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청소년인권단체를 비롯해 시민사회단체들이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서울본부)를 만들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한 주민발의(주민발안) 운동을 시작했다. 주민발의를 위한 서명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만 19세 이상만 청구인으로 서명할 수 있어서 학생인권조례를 가장 지지할 집단인 초·중·고 학생들은 애초에 참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주민등록번호 13자리와 등기된 주소를 정확히 써야 했기에 장벽도 높았다.(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만 써도 된다. 그때도 그랬더라면 얼마나 수월했을지!) 비청소년들 일각의 학생인권에 대한 반감과 무관심도 큰 장벽이었다. 주민발의 기한인 6개월 중 절반이 지난 2011년 1월까지도 목표치인 10만 명(주민발의 성공을 위한 최소 수는 유권자의 1%인 8만 1855명이었다) 중 5000명밖에 모으지 못했다.
언론의 악선전 속에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
어떡하나 슬슬 고민될 무렵,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전교조 학생인권조례 서명운동, 목표의 5% 그쳐". 일단 주어부터 부정확했다. 서울본부에는 전교조 서울지부도 참여하고 있긴 했지만 수십 개의 단체가 같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주어를 "전교조"라 붙인 것에서 전교조에 대해 그간 언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부정적 프레임을 활용하려는 의도와 진영 논리가 느껴졌다. 기사 내용도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전교조 내부에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부정적이다'라는 등 마치 실패하길 바라는 듯한 논조였다.
하지만 주민발의 서명이 적게 모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기사를 보고 화가 나기보다는 위기감이 먼저 들었다. 안 그래도 이렇게 보수·우파 언론들이 학생인권에 대해 부정적 기사를 내는 와중에 주민발의가 실패하면? "서울시민 1%도 동의하지 않는 학생인권조례" 같은 기사가 날 게 눈에 선했다. 최초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활발해진 학생인권 논의와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될 터였다.
결과만 말하자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는 성공했고, 우여곡절 끝에 조례 통과까지 이루어냈다. 이를 악물고 뛰었던 계기 중 하나가 <동아일보>의 그 보도였으니, 긍정적 부작용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조중동'을 비롯해 주류 언론들이 당시 막 현실화되던 체벌 금지 조치나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혹은 균형감 있게라도 써줬다면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가령 <동아일보>는 2009년,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관련해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 보장 조항 때문에 우리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교육을 하더라도 손쓸 방법이 없다', '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쳐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라는 식의 논설을 낸 적 있다. 색깔론적 선동이며 비현실적인 과장이었다. 그 밖에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국민일보>, <문화일보>, <매일경제> 등 거의 모든 우파 언론들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학생인권 보장 때문에 학교가 혼란에 빠진다', '표현/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면 학생들이 정치에 이용당할 것이다' 등 도무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한 민주주의 국가의 정론지라 보기 어려운 사설들을 쏟아냈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사람들의 학생인권에 대한 오해와 반감은 이러한 언론들의 보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학생인권조례 반대는 실패해도 그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2017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그럭저럭 자리 잡고 조금이나마 효과를 내고 있던 무렵이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당시부터 청소년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앞세우며 반대하던 단체들이 마침내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청구 주민발의'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합리하고 반인권적인 반대가 끊이지 않는단 게 참 지긋지긋하다 싶긴 했지만, 또 마음 한구석엔 '주민발의 그거 참 힘든 건데…. 고생을 사서 하시네.' 하는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폐지 주민발의를 시작한다는 뉴스 이후로 몇 개월이 지나도록 관련 보도가 별로 없었다. 6개월이 다 지난 후에도 서울시의회에 조례 폐지 청구안이 상정되었단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언론 보도가 없었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폐지 청구 주민발의는 실패한 것 같았다. 만약 성공했다면 꽤나 이슈화가 되었을 것이고 그 단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잠잠했던 것이 실패의 방증인 셈이다. 그러더니 또 얼마 전인 2021년, 대동소이한 면면들이 다시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청구 주민발의를 하겠다고 밝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주민발의,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주장이나 조례안의 옳고 그름이나 사람들의 지지 정도와 상관없이 홍보력과 조직력이 주민발의의 성패를 좌우하는 훨씬 더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가 만일 주민발의를 실패했다면, '의미 있는 운동이 아쉽게 법적 달성 요건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평가하는 목소리보다 '역시나 학생인권조례는 잘못, 시민 지지 없다'라고 떠들 목소리가 훨씬 많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우리에게는 실패를 감수할 여유도 재도전할 기회도 사실상 없었다.
