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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에게 '한번만 더 이사가자 미안하다' 이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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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애들에게 '한번만 더 이사가자 미안하다' 이랬어요"

[인터뷰] 단원고 2학년 3반 예은이 아빠 유경근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사람 몇 명 구하도 못 하고 저 큰 배가 쏙 물에 잠수해버리네요. 옴마옴마. 이거 큰 일 났구만 이거. 완전히 들어가겄어요. 아,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사람이 안 나와부네. 이거 뭐 다 죽게 생겼어.

사람 거 헬기로 몇 명 구하고 나머지 싹 들어갔어. 요거 어치케 살아나오겄어요. 나중에 안쪽에 몰려가지고 다 죽었는갑다. 아이고메. 죽겄구만, 아이고. 순식간에 아이, 요 구조도 못하고 들어가고만잉. 배가 기울어 있으면 구명조끼 입혀서 딱 사람을 빠쳐버려야지, 물로다가. 선장이 뭐하는 것이여. 옴마옴마. 다 죽고 한 사람도 못 구하네."

2014년 4월 16일 오전 전남 진도 부근 맹골수도 해상에서 476명의 승객을 태운 배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 304명이 희생됐다. 위 말은 세월호 침몰을 옆에서 목격한 어민이 진도연안 VTS와 교신하며 한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사고 소식을 듣고 진도항을 찾아 애타는 마음으로 구조 소식을 기다렸다. 침몰이 시작된 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 흘러나왔고 선원 일부가 먼저 탈출했으며 해경 또한 적절한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시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7월 14일 유족이 된 희생자 가족들은 광화문광장 남단에 천막을 설치하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세월호 천막은 같은 해 11월 19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광장에 남아 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를 열망하는 시민이 찾는 공간이 됐다.

세월호 천막이 세월호 기억 및 안전 전시공간(기억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2019년 3월이었다. 서울시가 많은 시민이 찾는 세월호 천막을 철거하는 대신 전시공간을 마련하자고 유족에게 제안하면서였다.

지난 5일, 오세훈 시장이 이끄는 서울시는 유족에게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에 따른 기억공간 철거를 통보했다. 유족은 '공사에 따른 철거에 협조하겠다'며 '공사 이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기억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담은 공간을 재조성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요구했다. 서울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난 26일을 철거 시한으로 못 박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서울시의회가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전시물과 기록물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서울시의회 건물 1층 공터에 임시 전시하기로 했다. 시의회가 나서 서울시에 세월호 기억공간 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의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유족은 시의회를 믿고 2014년 7월 이후 7년 만에 광화문광장을 잠시 떠나기로 했다. 이후 지난 29일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 세월호 기억공간 문제를 다룰 협의체 구성을 제안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김 의장이 오 시장을 만난 날 기억공간 인근에서 단원고 2학년 3반 예은이 아빠, 유경근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지난 7년 광화문광장에서의 기억, 서울시의 철거 통보 이후 있었던 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유 위원장의 말속에는 슬픔 속에서도 지난 7년 광화문광장 세월호 광장을 함께 만들고 지켜온 시민들의 역사, 그리고 이에 대한 고마움과 감동이 깊게 배어있었다.

▲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인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 선 단원고 2학년 3반 예은이 아빠 유경근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늘 있던 공간, 거점이던 공간이 광화문광장을 떠나게 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세월호 기억공간 자진철거를 결정한 이유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유경근 : 많이 바쁘죠. 광화문광장에 있는 기억공간 해체 작업에 들어갔으니까 한 일주일 동안 해체가 잘 되는지 지켜보고 왔다갔다 해야 되고요. 또 이제 해체한 골조를 다 가족협의회 안산 사무실로 가져가기로 했어요. 가져가면 어떻게 활용할지 그걸 또 논의해야 돼요. 기억공간 골조를 보관하는 이유는 여기에 수많은 시민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막 부셔서 폐기물 처리하는 것은 마음 아프고 맞지 않겠다' 생각했어요. 광화문 기억공간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도 있고요.

또 기억공간에 있는 전시물은 서울시의회 1층에 임시보관을 해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 조성공사 이후에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세월호 참사를 넘어서 이 광장에 깃들어 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광장에 녹여낼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답이 없고 의지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의회가 시청에 계속 그런 책임을 지고 역할 하도록 요청도 하고 그게 결국 안 되면 시의회라도 그 책임을 맡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어요.

