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성만을 위한 법도,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인종적 차별을 겪는 자들만을 위한 법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다. 사회 각계 각층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의 취지가 그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의 문제, 미친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이것들은 이제 평등에 관한 문제와 연결돼 있다.
<프레시안>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① "조주빈 처벌하면 만사 끝?…성차별 끊어내는 게 폭력 근절의 전제" (☞바로가기)
②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바로가기)
③ "'저렴한 목숨'은 죽어도 되나…산재와 차별은 같은 뿌리" (☞바로가기)
④ 기후위기 최대 피해자들에 "학교는 어쩌고 왔니"라 묻기 전에 (☞바로가기)
⑤ "대한민국의 부동산 경제, 청년들 등에 빨대를 꽂고 있다" (☞바로가기)
⑥ "'지잡대 나오니 그렇지'?...직장 모욕과 갑질은 차별의 다른 이름" (☞바로가기)
⑦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이 아직도...'매매혼'이 차별을 생산한다" (☞바로가기)
⑧ "동물 차별, 사람 차별과 정말 상관 없을까요?" (☞바로가기)
⑨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바로가기)
지난 5월, 백상연극상 시상대에 오른 구자혜 연출가의 수상소감이다. 고(故) 이은용 작가는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 이은용 작가의 죽음은 한 줄로 표현되곤 했다. "이은용·김기홍·변희수, 한 달 사이 세 트랜스젠더의 죽음." 평생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상을 받고는 먼저 이은용을 꺼냈다.
수상소감으로 욕도 많이 먹었다. 포털 기사에는 혐오댓글이 줄줄 달렸다. 누군지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구 연출가 역시 그랬을 터. 그런 그에게 몇몇 성소수자 친구들이 "힘이 됐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구 연출가는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신념을 드러내는 일에 소극적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내가 하는 한 줄의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겠다"고 했다.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한숨 소리조차 눈치보는 사람.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각자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굳이 불편할 거 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나중에'로 미뤄두는 존재들에게, 별 것 아닌 말 한마디로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프레시안 : 오래 고민하고 응한 인터뷰라고 들었다.
구자혜 :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인터뷰는 처음이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신념을 드러내는 일에 소극적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차별하지 말라는 게 신념까지 갈 일인가? 상식 아닌가. 다른 많은 분들이 전면에 나서서 애쓰고 있고 싸우고 있다. 나도 같은 신념을 갖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평등의 에코-100>에 참여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을 말하는데 왜 나를 드러내고 발언하는 걸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백상수상소감 감동적이었다. 한편으로 정말 '세다'고 생각했다. 차별금지법이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았지만 바로 차별금지법이 떠올랐다. 미리 준비한 건가.
구자혜 :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안 빼고 미리 준비한 말이다. 백상은 연극계만의 상이 아니고 대중예술상이다. TV로 중계되고 많은 사람이 본다. 그래서 더 이 얘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상할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꼭 수상하고 싶었다. 상을 받으면 이 말을 할 수 있는 발언권이 생기니까.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으로 연락을 많이 받았다. 트랜스젠더 친구들, 퀴어 친구들이 고맙다고 했다. 힘이 됐다고. 혐오댓글이 달린다 해도 내가 하는 한 줄의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수상소감이 내 인생에도 하나의 기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하지 않고 해야 할 이야기를 하는 시작.
프레시안 : '어떤 사람의 삶을 감히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었다. 차별을 너무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구자혜 : 차별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차별하면 안 된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누군가를 차별할 때 '저 사람에게는 그래도 된다', '저 사람은 무시해도 돼', '저 사람 차별해도 돼, 이렇게 말해도 돼'라는 인식이, 인식이든 무의식이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삶을 감히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굳이 강조한 건 그래서다. 그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프레시안 : 수상소감에서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를 준비하면서 "배우들은 선언이 연기가 될 수 있도록 발화의 방식을 고안했다"고 말했다. '발화'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극장 안에서 일어나는 연극이라는 발화는 극장 밖, 그러니까 사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구자혜 :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계속 드러내는 것. 연극을 많은 사람이 보지는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을 계속 담아내는 것.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 많이 발화한다는 목표가 처음부터 있었다. 그래서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임에도 배우 여덟 명, 수어통역사까지 무대 위에 열 명이 나온다. 발화의 원리는 트랜스젠더 프라이드였다.
프레시안 :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가 지난달 말에 재공연했다. 어쩔 수 없이 이은용 작가의 부재를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재공연할 때 다른 점이 있었나.
구자혜 : 이번에 재공연하면서 '이리'라는 배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이렇게 발화할 자격이 있나"라면서 "작년에 공연할 때보다 연극적으로는 우리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발화하는 데 두려움은 줄어든 것 같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아진 것이 없다고. 나도 그 말에 굉장히 동의한다.
