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남' 현상은 실재하는가? 그렇다. 그럼 '이대남' 현상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남성들의 절실한 분노이고,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각종 '작전'이며, '이대남'을 핑계 삼아 페미니즘과 젊은 여성들에 대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는 40-50대들의 내면화된 여성혐오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가부장제 사회의 관습적 반응이다. 결국 이 모든 걸 합친 '이대남' 현상은 백래시의 다른 이름이다.
수전 팔루디는 1991년 작 <백래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사회적 위협으로 보면서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온갖 비방이 특히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펼쳐지는 것을 성평등을 향한 진보에 대한 반격, 즉 백래시라고 규정했다. 팔루디는 1980년대 미국에서 언론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 교육, 정치, 패션, 미용, 종교,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펼쳐졌던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분석한다. 읽다보면 "21세기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사례들이 낯설지 않다.
흥미롭게도 <백래시>에도 "화가 난 젊은 남성들"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뉴라이트가 부상하고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임금이 하락하고, 고용이 유연해지며, 복지는 "거지들이나 좋아하는 것"으로 낙인찍히는 와중에 주택 가격에 대한 불안감이 상승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문제의 원인으로 여성이 지목되었다. 특히 페미니스트와 젊은 여성들은 손가락질만 하면 모든 원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만능 희생양이었다.
<백래시> 이후 팔루디는 이 문제에 좀 더 파고들기 위해서 젊은 남성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젊은 남성들이 화가 난 건 비단 경제적 취약성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남성성의 위기'라는 불안이 함께 있었다. 남성다움의 가치는 하락하고 가부장제의 전통적 가치가 붕괴했을 때, 그리하여 더 이상 '강력한 아버지'의 형상을 모델로 삼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청년들은 박탈감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이게 그의 두 번 째 저서 <스티프드: 미국 남성의 배신>(1999)의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혼란을 다잡는 계기가 2001년 9월 11일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작업인 <테러 드림: 포스트 911 미국의 신화와 여성혐오>(2007)에서 팔루디는 9/11 이후 미국 사회가 어떻게 남성영웅담을 통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다시 세움으로써 혼란의 시기를 수습하려 했는지 추적한다. 미국 사회는 9/11을 다시 한 번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의 계기로 삼았다. 남성성과 여성성 및 성역할을 둘러싼 미국의 전통적인 신화는 남성을 카우보이 영웅의 자리에 다시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와 함께 여성은 언제나 '연약한 피해자'이지만 어머니일 때만은 호랑이 우리에라도 뛰어드는 강인한 존재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역사적 흐름 안에서 2010년 대 말 브로플레이크(broflake)가 등장했다. 이 표현 자체는 형제(brother)와 눈송이(snowflake)를 합성한 신조어로 "자신의 가부장적 시각과 충돌하는 진보적 사고방식에 쉽게 화를 내는 남성"을 뜻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2017년 이 단어를 올해의 주목할 단어로 선정했다. "젊은이들의 행동과 영향력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문화적·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일컫는 신조어 "유스퀘이크(youthquake, youth+earthquake)"와 함께였다.
남자가 가족임금을 벌어 가장 노릇을 하고, '내 여자'가 집에서 온순한 가정주부로 머물렀던 '좋았던 옛날'을 낭만화 하는 것은 미국의 우경화의 결과이자 동력이었다. 팔루디는 2018년에도 여전히 미국의 젊은 남성들이 온라인에서 여성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거짓말을 놀이 삼아 유포하고 사이버 불링을 일삼으며 '남성의 권리'를 말하는 그룹을 만들어 집회를 연다는 점을 지적한다. 80년대 백래시와 비교했을 때 활용하는 미디어와 표현의 양상만 달라졌을 뿐 근본적인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수 이민자와 함께 여성들이 그들의 기회를 '훔쳐갔다'고 믿는 남성들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런 경로는 문화의 시대이자 영페미니스트의 시대였던 1990년대를 지나서 IMF라는 경제적 재난을 맞이했던 한국이 지나온 과정과 비슷하다. 한국은 포스트 IMF의 위기와 혼란을 "아빠 힘내세요"와 "신현모양처론"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언론과 정치권이 주목하는 '이대남'과 미국의 '브로플레이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거울상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하태경, 이준석 등 '해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상황을 확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행기적인 현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사례들을 끝도 없이 나열하는 <백래시>는 의외로 위안을 준다. 여자들이 꽤 잘 싸우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래시는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온 일종의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된다.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백래시의 시간을 '존버'하여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 왔다.
나는 이 시간을 가능한 짧게 만들기 위해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제 4차 건강가족기본계획을 제도적으로 실천하고 이 안에 들어있는 철학을 사회적으로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번 계획은 부성우선주의를 폐지함으로써 부계혈통주의를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아버지를 가족의 주인(家長)으로 여기는 낡은 사고방식은 남성의 경제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을 옥죄는 동시에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자연화한다. 가족관계에 대한 상상력 변화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뒤흔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터다.
둘째는 노동자의 신체를 제대로 보고 사회적 안전망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언택트'로 인간보다 똑똑한 AI들이 모든 일일 처리할 것처럼 보이는 힙한 디지털 산업조차도 인간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 노동자들이 매일 매일 사망한다. 산재로, 불안과 모멸을 견디지 못해서, 삶의 무게 때문에, 혹은 가혹한 폭력 속에서.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늘 이렇게 쓴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하자고.
20대 남성, 소위 '이대남' 현상이 정치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20대 남성과 여성의 표심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0대 남성의 '보수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최근 GS25 홍보물을 둘러싼 소위 '남성혐오' 논란은 분노한 청년세대 남성들의 안티 페미니즘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대남' 현상 자체가 실체가 없다거나 일부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는 목소리 역시 존재한다. 과연 '이대남' 현상의 실체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의 현상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20대 남성 당사자, 여성주의 학자, 사회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총 6편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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