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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인간, 김종철과 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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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인간, 김종철과 그의 죽음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④

김종철 선생님의 <녹색평론>은 30년 가까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다시 불러내어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영매 같은 잡지였다. 김종철은 무당 같은 존재였다.

김종철을 에콜로지 사상가로 보든, 문학평론가로 보든, 대학 교수로 보든, 그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 지워져 버린 소농의 가치, 근원적 민주주의의 흔적, 비근대적 원주민들의 땅과 문화를 지키려는 투쟁 등, 일제 식민통치와 외세 의존적 근대화를 거치면서 한반도 남쪽 땅의 주민들 기억 저 너머, 근대의 짙은 어둠과 질곡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삶-생명의 담론과 가치를 복원시키고자 온몸으로 분투하였던 실천적 지식인이다.

나는 그와 근 10년간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후배 교수로 같이 근무하며 그의 연구실에서, 세미나장에서, 그리고 학교 인근의 저수지, 식당, 맥줏집에서 같이 공부하며 가르침을 청해 들었으며 그가 교수직을 사직한 후에는 일리치 시민 대학에서 꽤 긴 시간을 함께한 바 있다. 이 글의 시작을 ‘김종철 무당론’으로 연 것은 그가 최고로 꼽는 작가나 시인에 대해 언급할 때면 그는 늘 무당론을 꺼내들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이야말로 샤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했기 때문이다.

일리치 시민대학 강좌가 진행되는 동안 김종철 선생님이 가장 애정을 보였던 작가 중 한 사람이 이시무레 미치코다.(이시무레 미치코는 김종철의 마지막 노트이기도 한 12개의 코로나 일지를 비롯해서 여러 차례 <녹색평론>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무당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작가회의 주최 문학 강연회에서 이시무레 미치코에 관련한 그의 강연 한 대목을 옮겨보자.

"이시무레는 환자들의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면 의식이 굉장히 날카로워집니다. 괴로움이 깊을수록 의식은 극한적인 한계까지 가닿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극한에서 오히려 사람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명감각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작가이자, 무당으로서 이시무레가 자신의 작중인물들을 대변해서 전하고자 한 것은 결국 이 생명감각, 생의 근원적인 행복과 풍요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생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질소비료회사의 유기수은 방류로 수은중독에 걸린 구마모토 현의 한적한 어촌마을 미나마타의 어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슬픈 미나마타>를 소재로 한 강연이다. 김종철은 이 소설을 단순히 산업공해 고발 이야기로 보지 않는다. 김종철이 주목한 것은 이런 것이다. 자연에 기대 살아가던 어민들이 근대문명의 배설물로 자신들의 세계가 병들면서 그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던 그들 역시 병들어가지만, 그들의 불행은 역설적으로 근대문명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들만의 비근대적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자각하게 하는 과정을 겪으며 "지극히 순결한 영혼의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을 건져 올린다. <슬픈 미나마타>의 일본어 원제목이 <고해정토(苦海淨土)>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고통의 바다인 현생에서 벗어나 만날 수 있다는 극락정토가 아니라 고해(苦海)가 곧 정토(淨土)라는 것이다.

"작가가 아무리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아무리 유연하게 접근한다 하더라도 늘 '흙' 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삶과의 생생하고 유기적인 접촉이 없는 한, 근원적인 생명감각을 포착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은 작가와 평생을 작은 어촌에서 바다를 벗 삼아 죄지을 일 없이 살아오다 억울한 불행을 맞이한 어민들의 삶 속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해준 것, 김종철에 따르면, 이시무레 미치코의 불행 의식 때문이다.

김종철이 <녹색평론>을 단 한 권의 결호도 없이 30년 가까이 발행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이 불행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어린 시절 치매 앓는 할머니와 오랜 시간 같이 하며 이웃과 가족의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행의 경험을 내면화한 이시무레 미치코와는 달리 김종철의 유년 시절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민중적 삶은 그에게 행복감의 원천이다. 바로 그 행복의 근원을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렸을지 모른다는 점과 흙과 들과 마을사람들과의 공동체적 관계에 기초한 토착적인 민중문화야말로 인간적 가치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고립감이 그의 불행의식의 원천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전쟁과 함께 일본이라는 근대국가는 번성했지만 기층 농민들의 삶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전기가 들어와 세상이 캄캄해졌다"와 같은 역설적인 말로 근대문명의 빛에 깃들어 있는 죽음과도 같은 짙은 어둠을 이야기한 정치가 다나까 쇼조의 절망적인 불행감을 김종철은 공유하였다.