아직 제가 확인을 못했지만 그러 차원에서 오늘 오전에도 시의회 의장과 오 시장이 만난 걸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어요. 그런 신뢰 때문에 서울시의회에 보관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1년 동안 (전신물과 기록물을) 쌓아놓고 보관만 할 수는 없잖아요. 임시로라도 광장 외곽 지역에 간이 형태로라도 기억공간을 다시 재조성하는 방안도 연구해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당분간 기억관 관련해서는 다각도로 일이 많이 벌어질 것 같아서 많이 바쁠 것 같아요.

(인터뷰가 있던 날 오전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은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 세월호 기억공간 문제를 다룰 협의체 구성을 요구했다. 오 시장은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인터뷰는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직전에 이뤄졌다.)

프레시안 : 기억공간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인데요.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직전에도 세월호를 모욕하려는 사람이 공사현장으로 밀고 들어와 "세월호 쓰레기 치워라", "세월호 유가족이면 똑바로 살아" 같은 혐오 표현을 하는 걸 봤는데요. 철거 공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공사와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유경근 : 어제 오늘 계속 연락하고 공사 일정 맞췄어요. 저희도 해체 일정이 길어지면서 혹시 공사 일정이 영향 받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다행히 시청과도 이야기가 잘 되서 차질 없이 진행될 것 같아요.

그런데 (기억공간 공사 방해 움직임이 있을 걸)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와서 방해할지는 몰랐어요.

여기 와서 공사하시는 분들이 기억공간을 처음 만들 때 직접 지으신 분들이에요. 그때 정말 이 분들이 정성을 다해서 만드신 거거든요. 그래서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해체도 우리 손으로 직접 정성껏 하고 싶다' 이런 뜻을 이야기하셨어요. 저희는 그 생각까지는 못했었거든요.

공사 시작하면서 이분들이 부탁한 게 있어요. 이걸 지을 때도 한 분이 다쳤어요. 왜 다쳤냐면 공사를 하고 있는데 저런(오전에 기억공간 공사 현장에 밀고 들어온) 사람들이 뭘 집어던진 거에요. 그걸 맞아어요. 공사하려고 쌓아놓은 자재를 훼손하려 하기도 했어요. 이런 일을 겪으셨기 때문에 해체하는 과정에도 그런 일이 있을까봐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또, 공사현장은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 들어오면 사고가 크게 날 수 있는 곳이에요. 사방에 마음만 먹으면 흉기가 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왔다고 일하다 싸울 수는 없잖아요.

프레시안 : 서울시나 경찰과 공사 현장 경계와 관련해 나눈 이야기가 있나요?

유경근 :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시와 경찰에 '해체하는 동안 경비가 필요하다. 공사하는 분들이 불안해서 작업을 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경찰은 '인력이 충분하지 않고 아직 구체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경계를 안 섰어요. 그런데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봤기 때문에 경찰도 아마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빨리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하고 돌아갔어요. 한 두명이라도 경찰이 배치된 거랑 아닌 건 차이가 크니까요. 경계가 있어야 정해진 일정 안에 신속하게 해체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 가능하면 하루에 한번씩 올려고 했는데 상주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저 분들이 걱정돼서…. 그래서 좀 그렇게, 여전히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네요.

▲ 27일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을 해체하고 있는 노동자. ⓒ연합뉴스

시민과 민주주의의 역사가 담긴 광화문광장 세월호 공간의 7년

프레시안 : 지난 7년 광화문광장 세월호 공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처음에 광화문광장이 세월호 가족들의 거점 공간이 된 이유는 뭐였나요?

유경근 : 2014년 7월에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저희 중 5명이 단식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천막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깔판 하나 깔고 농성했어요.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을 빨리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죠. 국회에서도 저를 포함해 5명이 단식을 했고요.

단식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시민이 오기 시작했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동조 단식을 하기도 하면서 광화문광장이 아주 큰 단식장이 됐어요. 뜨거운 여름인데 단식장에 사람이 모이니 서울시가 천막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죠. '한여름에 시민이 단식을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였어요. 주장이나 이슈는 별개로 치고요.

프레시안 : 그때 청와대 반응은 어땠나요?

유경근 : 천막촌에 대해 당시 청와대도 터치를 안 했어요. 천막을 치는데 공감한 거예요. 그때 청와대는 아예 공문으로 여기는 서울시가 맡아서 문제 없게 관리를 잘 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광화문 광장 관리는 원래 서울시가 맡고 있으니까요.

프레시안 : 세월호 천막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유경근 : 그게 한동안 이어졌죠. 당연히 분향소도 설치됐고요. 분향소가 있다 보니 농성이 끝난 이후에도 굉장히 많은 시민이 분향을 하러 광화문광장에 왔어요. 그분들에게 리본도 나눠드리고 서명도 받았죠.

