리한 <중국현대단편소설선집>은 1920~30년대 중국문학의 주요작품 중, 당시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긴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뽑아 실었다.

대표적인 것이 예샤오쥔(葉紹鈞, 1893-1988)의 <맨발>이었다.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孫文)의 일화를 다룬 소설로, 해방기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국'의 문제, 그리고 건국에 있어서 우선시 되어야하는 것이 민생이었던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해방기 이명선의 글들은 미래의 한국문학, 그리고 해방 이후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관점에서 중국문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해방공간 좌파와 우파로 스스로를 위치지우며 벌어졌던 민족문학 논쟁에 대해, 중국의 국방문학 논쟁의 사례를 소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명선은 이념적 지향이라는 '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민족인지, 어떠한 민족문학을 만들어 나가야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또한, 민족주의 문학과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의 혼동이 가져다주는 위험성을 적실하게 파악하고, 올바른 용어를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학자의 죽음과 풍화되는 기억들

이명선은 1949년 9월 30일자로 서울대학교를 사임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부와의 갈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이후 1950년 7월경,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점 이명선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대학교의 총 책임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공식문서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으며, 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에서 묘사된 모습이 전부이다. 서울수복이 9월 28일이었으므로,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방학 중의 두여 달 남짓을 보내고 다시 쫓겨나게 된 것이다. 혼란한 전쟁 중, 그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 후 첨예한 냉전이 이어진 한반도의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를 위해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연구업적들은 점차 잊혀져갔다. 단순하고 파편화된 어렴풋한 이미지들이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문헌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닌 '~카더라'는 추측성의 낭설들만이 이어졌다.

그에게 덧씌워졌던 누명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이후의 일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 대해 비난하기는 왜 그리도 손쉬웠던 것일까.

▲ 서울대학교 정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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