올해에는 객석의 관객분들이 무대에 보내는 긍정적인 힘이 느껴진다. 극장은 안전해졌지만 현실은 여전하다. 그래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이전부터 소수자, 사회적 약자를 다뤄왔다. 최근엔 대중매체에 퀴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대상화한다는 비판도 거의 항상 따라붙는 것 같다. 연출가로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구자혜 : 나 역시 작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억압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을 무대 위에 불러내고,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일부러 매력적으로 혹은 보편적인 결점을 가진 존재로 그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너무 고통스럽고 슬픔을 가진 존재로 그리면 안 되니까 밝게 그리자' 이것도 제 선입견이다. 우상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하지만 고귀하게 그려내고 싶다, 늘. 우아하거나 숭고하거나 이런 의미는 아니다. 그 사람의 고통을 최대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힘 있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해 배우들과 가장 많이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트랜스젠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
구자혜 : 솔직히 말해보겠다. 연출로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거의 고민이 없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사랑하는 작품이다. 매번 공연을 볼 때마다 행복했다. 이런 희곡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이건 처음 하는 이야기이다.
프레시안 : 차별받는 사람, 소수자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나.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구자혜 : 세월호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이전에 내 관심사는 계급·세대·젠더였다. 나에게 한 시대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중요한 화두였다.
세월호 이후로 기존의 방식대로 연극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사라졌고 그 장면이 TV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이후 '어떤 시대의 풍경을 드러낸다'에서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인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작품의 경향과 작업을 해나가는 방식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메시지까지는 모르겠다. 그저 사람들의 발언권, 즉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어떤 시대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 어떤 차이가 있나.
구자혜 : 극장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연기'를 한다. 배우가 유려한 기술로 어떤 메소드 연기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떤 고통을 연극이라는, 연기라는 미명하에 어떤 인물인 척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들은 그럴 수만은 없는 존재다. 자기가 하는 대사가 사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고, 실제로 극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세월호 후에 배우들이 그런 불편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연기라는 전략에 숨어서 그럴듯한 연극을 만드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프레시안 : 매끄러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연극'이 배우들에게는 불편했다는 의미다. 연기를 잘하는 게 불편하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간다.
구자혜 : 세월호는 모든 시민이 겪은 동시대의 사건이다. 배우들도 한 시민으로서 세월호를 지켜봤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공연을 하는데 관객들도 세월호를 함께 지켜본 시민이다. 객석에 유가족,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 배우는 유가족도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지만 연극을 한다는 이유로 그럴듯한 연기를 한다. 때로는 울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배우들은 그게 불편한 거다. 같은 것을 목도한 동시대의 시민 앞에서 역시 시민인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을 연기한다는 것이.
프레시안 : 같은 작품이지만 언제 공연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를 것 같다.
구자혜 : <킬링 타임>이라는 작품이 있다.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가 실시한 청문회의 증인들, 참고인들의 말을 갖고 만든 연극이다. 이 작품을 처음 극장에서 하고 난 후, 1년이 지나 광화문에 세워진 '블랙텐트'라는 천막극장에서 다시 공연이 올라갔다. 블랙텐트는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 바로 앞에 있었다.
처음 공연할 때는 시간이 흐르면 진상규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안 되고 유가족들이 아직 광장에 있는 거다. 그때 극장을 벗어나서 그 광화문 한복판, 분향소 옆에서 공연했을 때는 같은 공연이라도 관객을 만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극장에 오는 관객들도 지나가는 시민들이 많았다.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연극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프레시안 : 10월에 동물을 주제로 한 <로드킬 인 더 시어터>가 올라간다. 동물을 주제로 한 연극인가.
구자혜 : '로드킬'보다는 '인 더 시어터'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연극, 혹은 예술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많이 다룬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예전에 개가 사라지는 연극을 했었다. 개가 사라져서 가족이 그 개를 찾아다니는 내용인데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어떤 은유로 봤다. 하지만 은유가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개가 사라진다면, 그 개가 내 가족이라면 삶이 멈춘다. 가족이 없어지면 당연히 찾아다닌다.
나랑 같이 사는 개가 죽으면 개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고, 회사에 휴가를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인 가족이 죽었을 때는 그걸 허용하는데 개가 죽었을 때는 다른 시선으로 본다. 여기서 출발했다.
프레시안 : 세월호, 로드킬 등 어떤 죽음과 연관된 이야기들이다. 동시대의 죽음.
구자혜 : 죽음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고, 누구나 죽는다. 다만 '왜 죽었어야 했나'에 대해 생각한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지금 만들고 있는 연극이 동시대에서 작동하지만, 내가 만드는 연극이 영원히 남기보다는 가장 빨리 휘발되기를 기대한다. 즉, 동시대가 아니면 유효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무엇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나.
구자혜 : 이 질문 되게 쌔다. 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뭐가 달라질까 딱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안 그려진다는 것에 지금 방금, 놀랐다. 왜 바로 안 그려질까, 이게. 차별이 너무나 당연시 되어 왔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 아닐까.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덜 불행해지는 걸까. 내 상상은 여기까지다.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여기까지 오기가 너무 지난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있었기에, 뭐가 달라질지 바로 그려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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