그러면서 아주 자발적으로 시민들의 활동이 만들어졌어요. 어떤 분은 한쪽에서 리본을 만들고 다른 분은 서명을 받고. 외국인에게 세월호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통역을 하겠다고 한 시민도 있었어요. 그 분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어요.

처음에 저희는 농성 끝나면 집에 갈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영원히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저희 생각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시민이 모이면서 광화문광장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바라는 시민들의 쉼터, 공간이 돼버렸어요. '세월호 리본을 받으려면 여기 가야돼', '서명하려면 여기 가야돼', '여기 가면 세월호 가족들 만날 수 있어', '여기 가면 세월호 참사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궁금한 거 물어볼 수 있어' 이런 곳이 됐어요.

그러면서 여기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공간, 세월호 참사로 인해 사람들이 알게 된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가야한다는 마음이 모이는 공간이 돼버린 거죠.

프레시안 : 세월호와 광화문광장 이야기를 하면서 촛불집회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경근 : 시민이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월호 공간을 생각하는 마음이 폭발적으로 커진 계기가 촛불혁명이었죠. 2016년 10월 정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저희도 그때는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모여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놀라운 건 여기 오는 시민들이 꼭 세월호 천막을 들러서 가셨어요. 그때는 분향소가 있었으니까 분향을 꼭 했어요. 분향을 하려는데 국화꽃이 없으니까 직접 사다 가져다놓는 시민도 있었어요. 저희도 급히 국화꽃을 준비했고요.

(촛불집회에) 오는 분들마다 항상 여기 들러서 분향하고 리본 하나씩 챙겨 집회에 가고 하다 보니, '세월호 가족과 그 당시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세월호) 공간을 잘 지켰기 때문에 시민이 여기에 한마음으로 모일 수 있었다' 이런 평가도 나왔었어요.

프레시안 : 촛불집회 이후와 철거 과정을 보면, 광화문광장 세월호 공간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유경근 : 앞서 말한 평가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라요. 실제로 저희한테 "세월호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 됐다" 계속 이렇게 소리치는 거에요. 물론 세월호 참사가 국정농단의 실체를 드러나게 한 계기가 된 건 맞는데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또, 박근혜 대통령이 재판을 받는데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혐의는 하나도 없어요. 전혀. 탄핵 사유에도 인용되지도 않았고요. 우리는 오히려 그런 게 불만인데. 저 사람들은 '세월호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 됐다 저렇게 됐다' 이야기하니까 착잡하기도 우습기도 하고 그렇죠.

프레시안 : 세월호 기억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또 그 뒤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유경근 : 정권이 바뀌고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되면서 서울시가 '천막은 거두고 시민들이 위화감을 덜 느낄 수 있는, 미적인 건축물을 설치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해주니까 저희도 고마웠죠. 그러면서 기억공간이 생겼어요.

그때부터 (광화문광장 세월호 공간은) 농성장보다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곳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해졌어요. 분향소는 철거했잖요. 대신 영정 사진이 아니라 엄마들이 꽃잎을 따서 직접 만든 꽃누르미 사진, 세월호 관련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공간 중심의 공간으로 변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실제로 세월호 참사 주기 때, 혹은 세월호 참사가 이슈가 될 때 많은 분이 기억공간에 계속 오셨어요.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광화문 광장에 가면 세월호 기억공간이 있고 거기 가면 우리 마음을 표시할 수 있어' 이런 마음으로 많은 분이 오셨죠.

▲ 광화문광장에 모여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생명·안전 사회 건설을 요구하는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공간을 지켜낸 것은 시민

프레시안 : 지난 5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공사를 시작하면서 기억공간 철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유족들은 세월호 기억공간 문제를 다룰 협의체 구성을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거부하고 지난 26일로 철거 시한을 못 박았는데요. 그 사이 기억공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유경근 : 처음에 시민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어요.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한다고 통보하면 끝이야? 그거 아닌데. 여긴 우리 시민의 공간인데?' 이런 마음이 생각보다 굉장히 강하시더라고요.

5일 철거 통보를 받고 8일에 그 사실을 공개했어요. 다음날 저녁 해외동포 한 분이 시민들과 직접 문안을 조정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서명 제안을 했어요. '왜 가만히 있냐. 우리가 막자' 그렇게 한 게 하루 밤새에 더 많은 시민의 반응을 얻었어요.

