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 D.C. 일대에 강한 비바람이 쏟아졌다. 이날 오후 5시 30분께 기자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폴스처치에도 강풍과 함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더니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쿠구궁!'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천둥 번개가 치자 집안의 전등이 모두 꺼졌다. 정전이다.
지난 겨울, 원래 영하의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국 텍사스에 갑작스럽게 한파와 폭설이 몰아닥치면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로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미국은 정전이 자주 발생한다. 텍사스 정전 사태의 주요 원인이었던 전기 민영화 등을 포함해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전력 관련 설비의 노후화다.
미국에서 각 가정 등의 전기공급은 아직도 (나무) '전봇대'를 이용해 이뤄진다. 때문에 심한 비바람에 전봇대가 쓰러지거나 혹은 주변 나무가 꺾여 전깃줄을 끊어뜨려 정전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의 전력 시설은 19세기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오래된 도시의 경우 100년이 넘은 노후화된 전기 시설을 고쳐가며 쓰고 있기 때문에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
기자가 사는 동네에서 10일 오후 강한 비바람 때문에 시작된 정전은 11일 낮 12시가 넘어서야 복구됐다. 그 기간 동안 전등뿐 아니라 냉장고, 각종 조리시설, 인터넷 등을 쓸 수가 없었다. 11일 오전 9시께 인근에 나가보니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아 사거리에서 차들이 혼선을 빚고 있었다. 사고를 피하기 위해 차들이 조심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좌회전, 우회전을 하려는 차들과 직진 차량들 사이에 신경전을 피할 수는 없어 보였다.
초강대국 미국의 일상적 '후진성', 낡은 사회 인프라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정전은 황당한 일이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해마다 3~4번의 짧거나 긴 정전 사태를 경험하는 미국인들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미국의 노후한 사회 기반 시설은 전력 공급망만이 아니다. 상하수도, 도로, 철도 등 대부분의 시설이 낡았다. 이 때문에 세계 최고 부자나라이자 초강대국인 미국에서 경험하는 일상생활의 '후진성'이란 모순이 발생한다. 낡은 인프라를 고쳐야 할 필요성은 단순히 불편함 때문이 아니다.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간 이런 문제가 도외시된 이유는 '돈'과 '정치' 때문이다.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개·보수는 만만치 않은 비용과 사회적 갈등이 요구된다. 정전을 예방하기 위해 전선을 땅에 묻는 '지중화'를 위해선 초기 시공 비용뿐 아니라 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의 불편과 피해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미국은 도로, 전기, 상하수도 등 인프라에 대한 관리와 책임의 상당 부분을 주정부가 맡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 해결은 난망한 일이었다.
바이든 정부의 '1차 인프라 법안'이 공화당의 지지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최근 보기 드물었던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내 '1차 인프라 법안(Bipartisan Infrastructure Investment and Jobs Act, 초당적 인프라 투자·일자리 법안)'이 10일 상원을 통과한 것은 노후화된 기반 시설에 대해 더이상 '땜질식 처방'만으로는 안 된다는 정치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상왕' 격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를 포함해 19명이나 되는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총 100명의 상원의원 중 50명이 민주당, 50명이 공화당인 상황에서, 이 법안은 찬성 69표, 반대 30표로 통과됐다. 상원을 먼저 통과한 이 법안은 하원으로 보내져 하원을 통과해야 하지만, 민주당이 과반 의석인 하원은 어렵지 않게 통과될 전망이다. 앞으로 10년간 1조 달러(약 1155조 원) 규모의 재정이 도로·교각·교통(철도 및 대중교통), 광대역 인터넷망, 상하수도 등 인프라 시설에 투입되며, 신규 투자 사업에도 5500억 달러가 투입된다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법안 통과에 예정에 없던 백악관 연설을 진행했다. 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앞서 민주당과 백악관은 1차 인프라 법안의 초당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도성향의 공화당 상원 의원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공을 들여왔다.
바이든은 이날 연설에서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요구해오던 인프라 법안은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타협은 양측(양당) 모두에 어렵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들도 이날 법안 통과와 관련해 "바이든의 정치적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후변화, 복지 등 장기적 비전 담은 '2차 인프라 법안'도 통과될 수 있을까?
바이든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인프라 법안은 하나 더 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민주당 진보진영에서 강력히 요구하는 3.5조 달러(약 4000조 원) 규모의 '2차 인프라 법안'이다. 이 법안에는 바이든이 '미국 가족 계획'을 통해 제안한 2년 과정의 커뮤니티 대학 학비 지원, 유급 보건 휴가, 자녀세액 공제 확대 등이 포함되며, 진보진영에서 강력하게 주장해 온 의료보험 혜택 확대, 기후변화 대응 등도 포함된다. 샌더스는 민주당 상원 예산위원회에서 이 법안에 대해 합의한 뒤 "대공황 이후 가장 중요한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법안에 찬성하는 공화당 상원의원은 없다. 민주당은 11일 새벽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를 막기 위해 예산 결의안에 포함시켜 이를 단독 통과시켰다. 문제는 민주당 내 보수 성향 상원의원(조 맨친, 크리스틴 시네마)들의 반대다. 맨친 의원은 이날 "3조5000억 달러 규모의 복지·교육·기후 예산조정안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무책임한 수준으로 계속 지출하면 예기치 못한 위기에 대한 국가의 대응 능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네마 의원도 같은 입장이다. 예산을 배정하는 세부 입법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다. 반면 민주당 진보진영 의원들은 3.5조 달러는 '최소 비용'이라고 주장한다. 샌더스 의원은 앞서 6조 달러 규모의 예산안을 주장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11일 이런 민주당 내부의 이견을 언급하며 "바이든은 초당적 승리를 찾지만 민주당 내부의 통합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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