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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 현장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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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근리 학살' 현장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다

[손호철의 발자국] 33. 충북 영동 : 미군의 '미라이 학살'은 오래 전 노근리에서 시작됐다

"야~ 저 다리 아름답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아치형의 쌍굴로 이루어진 다리가 우리를 맞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쌍굴의 기둥과 그 옆의 벽면에 하얀 페인트로 무수히 많은 원과 삼각형을 그려 놓은 것이 눈에 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총탄 자국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대표적인 미군의 민간인 학살인 노근리 학살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한국전쟁 중 산청·함양·거창 학살, 보도연맹 학살 등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여론화됐지만,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최근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 아름다운 쌍굴은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이 피난민들을 집단 학살한 현장으로, 벽에 그려진 흰 원들은 총탄 흔적이다. ⓒ손호철

"AP통신의 최상훈과 헨리 마르타 기자." 2000년 4월 세계적인 언론상인 퓰리처상은 1999~2000년 탐사보도상으로 세계적인 뉴스통신사 AP가 1999년 6월에 보도한 '한국전쟁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선정했다. 50년 간 어둠에 묻혀 있었던 노근리 학살 사건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

노근리 학살에서 부인과 아들, 딸을 잃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온 정은용‧정구도 부자는 이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답사 때 만난 정구도 노근리 평화기념관 관장은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적인 충청도 영동의 시골지역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미군 범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그간의 어려웠던 싸움을 회상했다.

노근리 학살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기에 퓰리처상은 이에 대한 보도에 권위 있는 탐사보도상을 준 것일까?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노근리 쌍굴다리 근처에서 미군이 이 지역 피난민에게 폭격과 무차별 사격을 가해 250명에서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이다.

민간인 학살을 일삼았던 독일군, 일본군과는 질적으로 달리하는 '정의의 사도'의 이미지를 가진 미군이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을 했다고 해서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1968년 3월 베트남 미라이 마을에서 발생한 '미라이 학살'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18년 전인 1950년 7월 한국 영동 노근리에서 이미 미군들은 '한국판 미라이 학살'이라고 할 수 있는 노근리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노근리 학살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고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침 소식에 참전을 결정하고 1950년 6월 30일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을 지시했다. 스미스 부대가 선발대로 도착, 7월 5일 평택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했다. 천안, 조치원, 대전 등에서도 북한군에게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윌리엄 딘 소장이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은 7월 21일 영동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노근리 근처의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은 한여름 더위 속에 밭을 매고 있었다.

이틀 뒤인 23일, 미군은 주곡리에 소개 명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다.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500여 명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가고 있었는데, 미군기가 나타나 갑자기 폭격을 가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

놀란 피난민들은 폭격을 피해 노근리 쌍굴다리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 쌍굴 앞뒤에 기관총부대를 배치해 완전 포위했다. 미군은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 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 특히 아이들은 배고픔에 울어댔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나온 사람들은 집중 사격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0여 명이다.

▲ 노근리의 학살 상황을 설명해 놓은 노근리평화공원 기념관의 상황도 ⓒ손호철

앞장서서 지역주민들을 피난시키던 미군은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이 같은 어이없는 짓을 한 것일까? 정구도 관장의 노력과 AP의 심층취재에 의해 이에 대한 부끄러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연이은 패배와 딘 소장 사태로 충격을 받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미국은 피난민 속에 위험분자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25일 밤 주한 미 대사관에서 한국군 관계자들과 피난민 대책회의를 열고 피난민을 "구호의 대상이 아니라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피난민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간 밝혀진 문서 등은 단편적이나마 미군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피난민에 대한 공습 지시에 대해 7월 25일 5공군 작전참모부장이 "왜 피난민을 공격하는가? 피난민 공격금지 지침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이는 미 공군기가 피난민을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6일에는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의 본국 보고사항에 "이 시각부터 피난민들의 미군 방어선 통과를 금지한다. 방어선에 접근할 경우 경고사격하고 총격을 가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소총수 조 잭먼의 증언은 너무도 생생하다. "소대장이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면서 총을 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들이 군인인지 뭔지, 어른인지 어린애인지, 몇 명인지 개의치 않고 무조건 쐈습니다. (중략) 민간인에게는 총을 쏠 수 없다고 하자 45구경 권총을 내 머리에 겨누고 말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시 즉결처분할 수 있다.'"