우리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주민발의를 할 때는 뭐 따로 발표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내부 사정을 들었는지 모를 기자가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써내곤 했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학교에 큰일이 날 것처럼 악선전하는 기사와 사설도 끊임없이 나왔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이러다 실패하면 어쩌지 노심초사하며 온 힘을 다했었다. 그러니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한다는 사람들에 대해 언론들이 다루는 모양새를 보면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주민발의가 실패해도 실패 소식이 널리 알려지고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청구, 시민들의 공감대 얻을 수 없었다'라는 기사가 날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단체들이 참 부러웠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주장에 대해 만일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공들여 비판하는 언론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쉽게 느껴졌다.
양쪽 다 똑같이 다루는 걸 원하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이 한국의 언론 환경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특정한 정파나 입장에만 편파적으로 가혹하고 반대편엔 관대한 '불공정'한 환경이라고 비판한다. 내 경험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주민발의는 서명 참여가 저조해 실패 위기라고 공격받게 되지만, 폐지 주민발의는 실패해도 아무 보도도 안 나고 전혀 리스크가 없게 되듯이 말이다. 그건 아마도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입장의 언론들로서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폐지 주민발의가 실패했다는 '불리한' 소식을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학생인권조례 폐지 주민발의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열심히 전하는 언론들이 많아지는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본다. 이러한 복수심(?) 같은 게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런 식의 양측 간 균형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불합리하고 왜곡된 보도가 없었으면 하고, 열악한 학생인권 현실에 대한 언론과 사회의 무관심이 사라졌으면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학생인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로서 싸우는 것은 결국에는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학교와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언론에 기대하는 것도 학생인권조례 찬반 사이의 균형이 아니다. 학생인권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무시해도 되는 학교의 문제점과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당하는 초·중·고 학생들의 현실을 취재하고 전하는 일에 좀 더 힘써달라는 것이다.
불공정한 언론 보도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해결책으로 귀결되기가 쉽다. 물론 언론의 보도와 논조는 정치적 지향성을 갖기 마련이고 이는 진영, 편파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의 문제를 진영 간의 균형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언론을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누고 언론 전반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무대 위에 서지 못한 소수자들과 비가시화된 인권 문제를 알리는 언론의 기능은 그런 접근으로는 제대로 활성화될 수 없다.
언론의 공정성과 공공성
언론의 공정성에 관해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공정하게 편파적'이라는 말은 특정한 편, 입장에 서더라도 그 기준과 방식이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어느 쪽 편에 서더라도 그 이유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성과 보편성이 있는 가치와 원칙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러한 과정에서도 합당하고 공명정대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해 언론 윤리나 보도의 질을 제고해야 한다는, 곧 언론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관해 언론 공공성의 필요조건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혐오와 편견을 재생산하고 선동하지 않는 것,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 배치되지 않는 것이다. 가령 헌법과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뻔히 나와 있는 "집회의 자유 보장" 내용이 학생인권조례에 들어 있다 해서 호들갑을 떨며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거냐고 비논리적인 '우려'를 떠드는 논설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 몇 개를 가지고 '민식이법 놀이란 게 유행한다고 한다'라며 어린이 혐오를 부채질하는 기사들이 정말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불공정'한 것이다.
최근 국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논의되면서 언론 개혁에 관한 관심이 높다. 오보나 왜곡 보도로 인한 피해를 막고 보상하게 하는 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론 언론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반인권적·차별적 언론 보도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 현재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의 정치세력을 옹호하는 언론의 세를 키운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공정한 언론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언론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과 공공성을 강화할 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이 어린이·청소년을 비롯해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또한 반성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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