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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원에 팔려 염전으로...마지막엔 판사에게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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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원에 팔려 염전으로...마지막엔 판사에게 당했다

[존경하는 판사님은 책임지지 않는다] 이상한 판단을 했던 재판부

"피고인(염전주인)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하루 빨리 석방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박홍준

13년간 염전 노동을 시키고 월급은 10원도 안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지? 코피 터지게 때리고, 자기를 감금까지 했는데… 이해가 안 되지만 눈앞의 문서 내용은 분명했다.

이 문서는 극적인 순간에 법원에 접수돼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꿨다. 세상을 충격에 빠트린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가해자 염전주인 A 씨, 그가 실형을 면해 감옥에서 나왔다.

피고인 염전주인이 선고 3일 전에 재판부에 낸 처벌불원서.

노예주인 해방을 앞당긴 염전노예라니. 피해자 박홍준 씨는 바다처럼 깊고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인가?

직접 만나 확인하려고 뜨거운 여름날 전남 목포로 향했다. 오전 9시, 목포역광장은 이미 염전처럼 뜨거워 땀이 줄줄 흘렀다.

"사회복지시절 OO원이요. 주소는 전남 무안…."

역전의 택시기사는 머릿속 네비개이션이 벌써 작동하는지 내 말을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제가 택시 몬 지가 몇년인데 거길 모르겠습니까. 정신병 있고, 조금 모자라신 분들 모여 사는 곳 맞죠?"

택시기사는 아차 싶었는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택시 안 대화는 끝났다. 정작 머릿속 네비개이션 최근 업데이트를 안 했는지, 택시기사는 목적지를 못 찾고 주변을 뱅뱅 돌았다. 박홍준 씨를 만나기로 한 오전 10시를 훌쩍 넘겼다.

박홍준(65년생) 씨는 OO원 정문 바로 안쪽에서 대기중이었다. 이 정도 더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땡볕 아래에서 두 손을 양쪽 다리에 붙인 차렷자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사회복지시설 내부에선 면회가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길 나눠야겠네요."

박홍준 씨의 후견인 손용 사회복지사는 야외 정문에서 땀을 훔치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이어 은색 철문 안쪽의 박 씨에게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키웠다.

"홍준 씨~ 서울에서 기자님이 왔는데요. 뭐 좀 물어본데요!"

"네…"

박 씨의 대답은 주변 매미 울음소리보다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차렷자세 그대로 눈만 들어 철문 밖 나를 빤히 쳐다봤다. 푹 꺼진 두 눈에 쌍꺼풀이 진했다. 나이를 앞질러 이마에 자리잡은 주름은 깊고 진했다. 백발 사이로 갈색 두피가 이마의 주름처럼 선명했다. 등이 휘었는지 연두색 셔츠를 걸친 박 씨의 상체는 앞으로 구부정했다. 움츠린 자세 탓에 160cm 쯤 되는 키는 더 작아보였다.

56세 박홍준 씨 몸엔 나이보다 서둘러 찾아온 게 한둘이 아니었다. 질문을 해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회복지시설 직원이 우산을 펼쳐 땡볕으로부터 박 씨를 보호했다.

/ 염전주인 가해자 A씨에게 합의서(처불불원서) 써 준 거 기억나요?

"네…"

/ 염전주인 처벌 받길 바라세요?

"네…"

/ 근데, 처벌불원서를 왜 써 주셨어요?

"네…"

/ 염전주인이 찾아와서 사과를 했나요? 아니면 그 아들만 찾아왔나요?

"네…"

질문 내용과 상관없이 ‘네’만 반복하는 박 씨를 가만히 바라봤다. 박 씨도 차렷자세 그대로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무에 숨은 매미만 신나게 울어댔다. 긴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박홍준 씨는 시설의 자기 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20kg짜리 소금 8000포대, 160톤의 소금을 매년 혼자 생산하고 나르느라 미래의 힘마저 다 끌어다 썼는지, 56세에 굽어버린 박 씨의 상체는 한 번도 펴지지 않았다. 땡볕 아래 구부정한 그의 걸음은 숨막힐 듯이 느렸다.

이 짧은 면담을 위해 경기도 안산에서 내려온 최정규 변호사는 박 씨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박홍준 씨는 발달장애인이에요. 본인 이름과 생년월일만 쓸 줄 알고, 다른 건 전혀 읽거나 쓸 줄을 몰라요! 이런 분이 처벌불원서 내용을 이해하고 사인했겠습니까? 염전주인 가족들이 자꾸 찾아와서 거의 강제로 사인을 받아간 겁니다. 이런 조작을 판사들이 몰랐다구요? (한숨) 발달장애 증거가 다 제출됐는데, 아니 어떻게…."