물론 노근리 사건은 한겨레 등 국내 언론에 이미 여러 번 보도된 바 있다. AP 보도 후 정부 등이 난리를 치자 한 국내 언론인은 이를 '사대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한 것이다. 국내 보도는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었던 반면, 최 기자 등은 국방문서연구위 등을 조사해 문제의 부대가 제1기갑사단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정보공개법에 의해 당시 근무했던 수 백 명의 병사들의 명단을 확보한 뒤 이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조 잭먼 등 12명의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이를 위해 미 문서보관소의 박스 수 백 개의 봉인을 최초로 열고 자료를 뒤지는 등 1년 이상 심층취재를 했다. 이처럼 가해자의 증언이 있었기에 노근리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 수 있었다. 특히 편집국장은 문제의 기사가 정부 문건보다는 관련자의 증언에 기초했기 때문에 보도 할 수 없다는 편집상무와 경영진을 설득해 보도를 이끌어냈다.

▲ 노근리 사건이 AP 보도로 국제적 이슈가 된 과정을 설명한 기념관 전시물 ⓒ손호철
▲ 노근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정은용 씨가 쓴 노근리 실화 소설 ⓒ손호철

AP 보도가 나가자 한·미 정부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조사 작업을 벌였고 2001년 각각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여러 단편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사살명령서가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했다. 대신 이례적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가려낼 수 없었지만 노근리에서 무고한 피난민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유감 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추모탑 건립을 지원하고 추모장학기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조사 결과와 유감 성명에 대해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고 반박문을 발표했다.

미국은 추모탑 건립 지원금도, 장학금도 노근리만이 아니라 진상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모든 민간인 희생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정구도 씨 등 노근리 피해자들은 이 같은 제안은 다른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보상 기회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사실 노근리는 한국전쟁 중 미국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중 빙산의 일각이 불과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진상규명을 요청한 사건만 모두 368건이나 된다. 또 이 같은 학살은 미군이 한국군과 함께 논의한 피난민 대책회의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에도 공동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 관장의 설명이다.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노근리 학살에 유감을 표명한 발표에 대한 전시물 ⓒ손호철

이 같은 과정을 상세히 적어놓은 노근리 평화공원기념관의 설명문 앞에 서자, 다른 희생자들을 위해 눈앞의 물질적 혜택을 거부한 노근리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숭고한 정신에 나도 모르게 존경의 묵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노근리 희생 심사 및 명예회복 특별법을 제정해 희생자 심사를 하고 노근리평화공원을 조성했다.

여러 관련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노근리평화공원 기념관을 나와 쌍굴다리로 가는 야외 공원에는 이들을 학살한 미군의 장총과 피난짐을 지고 피난을 가는 피난민들을 형상화한 조각들이 우리를 맞는다.

▲ 노근리에서 학살당한 피난민들을 형상화한 야외조형물 ⓒ손호철

그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노근리의 원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자, 갑자기 몇 년 전 한‧베평화재단을 따라 베트남에 가서 만났던 응우엔 티 탄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2. 강원도 춘천, <프레시안> 2021년 4월 26일자 참조). 한국군에게 어머니와 오빠, 동생 등 일가족을 잃고 8살 어린 나이에 자신도 부상을 당한 채 살아남은 그는 "왜 한국군이 나까지 죽이지 않아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만들었느냐"고 통곡을 했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고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도 미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고 남겨놓았을 뿐 아니라 정보공개법을 통해 공개했다. 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베트남에서 일으킨 '베트남의 노근리' 사건들은 어떠한가? 우리 정부는 이와 관련된 자료를 공개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증언을 해줄 한국군, 즉 '한국의 조 잭먼'들은 없는 것일까? 여러 여건이 다르지만, 가해 병사들을 심층 취재해,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세상에 알리는 '한국의 AP'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이 같은 자문과 부끄러움을 안고 노근리를 떠났다.

▲ 중부 베트남에 설치되어 있는 한국군피학살민간인 위령비. '베트남의 노근리'라고 할 수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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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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