이 일이 가족협의회와 전혀 관계없이 이뤄졌어요.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무슨 일을 할 때 거의 대부분 가족협의회에 먼저 연락하시거든요. '우리 이렇게 생각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보시기에 어떠시냐'고 물어요. 그러면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말씀드리는 식으로 사전에 소통을 해왔어요. 그런데 이 일은 저희도 전혀 모르게 일어났어요. 나중에 파악해보니 그렇게 진행됐더라고요.

프레시안 : 가족들도 시민들이 먼저 '기억공간을 지키겠다'고 하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유경근 : 사실 처음에 철거 통보를 받고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반대하자니 공사 방해한다고 욕 먹을 거 갖고. 그걸 이용해 프레임을 짤 거 같고. 그렇다고 이걸 받아들일 수는 없고. 말한다고 먹힐 것 같지도 않고. 며칠 동안 굉장히 답답했어요.

그런데 '아 여기를 시민들이 진짜 자신들의 공간으로 생각하는구나. 시민들의 광장으로 생각하는구나' 그런 걸 알게 된 거죠. '우리 혼자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시민들이 이렇게 하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프레시안 : 이후 어떤 활동을 했나요?

유경근 : 그때부터 뜻을 모았어요. 7월 13일부터는 1인 시위 신청을 받았어요. 정말 많은 분이 신청했어요. 피켓이 모자랄 정도로 오셨어요. 23일에 서울시가 철거 최종 통보를 하는 날부터는 하루에 12시간씩 1인 시위를 했어요. 수도 늘리고요. 이런 일을 시민과 같이 해왔죠.

또, 23일에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기억공간에 있는 물건을 들어내겠다고 쳐들어왔잖아요. 그때 몰랐으면 다 들고 나갔을 거에요. 다행히 알게 되서 막았어요. 그때부터 세월호 기억공간에 시민과 함께 상주하기 시작했어요. 그 소식을 듣고 같이 밤새겠다고 하는 분도 워낙 많았어요.

한편으로는 코로나 걱정이 되니까. 그렇게 많이 안 오셔도 말리기도 했어요. 너무 많이 오시면 있을 데도 없고 덥고. 여기서 뭘 먹을 수도 없고. 저희도 여기서는 물만 마시고 식사를 안했거든요. 때가 되면 두명, 세 명씩 순차적으로 나가서 각자 다른 식당에서 밥 먹고 했는데 시민들 오면 식사도 못하니 미안하잖아요. 그런데도 막 오시고.

프레시안 : 철거 하루 전인 25일 상황은 어땠나요?

유경근 : '내일이 철거 디데이인데 어떻게 집에 있냐'고 가족들도 당연히 많이 왔지만 시민들은 그 몇 배를 더 왔어요. 25일 밤에는 진짜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날 또 저 사람들(기억공간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막 몰려왔어요. 그날은 진짜 시민이고 가족이고 1분도 못 잤어요. 계속 밤새 확성기로 이야기하고. 펜스로 넘겨서 사진기 들이밀고. 떠들고 욕하고. 25일, 26일에는 혐오 표현에 약 올리는 표현에 어마어마하게 심했어요. 한번은 한 10분 조용해요. '뭐지?' 생각하고 있으면 '간 줄 알았지? 나 안 갔다. 잠 자지마!' 이래요.

그 와중에 가족도 그렇고 시민들고 꾹 참고 대응 안 하고. 여기서 밤새 버텨냈어요.

프레시안 : 실제로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철거를 통보한 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혐오표현이 쏟아졌습니다. 인터뷰 전에도 보니 광화문광장 옆 횡단보도 근처에서 확성기를 들고 모욕적 언사와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던데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유경근 : 25일 저녁부터 지금까지 계속 외치고 있는 거잖아요. 진치고 있으면서. 사람에 대해 모욕하는 언사나 언행을 다반사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게 언젠가는 자기한테 돌아갈텐데. 언젠가는 자기도 그런 걸 겪게 될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요. 참 안타깝기도 하고 참 씁쓸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걸 막아준 게 시민들이었어요. 25일에도 (기억공간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밀면 피켓 들고 가서 막고. 밀고 들어오려고 하면 같이 몸으로 막고. 그러면 저희들은 다니면서 막 부탁을 하죠. '싸우시면 안 된다. 저 사람들이 원하는 거다.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몸에 손대지 마시고 거친 말 하지 마세요.' 참 힘든 밤이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든든한 밤이었죠.

그 분들(기억공간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시민)이 사실 모른 척 하고 지나가도 아무 일 없는데 정말 자기 일처럼 생각하면서 가족들 한 마디라도 덜 듣게 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하시는 거 보면서 정말 고맙고 든든한 밤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이 기억공간을 꼭 지켜야겠다. 이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생각도 하게 됐어요.