근대문명의 본질은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 다나까 쇼조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러일전쟁을 수행할 목적으로 개발한 아시오 구리광산으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그 지역의 마을이 황폐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몸과 정성으로 저항하며 결국 황폐화된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김종철은 <녹색평론>를 발행하며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철의 돌연한 별세를 맞이하여 가장 많이 언급된 그의 글 중의 하나가 '시의 마음과 생명 공동체'(1991년)라는 글이다. 이 글은 <녹색평론> 창간을 앞두고 한 문학의 밤 행사에서 발표된 글로서 일종의 <녹색평론> 출사표로 읽힐 만하다. 현대 산업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들만의 공동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생명공동체로 인식과 느낌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진 이 글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온통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며 마침내 글은 김수영을 원용하며 이렇게 글을 맺는다. 

"아마 김수영 선생이 되풀이하여 죽음을 언급했을 때 그는 죽음을 제일의적(第一義的) 질서로 수용하는 겸허한 마음이야말로 바로 보람 있는 인생과 시의 중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은 김종철에게 가장 순수한 자연이면서 자연과 인간을 대상화하여 지배하려는 교만의 마음을 통제해주는 가장 강력한 자연의 면모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결국 무화(無化)된다. 죽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김종철은 생애 마지막 노트인 '코로나 일지'에서 코로나 국면이 길어지면서 코로나 우울감을 동반한 몸의 이상을 호소하면서도 죽음을 미리 앞당겨 생각하는 일의 허망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 선생님은 이명으로 크게 고통을 감내하다 백사실 계곡을 찾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칠흑 같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순수한 백사실의 자연을 맞이하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당신의 몸과 마음을 맞춰 고통을 다스리려 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만,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바로 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고의(故意)조차도 그보다 더 큰 존재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종철 사상의 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여러 갈래의 큰 물줄기 중 하나가 이반 일리치다. 그의 강연록 중 '일리치의 혹'이라는 글이 있다. 많이 알려진 대로, 이반 일리치는 젊은 시절부터 오른쪽 뺨에 혹이 자라고 있었지만 현대의 의료적 처치를 거부하며 지내다 결국 그 혹이 문제가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혹이 자람에 따라 고통도 따라 커졌지만, 여러 친구들의 권유에도 의료적 치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결국 믿음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왜 치료를 받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대한 일리치의 대답 중 김종철이 주목한 것은 다음 대목이다. 

"나는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뿐." 

훗날 일리치에게 그 질문을 했던 친구, 리 호이나키는 훗날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의 독배를 치우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신의 뜻을 따를 뿐이라는, 체포 직전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언급한다. (그러니까 독배를 마시는 것도 신의 뜻일 뿐이라는 말이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부디 독배를 치워달라는 예수의 간절함 역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리치에게 죽음마저 신의 뜻에 따른다는 말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육신을 통해 그대로 실천한다는 말을 뜻한다. 육신의 고통을 첨단 의료 장비의 개입을 통해 말끔히 제거해버린다는 것은—그나마 성공 확률은 30%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료 통계의 수치는 제거의 의미 자체를 삭제해버리지만—고통의 체화(embodiment)가 지니는 존재론적 초월의 계기를 앗아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미나마타의 주민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히려 바다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으며 일구어낸 토착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자각하여, 그곳이 바로 정토라고 하는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와 맞닿아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일리치는 자신의 혹으로 인해 겪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통증 때문에 내 몸을 더욱 자각하게 되었고 감각적 느낌이 더 강해졌다. 예를 들면, 색채들이 더 밝아 보이고 생동감은 더 넘친다."(리 호이나키(Lee Hoinacki)의 <Death is not Dying> 중 'The art of suffering'에서. 번역본으로 <아미쿠스 모르티스>(부희령 옮김, 삶창 펴냄)가 있지만 인용 부분은 필자의 번역임) 

