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요 국가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일국의 대응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국제공조 및 다자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환경규제 강화, 탄소세와 온실가스배출권 거래 제도 등을 실행하고, 대외적으로는 통상정책을 활용하여 기후변화 대응 노력이 미진한 국가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럽연합(EU)에 이어 미국까지 수입 제품에 탄소국경세(Carbon Border Tax)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EU는 지난 7월 14일 기후 대응 법안 ‘피트 포 55(Fit for 55)’를 발표하며 2026년부터 본격적인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 시행을 예고했다. EU는 수입업체가 수입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 만큼의 탄소배출권을 구매하되, 원산지 국가에서 이미 탄소배출 비용을 부담한 경우에는 해당 비용을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비용을 부과할 계획이다.
탄소국경세 압박 현실화
EU의 탄소국경세 도입 추진은 온실가스 배출거래제 및 온실가스 저감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강력한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후변화 대응뿐만 아니라 자국 산업 보호의 성격도 있어 향후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화될 우려도 있다. 인도와 러시아 등은 탄소국경세를 보호무역주의 일환으로 해석하면서 강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올해 초만 해도 탄소국경세의 방향성에는 동의하나 시기상조라는 입장에서 최근 적극적인 도입을 고려하는 입장으로 바뀌면서 통상정책을 활용한 대외적인 압박이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도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탄소국경세 도입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미 의회도 지난 7월 19일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과 스콧 피터스 하원의원을 필두로 탄소국경세 법안을 발의했다. 2024년부터 화석연료, 알루미늄, 철강, 시멘트 등에 탄소국경세를 부과하는 방침이 담겨있다. 법안을 도입할 경우 전체 수입품의 약 12% 정도가 규제를 받게 되고, 연간 50억~160억 달러(5.8조~18.4조 원) 규모의 추가 세입이 발생할 전망이다.
탄소국경세 부과되면 국내 수출 감소 전망
한국은행이 발간한 ‘주요국 기후변화 대응 정책이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EU가 예상대로 온실가스 배출량 톤당 50달러의 탄소국경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 수출은 연간 0.5%(약 32억 달러) 줄어들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까지 같은 수준의 탄소국경세를 추진하면 수출이 0.6%포인트(약 39억 달러) 더 위축돼 전체 수출 감소율은 1.1%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은 EU 탄소국경세 부과시 0.13%, 미국 부과시 0.15%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EU와 미국이 국내 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권 평균가격(톤당 15달러, 약 18,000원)을 고려해 탄소국경세를 톤당 35달러 수준으로 감면할 경우 EU와 미국의 탄소국경세 도입에 따른 수출 감소율은 각 0.3%, 0.4%까지 낮아질 것으로 추정됐다. 또 국내에서도 탄소중립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향후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권가격이 상승하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다소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
탄소중립기본법 통과와 기후대응기금 신설
탄소중립을 위한 법안과 예산이 지난 8월 31일, 같은 날 확정됐다.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안(이하 탄소중립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탄소중립기본법에 법적 근거를 둔 기후대응기금이 정부 예산에 신설됐다. 2조 5,000억 원 규모의 기후대응기금은 탄소배출 감축을 유도하기 위해 탄소배출권 매각 등으로 생긴 수입을 탄소감축 목적 사업에 지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7조 6,000억 원 규모의 녹색금융 예산을, 산업재편에 따른 노동 분야의 정의로운 전환에는 5,000억 원을 각각 책정했다. 예산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반영하는 제도인 온실가스감축인지 예산제도도 향후 시범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탄소중립 관련 정부 예산 중 특히 관심을 끄는 항목은 신설되는 기후대응기금이다. 탄소중립기본법을 보면, 기금의 재원은 정부의 출연금, 정부 외의 자의 출연금 및 기부금, 다른 회계 및 기금으로부터의 전입금, 제71조에 따른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 제3항에 따른 금융기관·다른 기금과 그 밖의 재원으로부터의 차입금,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따른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부터의 예수금(豫受金),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 제12조 제3항에 따라 배출권을 유상으로 할당하는 경우 발생하는 수입, 기금을 운영하여 생긴 수익금,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수입금이다.
