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보은. 한 곳은 충남, 다른 한 곳은 충북의 운치 있는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슬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두 곳은 19세기 말 조선 민중의 꿈을 상징하는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농민군이 최후의 전투에서 처절하게 산화한 곳이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 살육이었다." 우금치 전투에 대한 한 연구자의 평이 다. 우금치는 논산에서 공주로 올라가는 언덕을 말한다. 이곳을 관광명소로 키우기 위해 커다란 주차장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인 입구에서 언덕으로 올라가 '동학혁명군위령탑'을 보고 있자, 이 평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실제 전투 장소를 답사하기 위해 언덕위로 더 올라가자 공주여성인권회에서 걸어놓은 '평화. 평등. 존중'이라는 깃발이 나타났고, 언덕 정상에 서서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버려진 푸른 숲과 적막 속에 동학군의 마지막 신음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동학군들은 논산에서 우금치로 올라오다가 학살당했는데, 위령탑은 우금치 넘어 북쪽, 즉 공주와 서울 쪽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문득 짚신이 생각났다. 소설가 김성동 씨가 동학에 대한 글 '짚신과 워커'’에서 잘 지적했듯이, 근대적인 군화를 신은 일본군에 대항해 동학군은 엄동설한에 짚신을 신고 꽁꽁 언 길과 얼음판을 건너 남도에서 우금치까지 행군해 와서 싸웠다. 무기가 아니라 이미 신발에서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개틀링 건. 미국 남북전쟁에 도입되어 위력을 발휘한 세계 최초의 기관총이다. 1894년 11월 20일 우금치 언덕에는 일본군 소령의 지휘 아래 관군이 바퀴가 달린 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언덕 아래 개미떼처럼 모여든 동학군의 공격 개시를 기다렸다.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수만이 화승총으로 무장했고 나머지는 죽창을 든 동학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짚신을 신은 언 발로 언덕을 달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사!" 지휘를 맡은 일본군 소령이 지시를 내리자 기관총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농민군들은 꽃잎처럼 쓰러졌고 자주와 해방을 염원하던 민중의 꿈과 자생적인 근대화의 꿈도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농민군은 2만 명이었던 반면, 조일연합군은 일본군 200명과 관군 3200명 등 총 34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대식 무기 앞에 2만 명이라는 수적 우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기관총 앞에서 단순한 수적 우위에 기초한 인해전술식의 공격 전략을 편 것이 패착이었다.
주목할 것은 학살무기였던 개틀링 기관총을 일본군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으며 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이 거액을 주고 수입한 무기였다는 점이다. 농민군들은 한심한 봉건왕조가 자신들의 고혈을 수탈한 피 같은 돈으로 장만한 현대무기에 의해 꽃처럼 쓰러졌으니,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수적으로도 일본군은 200명에 불과하고 3200명은 관군이었으니, 농민군을 학살한 주범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왕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금치 학살에 농민군 학살의 또 다른 축인 민보군(양반들이 동학도를 처단하기 위해 조직한)이 함께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 개혁적이었지만 자주적이지 못했던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실험과 자주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낡은 봉건제를 수호하려는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자주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자생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동학 농민혁명은 단순히 일본이 아니라 '조선왕조·일본·양반의 삼각연합'에 의해 좌초됐고, 우금치 전투는 이에 마침표를 찍은 것에 불과하다('손호철의 발자국' 10. 정읍 위정척사, <한국일보>, 2020년 10월 12일 참조).
우금치는 동학의 최후의 격전지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찾아가 봐야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문제가 됐던 '역사의 정치화', '역사의 정치적 이용'이다. 구체적으로,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박정희 독재, 특히 유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학혁명이 평등과 자유를 지향했다면,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짓밟았고 유신 역시 이를 짓밟았던 '정반대 운동'이기 때문에, 동학과 박정희, 그리고 유신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위령탑 건설을 지원해 준 것이 박정희이며, '동학혁명군 위령탑'도 박정희가 쓴 글씨다.
특히 이 탑은 유신 1주년인 1973년에 세워졌고 비문에는 5‧16쿠데타와 유신이 동학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쓰여 있다. 대표적인 친독재 어용지식인인 이선근이 쓴 비문은 민주화이후 운동세력이 '5‧16혁명', '시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이란 글씨를 돌로 쪼아버려 읽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읽어보면,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유신이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라니, 동학에 대한 모독도 이런 모독이 없다.
사실 잊히고 반란으로 치부되던 동학을 명예회복시킨 사람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선산지역의 접주로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의 뜻을 살려, '난'으로 불리던 동학을 '농민혁명'으로 승화시켰고, 1963년 황토현에 최초의 동학기념물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건설을 지원한 것이다.
박정희가 동학의 재평가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하지만(박정희가 이처럼 갑자기 동학을 띄우자, 학계 역시 허겁지겁 동학 재평가 작업에 들어가면서 기초연구 없이 일본군이 작성한 공초문서 등에 크게 의존해 동학 연구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는 비판도 있다), 이를 5‧16쿠데타, 유신 등의 정당화에 이용한 것은 잘못이다.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동학 이용해먹기', '동학 능욕'의 절정은 전두환이다. 그의 광주 학살은 일본군의 우금치 농민 학살과 별 차이가 없는 잔인한 학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을 잡자 전봉준 유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고, 1983년 황토현 전적지 일대 4만5000 평 부지에 '황토현 기념관'을 세웠다. 특히 그곳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은 대표적인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맨상투 모습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전봉준 사진을 모델로 만들어, 장군 같은 풍모가 아니라 '죄수의 모습'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우금치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내륙으로 들어가면 속리산 입구인 보은이 나온다. 이곳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최시형의 북접농민군이 장수, 진안, 영동을 거쳐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집결했던 곳이다.
때마침 폭설이 내렸고 장거리 행군에 지친 농민군은 다음 전투를 위해 북실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주에서부터 이들을 추적한 일본군은 파수병들을 살해하고 기습공격을 해 2600명을 몰살하고 말았다. 옛 북실마을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언덕 꼭대기에는 이들의 혼을 달래는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죽창을 든 농민군이 쓰러진 동료를 안고 있는 위령탑 앞의 조각을 보고 있자 가슴이 메어졌다.
우금치와 보은 답사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며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보은 동학기념 조각에 쓰인 한 이름 없는 동학 농민군의 일기였다.
"늙으신 어머님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온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 떠나기를 망설이는 나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던 아버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가서 저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權鬼,권력의 귀신)들을 물리쳐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두고 장차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되는 세상을 열어라.' (중략) 우리는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 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동학농민군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찢겨진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숫한 까마귀떼를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처절한 일기는 보은으로 이어진다.
"석 달 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중략) 12월 18일 꼭두새벽,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마다 까마귀에게 눈알 빼앗기고 심장 파헤쳐진 채 나뒹굴던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아 수많은 농민군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그대들을 따라 저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 산하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이제 해방이 됐다고,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들'은 물러나고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된 세상이 온 것인가?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 조선 산하 굽이굽이 꽃불 밝히는 눈부신 봄이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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