전남 무안군 소재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박홍준 씨. 코로나19 탓에 시설 내부에서 불가해, 정문에서 박 씨를 만났다. 시설 직원에 우선을 펼쳐 박 씨를 보호했다. ⓒ셜록

염전노예 사건이 터진 2014년부터 박 씨를 도운 최 변호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처벌불원서 조작’과 재판부의 이상한(?) 오판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소금밭처럼 타들어 간다.

발달장애인을 13년간 착취하고도 처벌불원서 조작으로 실형을 면한 신안군 염전주인 A 씨. 선고 3일 전에 접수된, 누가 봐도 이상한 문서를 검증 않고 가해자에게 유리한 양형으로 반영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제1형사부 진현민, 전경호, 이미나 판사.

세 판사는 속은 걸까, 속아준 걸까? 지금부터 따져보자.

이상하고 요상한 일이지만, 똑똑하고 공부 잘한 판사들의 실수와 오판은 ‘가난하거나-못 배웠거나-장애가 있는 사람’ 앞에서만 집중된다. 숱한 간첩조작 피해자, 살인 누명을 쓴 재심 사건 주인공들이 증거다.

박홍준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없는 것 투성이고, 세상만사 대부분을 모른다. 박 씨는 군산의 한 보육원에서 자랐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형제자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박 씨는 스스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걸로 기억하고 있다.

박 씨는 지능지수 45, 사회성숙지수 43의 발달장애인이다. 몇 살 때 보육원에서 나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박 씨 자신도 모르고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

전남 신안군 한 섬에서 4000평 규모의 염전을 운영하는 A(61년생) 씨는 2001년 1월, 무허가 직업소개소 사장 소개로 박홍준 씨를 만났다. 어떻게 흘러왔는지 박 씨는 목포시 남교동 한 여관에 있었다.

"왜소하고 지능이 낮아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데, 고아로 자라 보호자가 없는" 박홍준은 A 씨에게 모든 걸 갖춘 인물로 보였다. 어차피 그는 월급 줄 마음 없이 “자신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인부”를 찾고 있었으니까. 그가 박 씨에게 말했다.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까 우리집에 가서 일하자. 돈도 70만 원씩 줄게."

A 씨는 직업소개소 사장에게 20만 원을 주고 박홍준 씨를 목포에서 배로 2시간 걸리는 섬으로 데려 갔다. 오타 아니다.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200만 원도 아닌 20만 원으로 사람을 '샀다'.

이때부터 박홍준은 A 씨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 태양이 뜨거운 3월부터 11월까지는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포장하고, 날랐다.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A 씨의 농사 일을 대신하고, 온갖 집안 일도 했다.

박 씨는 다른 염전 소금 포장이나 출하 작업에 동원됐고, 염전 보수 공사장에도 불려갔다. 박 씨 몫의 일당을 A 씨가 모두 가로챘다.

2001년 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그렇게 박 씨는 염전에서 일하고 논밭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 염전에서 또 일했다. 13년간 박 씨가 급여로 받은 돈은 0원이다. 염전주인 A 씨는 노동의 대가로 1원도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계절 풀노동 무임금. 괜히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2014년 2월, A 씨는 박홍준을 목포의 내연녀 집으로 데려갔다. 그가 내연녀에게 말했다.

"방송에 염전 인부 이야기가 안 좋게 나온다. 내가 겁이 나서 (박홍준을) 데리고 나왔는데, 어디 돌아다닐 애는 아니니까 그냥 밥만 해주고 있어라. 홍준이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해라."

박 씨는 그곳에서 감금된 채 1개월을 살았다.

A 씨는 영리유인, 준사기, 감금,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그해 5월 16일 구속기소됐다. 박홍준 씨는 섬에서 풀려나 사회복지시설 OO원에 입소했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없으니, 위로와 안부를 위해 박 씨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가해자 측인 염전주인의 아들이 ‘합의서’에 지장을 받기 위해 박 씨를 몇 번 찾아왔을 뿐이다.

▲ 박홍준 씨가 일했던 전남 신안군 염전의 현재 모습. 지금은 소금을 생산하지 않는다. ⓒ셜록

A 씨 재판에서 쟁점은 별로 없었다. 공판은 세 차례 열렸고, 2019년 9월 18일 변론이 종결됐다. 이때까지 염전주인 A 씨는 박 씨에게 용서받지 못했고, 합의서에 지장도 못 받았다.

대반전은 선고를 3일 앞둔 그해 10월 13일 벌어졌다. A 씨 변호인 측이 박훙준 씨의 무인이 담긴 처벌불원서를 법원에 접수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문서였다.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의견은 양형에 반영될 수 있기에 그 진위를 검증하는 게 중요하다. 대개의 처벌불원서가 그걸 작성한 사람의 주민등록증 사본, 인감증명서와 함께 제출되는 이유다. 하지만 A 씨가 법원에 낸 건, 그런 거 하나 없이 문서 한 장이 전부였다.

