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격동의 개화기, 우리 사회 지도자 중 가장 처참한 말로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최익현 등 많은 선비들이 곡기를 끊고 자진순국을 했지만 그는 그래도 ‘양반’에 속한다. 전봉준은 교수형을 당했고 형제들도 연좌제로 사형을 당했으며 후처는 노비가 됐다.
동학 혁명군 중 가장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사람은 김개남이다. 그는 전주에서 처형되어 양반들이 다투어 내장을 나눠 씹어 먹었으며 그의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에 효시 된 뒤 전국을 돌며 전시되었다고 한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전봉준과 김개남보다 더 비참한 경우도 있다. 암살된 뒤 능지처참까지 당해 머리는 효수되고 갈가리 찢긴 몸들은 전국을 돌며 전시된 사람이다. 생모와 누이는 음독 자결했고, 생부는 투옥 후 처형됐으며, 동생이 옥사했고 부인은 간신히 관군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한마디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그가 누구이기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이처럼 온 집안이 화를 입은 것인가? 그는 바로 김옥균(1851~1894)이다. 김옥균. 그야말로 개화기 때 사회 지도자 중 가장 처참한 말로를 기록한 사람일 것이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외딴 곳에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하나 있다. 작은 비가 세워져 있는 이곳이 김옥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로, 마을은 불에 다 타고 빈터만 남아있다.
나름 명문 양반집 장남이었던 그는 6살 때 먼 친척이자 세도가였던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1870년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되어 개혁적 인사들을 만나고 일본에서 들여온 서양문물을 접했다. 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2년 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개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박영효, 서재필 등과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조직해 일본에 가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개화의 길에 대해 연구했다. 대원군이 임오군란과 관련되어 청나라로 끌려가자 승승장구했고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려하니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고종에게 올렸다. 이후에도 수신사로 일본을 드나든 그를 일본은 자기들의 군비증강이 조선의 독립을 돕고 아시아 평화를 도모하는 길이라고 설득하는 한편 조선에 차관을 주선해주겠다고 하는 등 그를 친일파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분제 철폐, 인재의 공평한 등용을 위한 공채제도, 무상 토지분배, 근대공업 발전, 전국에 신식학교 건설, 자주국방력 강화, 종교의 자유 허용, 조선의 영세중립국화 등 포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관념적으로는 그러했지만, 실생활은 그 역시 신분제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세도가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동지들은 시종처럼 부려, 이들이 항의하자 김옥균이 사과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재정 위기 타파를 위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에 실패하고, 박영효 등이 개설한 서양식 군사학교와 자신들이 주장해서 만든 최초의 근대적인 신문인 <한성신보>가 왕비 민씨(명성황후) 일가의 압력으로 폐지되는 등 수구파가 득세하자 정계를 은퇴하고 칩거한다. ('고종황제', '명성황후'는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쓴 명칭이다. 갑신정변은 그 이전의 일이라는 점에서 '왕비 민씨'로 표기했다. 또 비극적 죽음과는 별개로 왕비 민씨와 그 일가는 한말 비극의 주범으로 꼽힌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가까운 조계종 정문 앞 오른 쪽에는 울긋불긋한 단청을 한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으로 근대적인 우편 업무를 담당했던 우정총국이다. 부속 건물은 다 불타 없어졌고, 본청 건물만 남아있다.
1884년 10월 17일, 이곳에서는 우정총국 준공식이 열렸다. 축하연이 무르익자 김옥균은 미리 거사를 상의해온 일본 공사관에게 오늘 거사를 할 것이니 군대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고 서재필에게도 병력을 동원해달라고 귀띔했다. 갑자기 북쪽 건물에서 불이 났고 참석자들이 건물 밖으로 피신을 하자 매복하고 있던 개혁파 군인들이 수구파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이 시작된 것이다.
