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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새벽, 내일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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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새벽, 내일의 새벽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새벽잠이 없어졌다. 꼭두새벽 3시, 4시에 시도 때도 없이 잠이 깬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계속 뒤척이다 아침을 맞는 날이 허다하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새벽잠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 되었으리라! 자라나는 학생은 아침잠이 많아 걱정이고, 나이 든 이는 아침잠이 없어서 고민인데, 그게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새벽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개인의 생체 리듬 변화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새벽의 사회적 이미지도 세월의 풍화와 더불어 조금씩 변해가는 듯하다. 예전에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설렘이 담긴 정갈한 단어로 다가왔다. 학생 때 배운 시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하면, 새벽은 어둠이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을 채비를 서두르는 경이로운 시간이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을 기대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새벽은 ‘시대의 어둠’과 대비되는 희망의 언어이기도 했다.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언론인 김중배 선생이 펴낸 칼럼집 제목처럼, 새벽은 어둠의 질곡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려는 염원과 희망, 각오가 응축된 단어였다.

얼마 전 대학생 상대 글쓰기 강의에서 ‘새벽’을 제목으로 작문 숙제를 내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대다수 학생의 글에 나타난 새벽의 이미지는 어둡고 침울하고 쓸쓸했다. 희망보다 불안, 설렘보다 고민, 낙관보다 절망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이들에게 새벽은 ”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시간대“이자 ”하루를 제대로 끝마칠 힘도 없는 무기력을 확인시켜주는 시간“이다. 새벽이란 단어의 뜻에 대해서도 ”밝고 찬란한 시기가 오기 전 가장 힘들고 버티기 어려운 순간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풀이한 학생이 많았다. ”너무 어두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새벽 시간을 희미한 아침 빛을 쫓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자신들의 자화상을 돌아보며 자조했다. 어둡고 추운 새벽을 지나면 따뜻하고 찬란한 아침이 찾아올까. 이런 물음에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새벽부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할 엄혹한 생존경쟁에 내몰릴 수 있는 나의 존재를 깨닫는 시간“을 반추하며 미래를 비관적으로 예감한다.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는 예언처럼 우리 사회는 억압과 질곡의 세월을 뚫고 새벽을 맞이했다. 이 땅의 앞선 세대, 특히 진보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큰 자부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 새벽은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개벽’의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와도 금빛 태양이 빛나는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리라는 우울한 예감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세대 간에 가로놓인 새벽 알레고리의 이런 아득한 간격, 이것이 좁게는 진보의 위기이자, 넓게는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고민의 상징적 단면이 아닐까.

새벽은 매일 새롭게 열려야 한다. 어제 새날이 밝았다고 오늘 저절로 새날이 열리지는 않는다. 어둠이 물러가도 새로운 어둠은 끊임없이 몰려든다. 어제의 새벽을 열었다는 자부심에 안주하면 내일의 새로운 새벽은 오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새벽을 열려는 각고의 노력이 없으면 다시 짙은 어둠에 갇히고 만다. 어둠의 근원인 암소(暗素)의 농도와 위력도 예전보다 더욱 강해졌고, 실체마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 어떤 이는 어둠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빛의 근원이라고 엇갈리게 말하는 세상이다. 어둠에 대한 진단부터 이렇게 다르니 어둠을 몰아내는 해법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한국인의 삶을 생존, 공존, 독존(나홀로 즐기는 삶)이라는 세 단어에 대입해 한국 영화의 흐름을 분석한 글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정민아, <불안사회의 거울, 2017년 한국영화의 경향>).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생존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겨왔으나 촛불혁명 이후 점차 공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이 영화 연구자는 짚었다. 세월호와 촛불을 경험하면서 대중은 돈이 아니라 사람,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공동체, 정치 혐오가 아니라 정치 참여, 자기비하로 인한 우울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애도 작업이 훨씬 가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독존)을 소망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강해졌는데, 이런 공존과 독존의 삶의 모습이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공존주의가 아니라 더 극심한 생존 최우선주의 사회로 질주하고 있다. 촛불혁명 이후 ‘공존 사회의 새벽’을 열어갈 기회를 맞았는데도 오히려 생존경쟁의 룰마저 무너진채 ‘반칙’이 난무하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니 오늘도 ‘우울한 새벽 에세이’를 쓰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위로가 될까. 새벽녘 쏟아지는 정갈한 별빛을 우러르며 기성세대의 가슴 속에 초각성의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할까. 지금 앞선 세대는 젊은층의 새벽 우울증세를 얼마나 심각히 인식하고 있을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글을 쓰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어둠이 엷어지고 있다. 그 옛날 빛 한 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선각자들은 새벽이 분명히 도래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늘의 어둠 속에서도 그분들의 어법을 따라 말해 보련다. 젊은이여, 새벽은 열린다! 희망이 깨어 있으면, 희망의 새벽은 열리고야 만다. 그 희망이 ‘홀로 희망’이 아니라 ‘함께 희망’일 때, 나의 꿈이 또 다른 누군가의 새로운 새벽을 여는 꿈일 때, 우리의 새벽은 더욱 힘차게 열리리라. 어느덧 동녘 하늘에 먼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이 글은 천안에 있는 남서울대에서 발행하는 교내 신문에 쓴 칼럼이다. 올해 3월부터 이 대학에서 매스컴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학교신문 기자가 원고 부탁을 해왔다. 당시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직후였는데, 그 원인의 하나로 젊은 유권자의 이반 현상 등이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신문사 은퇴 뒤 대학교 두어 군데에서 강의를 하며 젊은 학생들의 의식과 정서를 접하다보니 새롭게 느낀 점이 많았던 터라 이를 ‘새벽’이라는 단어에 대입해 써본 글이다. 그러나 대학생들을 주독자로 하는 학내 신문의 성격상 여러모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의미를 최대한 배제하며 쓰다 보니 변죽만 올린 글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상황은 더욱 변했다. 젊은층에 대한 탐구 분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니 이 글도 이제는 구문이 되었다. 야당에서는 30대 당대표가 출현했다. 이런 현상은 과연 새로운 새벽을 여는 조짐일까. 이제 우리 사회는 돈이 아니라 사람,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공동체, ‘홀로 희망’이 아니라 ‘함께 희망’이 숨쉬는 사회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오히려 반대인 듯하다. 공정, 실력 등의 단어가 난무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물구나무선 가치에 대한 숭배에 가깝다. 우리 주변을 감도는 암소(暗素)의 위력도 더욱 강해지고 있다. 새로운 새벽은커녕 오히려 과거의 어둠으로 빠져들 조짐마저 보인다.

소설가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 발문에서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다”는 유명한 글귀를 남겼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말로써 정의를 다투고, 글로써 세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고 싶다. 거짓과 허상의 언어가 어지러이 휘몰아치는 이때, 말로써 정의를 세우고 글로써 세상을 기어이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다지려 한다. 새벽은 어둠과 별빛, 햇빛이 교차하는 시점이다. 거짓과 허상을 걷어내는 별빛의 언어로, 세상을 밝힐 금빛 태양의 시대를 고대하며 새벽 에세이 글줄을 엮어나가려 한다. 성원을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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