프레시안 : 세월호 혐오 표현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은 혐오에 반대하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생명과 안전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활동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의사표시와 행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 기억공간과 관련한 재논의를 이끌어낸 데도 시민들의 힘이 컸고요.

유경근 : 세월호 기억공간에 대해 새로운 공간이나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사실 시민이에요. 시민들이 이 공간을 지키려 하지 않았으면 저희가 아마 다른 타협을 봤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시민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셨기 때문에 '세월호 기억공간에 대한 최종 결정 권한이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맨 앞에서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시민의 바람이 최대한 지켜지도록 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더불어민주당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만났어요. '오세훈 시장, 국민의힘이 안 한다고 해서 욕하고 끝내면 안 된다. 시장이 안 한다고 하면 민주당이나 서울시의회라도 책임져달라. 이건 정치하는 사람들끼리 싸우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이런 걸 강하게 많이 어필했어요.

▲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 일방 통보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시민. ⓒ4·16연대

"제일 중요한 건 광화문광장이 시민의 광장, 민주주의의 광장이 되는 것"

프레시안 : 여러 기억과 의미가 담긴 세월호 기억공간이 광화문광장을 떠납니다. 앞으로 세월호 기억공간을 둘러싼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유경근 : 제일 중요한 건 '공사 이후에 광화문광장이 시민의 광장,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느냐'에요. 꼭 세월호만의 광장이 아니어도 돼요. 광화문광장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세월호가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 누구나 인정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함께 했던 시민의 역사와 세월호의 역사가 어우러져야 하고 서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모든 가족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광화문광장이 세월호만의 광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광장으로서의 의미가 충분히 담겨서 시민들이 여기 오면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안 되겠구나. 계속 지켜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민의 광장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민주주의 광장을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잖아요. 시장이 '야 여기 민주주의 광장이야'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런 광장을 만드는 과정에 시뿐 아니라 시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시의회와 실제로 광화문광장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봐요.

세월호 기억공간에 대한 협의체 구성을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저희만 들어가서 저희하고만 협의하라고 할 생각이 없어요.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협의체에 누가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시민의 직접적인 바람이 들어오고 같이 협의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해요.협의체를 통해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광장을 만들어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프레시안 : 협의체와 관련해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유경근 : 이게 끝이 아니잖아요. 공사를 하는 것뿐이잖아요. 세월호 기억공간을 해체하지만 건물을 넘어서 더 큰 광장을 만들기 위한 시작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생각하시고 정말 적극적으로 그 과정에 관심 갖고 참여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저희도 힘을 받아서 가장 앞에서 시나 시의회와 협의하거나, 필요하면 싸우거나 이런 일을 힘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아픈 이야기겠지만 이번 일을 겪은 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유경근 : 아이들에겐 할 말이 없죠….

그저께 기자회견 마치고 해체할 때 저기(기억공간) 인사하러 들어갔을 때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아이고. 애들아. 이사 한 번 더 가자' 이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좋게 생각하자. 더 좋은 집으로 가려고 이사 가는 거라고 생각하자. 한 번만 더 이사 가자. 미안하다.' 이랬어요…. 이랬어요….

기억공간 철거 소식을 듣고 온 시민들도 공사가 끝나면 세월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니까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여러 가지 의견과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공통적으로 다 이야기하시는 게 공간이 됐건 설치물이 됐건 프로그램이 됐건 거기에는 아이들, 희생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저희가 아이들 꽃누르미 사진을 안산으로 안 가져가고 서울시의회로 갖다놨잖아요. 사실 엄마들은 안전하게 안산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서울시의회에서 제대로 보관이 될지 전시가 될지 불안한데 그냥 모든 게 다 결정될 때까지 안산에 좀 있다 다시 오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시민들은 '세월호를 기억한다고 하면 중심에는 항상 희생자가 있어야지. 우리가 희생자를 치우고 다른 걸 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러면 시의회에 임시로 간이 기억공간을 만들더라도 거기에 희생자들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족들과 의논했고 시의회로 가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시민들이 우리 아이들을 비롯해서 희생자들 이야기를 많이 하고 기억하시는 걸 보면서 많이 고마웠고 '우리 아이들도 서울에 남아있더라도 덜 외롭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애들 앞에는 미안한 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고….

▲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관계자 및 세월호 유가족들이 27일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 공사가 진행 중인 세월호 기억공간 한켠에 쓰인 편지. 글 옆에 철거 작업의 흔적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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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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