김옥균은 궁전으로 달려가 미리 이야기해 놓은 고종과 왕비 민씨 등을 모시고 경우궁으로 이동했고, 궁 주변에 일본군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왕명으로 입궐한 척사·수구파를 처단하고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능력에 의한 인재 등용, 조세 개혁, 농민 부채와 쌀 탕감 등 개혁안을 발표했다. 특히 전국민의 단발과 과거 폐지 등 혁명적인 세부 개혁안도 발표했다. 그러나 왕비 민씨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출동하고 수적 열세에 놓인 일본군이 처음 약속과 달리 철수하면서 갑신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하고 만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김옥균과 개화파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개화파는 낡은 신분제를 유지하려 했던 위정척사파나 수구파와 달리 신분제 타파를 주장하는 등 그 방향은 옳았다. 그러나 이를 일본의 도움으로, 그것도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이루려고 한 것은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호시탐탐 조선을 먹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의 군대를 빌려 혁명을 하겠다고 생각했으니, 희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학 편('손호철의 발자국' 8. 동학의 도시 전북 정읍, <한국일보> 2020년 9월 28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구한말의 위기에 3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위로부터의 대응은 선비들이 중심이 된 위정척사의 움직임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움직임이고 마지막 대응은 밑으로부터 농민들이 중심이 된 동학 농민혁명이다.
이 중 개혁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주적이었던 것은 오직 동학 농민혁명뿐이었다. 위정척사파는 '자주적'이었는지 모르지만('청나라 중심의 기존질서'를 유지하려하거나 '소중화주의'에 빠져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의미에서 자주적이지도 않았지만), 시대착오적인 신분제와 봉건적 질서를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퇴행적인 움직임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것은 개화파이다. 최소한 신분제 파타 등 세계사적 흐름을 따라가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이를 외세를 통해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희극적이다.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삶은 별 의미가 없다.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해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인으로 변장한 채 일본군의 호위 하에 인천항으로 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일본 고위층과 접촉하며 조선으로 쳐들어가 외척 민씨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고종과 왕비 민씨는 여러 차례 일본으로 자객을 보냈다.
일본에서 찬밥신세가 되자 그는 청나라의 실세인 이홍장을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상하이로 간다. 그러나 이홍장을 만나기 전 한국에서 온 자객 홍종우가 쓴 총알을 맞고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서울로 보내져 양화진(합정동)에서 능지처참된 뒤 목은 '大逆不道(대역부도) 옥균'이라는 깃발과 함께 효시되고 조각난 신체부위도 전국에 전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복권이 됐다.
그의 묘는 일본 도쿄 중심부에 있는 아오야마 공원묘지 구석 외국인묘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의 묘는 세 군데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시절 "조선의 감시를 피하려면 주색에 빠진 척 하라"는 일본 지인의 충고 등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다. 그중 한 내연의 처가 남대문성을 넘어가 장대에 달린 김옥균의 목을 내리고 한강물에 씻어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의 진정사에 묻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아오야마 외인묘역이다. 김옥균이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을 당했을 때 그의 일본인 친구들이 그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 그리고 의관을 챙겨 아오야마에 묻었다. 그러나 그의 양아들인 김영진이 이를 수습하여 군수로 있던 아산에 묻었다. 따라서 현재 아오야마에는 사실 위패만 있다고 한다. 충남 아산시 아산리에 가면 언덕 위 무성한 숲속에 낡은 석물과 함께 무덤이 하나 있다. 양아들이 아오야마묘에서 머리카락 등을 수습해와 묻은 김옥균의 묘이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못 세우고, 비상하게 죽은,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 아오야마 김옥균 묘의 비석에 쓰여 있는 유길준의 추모 글이라고 한다. 아산의 김옥균 묘 앞에 서자, 그가 비상한 시대에 태어난,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인재였는지 모르지만, '외국 군대를 빌려 혁명을 할 수는 없다'는, 별로 비상하지 않은 '상식'을 인식하지 못한 죄로 중요한 개화파의 실험을 실패로 이끌었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고 만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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