명시된 재원 중에서 예산 투입 규모를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71조에 따른 교통·에너지·환경세의 7%와 온실가스 배출권 유상 할당 수입이다. 교통·에너지·환경세수가 최근 3년 수준(약 15조 원)으로 발생한다면, 이 가운데 7%인 1조 원 이상이 기후대응기금에 투입될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권 유상 할당 수입은 지난해 약 2,500억 원 정도였다. 지난해까지 3%였던 유상 할당 비율이 올해는 10%로 확대돼 2025년까지 적용하고 그 이후에는 더 늘리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만큼 금액은 향후 증가할 수 있다.
에너지세 폐지와 탄소세 신설 논의 필요
교통·에너지·환경세는 조세 규모 중 4번째로 큰 규모로, 재원 중 대부분이 토목 분야나 화석연료 보조금 등에 사용돼 실제 환경 부분에 사용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는 비판이 계속돼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세제가 에너지 생산·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및 기타 외부비용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온실가스 감축 효과도 극히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교통·에너지·환경세를 폐지하고 탄소세 등 새로운 환경세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계속 진행되었으나, 별다른 변화 없이 현행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교통·에너지·환경세의 내년 1월 폐지를 앞두고 에너지세제를 통합·유지·보완할지, 탄소세를 신설할지 등 논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관련 법안과 예산이 통과되었다.
탄소세는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 수단으로 논의되고 있다. 2019년 1월 <월스트리트 저널>에 ‘탄소세 배당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성명서(Economists’ Statement on Carbon Dividends)’가 발표되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위원장, 전임 경제자문위원장 등 미국 경제학자 3,589명이 “탄소세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가장 비용 효율이 좋은 수단이다”라는 이 성명에 서명했다. 성명에는 탄소세의 과세 목적, 장점, 산업적·경제적 효과, 탄소국경세의 도입 등 탄소세에 관한 쟁점에 대한 입장이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탄소세 재원을 모든 미국인에게 탄소배당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탄소세 27개국 시행 중, 미국도 고려 중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온실가스세(Upstream GHG Tax)를 고려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2019년 ‘에너지혁신 및 탄소배당 법안(Energy Innovation and Carbon Divided Act)’을 발의했고, 현재 의회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해당 법안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기업으로부터 탄소세를 거둬서 미국 가계에 배당금의 형태로 지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기본적인 탄소국경세에 대한 개념도 담고 있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탄소세를 도입한 국가는 27개국(주별로 다른 세율을 적용하는 캐나다 주 정부 등을 추가할 경우 35개)이다. 1990년 핀란드와 폴란드가 가장 먼저 탄소세를 도입했고,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1991년, 덴마크는 1992년에 도입하는 등 북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탄소세는 30년 전부터 시행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전 유럽 국가들로 확대되었다. 유럽 지역 외의 국가로는 캐나다와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이 있고,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2012년에 탄소세를 도입한 일본과 2019년에 탄소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싱가포르가 있다. 톤당 세율은 스웨덴이 137달러로 가장 높고, 스위스(101 달러), 핀란드(62-73달러), 노르웨이(4-69달러), 프랑스(52달러) 등의 세율이 높으며,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등이 1달러 미만으로 가장 낮다.
대선 주자들 탄소세 공약, 심도 있는 논의 기대
한국은 2015년부터 배출권거래제(Emission Trading System)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며 대상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배출권의 과잉 분배와 무상 할당의 문제점, 거래가격의 불안정성이 제도가 시행된 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탄소세는 도입하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배출권거래제에 참여하고 탄소세를 도입하는 혼합형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배출권거래제와 탄소세의 이중 부담을 방지하기 귀한 각종 감세 혜택도 병행하고 있다.
제21대 국회에는 현재까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탄소세법안을 발의했다. 여당인 민주당과 거대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안은 찾아볼 수 없다. 제19대 국회에서는 정의당 박원석 의원과 심상정 의원의 기후정의세법안과 탄소세법안이 발의되었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국제연합(UN)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에서 2030년까지 탄소세를 톤당 75~100달러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국내에서의 탄소세 논의는 크게 미흡함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 4개 부처가 교통‧에너지‧환경세법 뿐 아니라 탄소가격의 부과체계 개편에 포함된 배출권거래제도와 탄소세 신설 등에 관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탄소세 도입을 포함한 에너지 세제 개편 연구 작업에 착수했다. 정치권에서도 일부 대선 주자들이 탄소세 도입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탄소중립을 위한 탄소세의 과세 대상과 세율, 기존 에너지세제 및 배출권거래제와의 연계, 탄소세의 목적에 따른 세수의 활용, 탄소세의 역진성 문제를 해결할 방안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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