일리치의 사상적 배경을 알지 못한 채 일리치의 저런 진술만 들으면 아프고 괴로운 데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면 쾌감이 증폭될 것이라는 일종의 마조히즘 같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이 점에 대해 김종철은 근대사회의 고통의 원천을 날카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누구보다 명료하게 진술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질병에 대처할 때 현대의료적 처치에 의존할 것인지, 민간요법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일리치가 소개하는 것처럼 환부에 성유를 바르는 것과 같은 종교적 의식에 의탁할 것인지, 이 셋 중 어느 쪽을 믿고 택해야 치료의 효용성이 가장 클 것인가, 하는 점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김종철이 믿는 것은 질병과 죽음은 이 세계의 가장 자연스러운 질서이며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노력이 보살핌과 친절과 환대로 나타나서, 그런 인간적 노력이 "민중생활의 자치와 자립성의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김종철의 근원적인 믿음의 세계는 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방편적 방법론에 대한 탐구와 발언으로 이어진다. 가령, 대학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수많은 진단과 처방이 터져 나올 때, 그는 너무나 단순하면서 명료한 처방을 제시한다. 대학 교수들의 월급을 반으로 삭감하라. 대학의 거버넌스를 민주화하고 교수회를 활성화하며 비리재단을 내모는 것도 다 중요하지만, 첨단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고급한 전자 장비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전초기지인 현대 대학을 자본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려면 사람의 마음을 먼저 해방시켜야 한다.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감옥 너머 삶의 고통과 진정한 환희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학을 만들려면 기초적인 생계와 토착적 삶에 반응할 수 있는 교육자들과 연구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비를 대폭 늘려달라는 일반 대학 교수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방이었다.

내가 현재 30년 가까이 근무하는 대학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한 가문을 중심으로 뜻있는 지역 유지들의 모금을 통해 세워진 대학이지만 박정희부터 전두환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대학을 빼앗겼다가 6.10 항쟁의 민주화 흐름을 타고 1989년 이후 교수와 학생들의 자치로 대학을 운영했던 황금기가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라는 이름의 황금기는 문자 그대로 '황금기'였다. 민주화 이후 우리 대학이 국책공대(공과대학 국책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국가로부터 수백억의 뭉칫돈이 흘러들어오던 시기였다. 대학 구성원들은 학교의 번영을 기뻐하며 전국 최고 수준의 임금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대학의 그런 상황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는 단 한 명의 예외가 김종철이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당시의 학교 상황에 대해 이대로 가서는 대학의 미래가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유일한 구성원이었다. 우리 대학의 현재 상황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대학을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대학 정신을 자본에 팔아넘기는 순간 대학은 비판적 이성과 세계의 소금과 같은 그런 역할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욕망의 반대쪽에 위치한 김종철의 반값 교수월급론은 충분히 성찰해 볼만한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길게 이야기할 계제는 못되지만, 하나만 더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모두 아시다시피, 김종철은 7~8년간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파해왔고 유력 대선 후보가 주요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하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가적 규모로 기본소득이 시행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데에 기여를 했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김종철의 기본소득론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인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김종철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돌아가시기 너댓 달 전쯤이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은 더 이상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씀을 했다.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터에 이제 당신까지 나서 이야기 보탤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김종철은 보편복지냐 선택복지냐 따위의 복지 논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본소득의 실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공화주의적 국가관에 입각해서 공유되어야 마땅한 공유재, 그러니까 토지, 물, 공기, 대중운송기관, 인터넷 망, 그리고 나아가 금융시스템과 같은 공유재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자는 것에 그의 진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공유재를 공유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천규석 선생님의 <망쪼든 세상 그래도 기리버서>(신생사 펴냄)에서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기본소득론자들이 제시하는 토지와 같은 공유재를 언급하려면 각 지역별, 마을별 공유지처럼 농촌 공동체의 개념과 체제의 회복이 더 중요할 텐데 바로 전국적인 규모의 기본소득론을 언급하는 것은 그 취지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논리상, 농촌공동체의 본질상 모순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76~7쪽) 김종철의 경우에도 그의 기본소득론을 주의 깊이 읽어보면 결국 재원 마련 부분에서 다른 일반적인 기본소득론자가 난색을 표하는 정부통화론, 즉 금융 또는 은행의 공유화론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금융(金融)의 본래 뜻이자 기능이 금전의 융통이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그 사람이 누구든 특히 농민과 소상공인의 경우 어떤 불리한 조건 없이 필요할 때마다 무이자로 정부통화를 융통하여 쓸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김종철은 이미 기본소득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민중자치의 대동세계를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철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전날 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지역활동을 하고 있는 가까운 지인과의 통화를 통해 그가 있는 시골로 귀촌하여 마을 생활을 하였더라면 이런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는 회한의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평소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 대한 존경심을 토로하는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필자는 어쩌면 이것은 한 개인의 회한이라기보다 할 수만 있다면 농경 토착 사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며 진보라는 명찰표를 단 퇴행의 근대사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자, 글로 농사를 지은 예지적 지식인이 우리 사회에 남긴 궁극적 메시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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