반전을 넘어서는 사건은 10월 16일 선고 때 벌어졌다. 목포지원 형사1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A 씨는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발달장애인을 유인해 13년간 임금을 안 주고 염전노동을 시킨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가 명백한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위 혐의는 공소기각, 재판부의 판단에서 아예 배제됐다. A 씨에게 적용된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는 반의사불벌죄, 즉 피해자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다.

재판부는 선고 3일 전에 접수된 처벌불원서를 검증 않고 그대로 믿은 셈이다. 최정규 변호사가 가장 분노하는 건 이 부분이다.

"처벌불원서 진의가 다를 수 있다는 정황이 발견되면, 담당 검사나 박홍준 씨 후견인을 재판에 출석시켜 그 진의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법관이 할 일이고, 의무잖아요! 박 씨가 이름만 쓸 줄 아는 발달장애인이란 걸 재판부도 알았을 텐데, 어떻게 그 문서를 쉽게 믿을 수가 있죠? 그 때문에 A 씨 혐의 중 가장 무거운 근로기준법 위반이 공소기각됐잖아요!"

최 변호사 말대로 해당 처벌불원서는 증거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문서다. 박 씨는 정확한 내용도 모른 채, 후견인이나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문서에 서명하고 무인했다.

재판 경험이 풍부한 판사들은 왜 처벌불원서를 검증하지 않았을까? 해당 재판부의 이력을 알면 의문은 더 커진다.

해당 재판부인 목포지원 제1형사부는 박홍준 씨 사건 이전에 ‘염전노예 사건’ 재판을 이미 13건 진행했다. 재판부는 이중 최소 2건의 재판에서 처벌불원서를 철저히 검증해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주민등록증 사본, 인감증명서, 가족관계서증명서 등을 제출됐는데도 말이다.

이유가 있다. 무효 처리된 처벌불원서를 낸 이들은 모두 박홍준 씨처럼 발달장애인이었다. 해당 재판부가 박홍준 씨 사건에 앞서 같은 해 5월 15일 선고한 판결문의 한 대목을 보자.

"처벌불원의 의사표시는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 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하므로, 피해자가 장애인 등에 해당하여 피해자의 지능, 지적 수준, 발달성숙도 및 사회적응력에 비추어 처벌불원의 목적과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재판부는 이런 이유로 발달장애인의 처벌불원서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관계인들을 법정에 불러 진의 검증을 마친 뒤에 말이다.

이렇게 법관의 의무를 다했던 제1형사 재판부는 왜 박홍준 씨 사건에서만 이상한 판단을 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염전주인 A 씨를 대리한 변호사 이재강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사회복지시절에서 박홍준 씨를 만난 다음날인 7월 31일. 박 씨가 일했던 염전이 보고 싶어 신안군 섬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약 2시간 걸렸다.

풀노동 무임금으로 13년 일한 사람이 섬을 떠났기 때문일까. 박 씨 일했던 4000평의 염전은 지금 폐허가 됐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하던 자리엔 쓰레기와 누군가 신다 버린 장화 한 쪽이 땡볕을 견디고 있었다.

염전에서 더 볼 게 없었다. 섬을 떠나기 위해 정류장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버스 대신 트럭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운전석의 중년 여성이 창을 내리고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염전주인 A 씨의 아내였다.

A 씨 집에 가봤다. 기자라고 밝혔는데도 A 씨의 아내는 "더운데 아이스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며 집안으로 나를 들였다. 그는 얼음 동동 띄운 달달한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이로 얼음을 깨뜨려 먹으며 A 씨의 아내에게 물었다.

/ 박홍준 씨는 어디서 먹고 잤습니까?

"이 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그랬죠. 우리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요. 거의 한 식구였어요."

/ 식구한테도 13년간 일 시키고, 때리고, 돈도 안 줍니까?

"(얼음을 깨트려 먹으며)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죠."

/ A 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다에 낚시하러 갔어요. 저희가 배가 있거든요. 바다 위에서 낚시하면 물고기가 자~알 잡혀요. 감성돔도 나오고, 민어도 나오고…"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그는 주방으로 갔다. 더 머물 이유가 없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서는 내게 그가 말했다.

"남편이 장어를 잡아온다고 했는데… 오늘 저녁은 장어나 구워 먹어야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구부정하게 느리게 걷던 박홍준 씨가 생각났다. 박 씨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이 섬에 갇혀 13년간 노예처럼 일했다. 지금은 유년의 그때처럼 다시 시설에서 산다.

▲ 짧은 면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박홍준 씨. 그의 굽은 등은 한 번도 펴지지 않았다. ⓒ셜록

염전주인 A 씨는 푸른바다에 자기 배를 띄워놓고 낚시를 하며 살고 있다. 종종 감성돔 회를 뜨고, 장어구이로 저녁을 먹는다.

진현민 판사는 지금 서울고등법원에 있다. 전경호 판사는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으로 발령 받았다. 이미나는 현재 광주가정법원 판사다.

박홍준 씨는 지난 추석과 두 번의 연휴를 시설에서 혼자 보냈다. 특별한 일 아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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