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요즈음 줄어들었지만, 산골오지에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서성이는 곳이 있다. 바로 정선의 사북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도박중독자들이 노숙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강원랜드라는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가 생겨난 '카지노마을'이 되고 말았지만, 사북은 원래 한국을 대표하는 탄광마을이다.
"어용노조지부장은 물러나라!", "지부장 직선제 실시하라!", "임금, 40% 인상하라!" 1980년 4월 21일 사북의 동원탄좌 노조사무실 앞에는 300여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외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사북(탄광)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 항쟁은 하루하루를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막장 인생'인 광부들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에 의해 생겨난 '서울의 봄' 시기에 터져 나온 대표적인 노동투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주목할 것은, 광부들이 임금 인상 등 회사 측을 겨냥하면서도 진짜 공격한 대상은 노동조합 지부장이었다는 점이다. 즉 사북 광부 항쟁은 열악한 광부들의 생활에 분노해 일어난 생존권투쟁이지만 동시에 어용노조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항쟁이 진짜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가 극우세력의 승리로 끝난 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않고 회사 측과 정권을 대표하는 우리의 노동운동, 즉 '어용노조'의 어두운 역사다.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이 쟁점이 되어 이승만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쇼를 하자, 대한노총은 "국민들만이 아니라 소나 말도 이 대통령의 출마를 원한다"며 우마차를 동원한 시위를 했다. 하다못해, 사북 항쟁 7년 뒤인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적 저항이 불타올랐을 때도, 한국노총은 대통령 간선제 헌법을 지키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성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급수시설을 비롯한 생활 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 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사북 항쟁 당시인 1980년 3월, 노조위원장이 아니라 내무부 차관이 한 이야기이다. 정부 고위관리들이 인정할 정도로, 당시 광부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당시 동원탄좌가 운영하며 민영 탄광 중 최대 규모인 4000명의 광부가 국내 생산량의 10% 이상을 생산하던 대형 탄광, 사북 탄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열 30~40도의 고열 속에서 고난도 노동을 해야 하고, 까딱하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며, 진폐증이라는 직업병을 얻게 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씻을 물도 없는 주거 환경은 엉망이었고 급여도 낮았다.
문제는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하는 노조 역시 회사 편이었다는 점이다. 노조는 회사로부터 부당한 금전적 혜택을 받고 회사 앞잡이로 행동했다. 1963년부터 노조위원장을 한 이재기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분노한 이원갑은 노조위원장에 출마했고 의식 있는 노조 대의원인 신경이 그를 도왔다. 그러나 광부들이 아니라 대의원이 노조위원장을 뽑는 간선제였고, 이재기는 제주도로 초대한 대의원들을 매수해 1979년 가을에 열린 선거에서 승리했다. 선거 결과에 일반광부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이재기는 여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광부들이 요구해온 임금 40% 인상안을 위원장 직권으로 포기하고, 회사 측과 20% 인상에 합의해 버린 것이다.
당시는 박정희가 사망하고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사회적 분위기에 고무된 광부들은 어용노조위원장 퇴진, 위원장 직선제 도입,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사내 분규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시위가 사북을 마비시킨 엄청난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우발적 사고' 때문이다.
1980년 4월 21일, 집회를 금지하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의 광부들이 노조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노조사무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경찰들이 시위 참여 광부들을 카메라로 채증하기 시작했다.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과 시비가 붙었고, 화가 난 광부들이 경찰을 쫓자 한 경찰이 건물 앞에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차 앞을 막아선 광부들을 차로 치고 도주했다. "경찰이 사람을 잡았다." 흥분한 광부들은 노조사무실에 있던 경찰서장을 붙잡아 몰려가 경찰서를 점령했다.
경찰들은 도주하고 사북은 '해방구'로 변했다. 부녀자들은 솥을 걸고 음식을 해 광부들을 먹였고, 광부들은 밤새 사북을 헤집고 다녔다. 그들은 노조사무실, 경찰서, 광업소 사무실, 회사 간부와 노조 간부의 집을 파괴했다. 어용노조위원장 이재기를 찾아 나섰지만 그는 이미 도주해버려 이재기의 처만 붙잡았다. 일부 광부들은 이재기의 처 김순이 씨를 폭행하고 심각한 성추행까지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인질로 묶인 채 마을을 끌려 다니다 3일 뒤인 24일에야 풀려났다.
비상이 걸린 강원도 경찰은 도 경찰국장의 지휘 아래 400여 명이 진압에 나섰다. 사북에서 광업소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안경다리에서 22일 전투가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접근해 왔지만, 3500명 광부들에 마을 사람들까지 더해져 6000명이 모였다. 남자들은 부녀자들이 날라다준 돌로 무장해 투석전으로 맞섰다. 결국 경찰 1명이 사망하자 경찰은 철수했다.
경찰은 계엄당국에 공수부대 투입을 요청했다. 계엄사령부는 군 투입작전을 준비했지만, 다행히 작전 개시 이전인 4월 24일 협상이 타결됐다. 3일 간에 걸친 노사정 협상에서 회사 측은 상여금을 250%에서 400%로 늘리는 등 여러 후생복지 개선책에 합의했고 이번 사태에 대해 회사와 당국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정권 장악을 노리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 같은 '노동의 도전'을 묵과할 수 없었다. 계엄사는 사북사건합동수사반을 조직해 주모자를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사북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10여 명이 잡혀갔고 이원갑 등 '주모자'들은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부녀자들은 이재기의 처보다 더 심한 성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언론은 '노조위원장 부인 폭행'만을 부각시켜 항쟁을 매도했다. 결국 이원갑 등 28명은 계엄군법회의에서 최고 5년 등 모두 84년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업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민주화와 함께 이들은 사북노동항쟁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자신들의 투쟁이 "민주화를 위한 노동운동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싸워나갔다. 2000년대 들어 발족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과보상심위위원회에 명예회복을 신청했지만, 신청자 21명 중 이원갑과 신경 등 2명만이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이들은 2015년 재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19명의 명예회복 신청이 기각된 것 이외에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노조위원장 처 김순이 씨에게 가해진 성폭력과 폭력,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성폭력이다. 사북 항쟁이 아무리 정당한 항쟁이었다고 하더라도, 어용노조위원장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폭력과 성폭력을 가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원갑의 말대로 이는 "없어야 할 일"로, 이원갑은 김 씨를 찾아가 사과했다.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계엄사가 조사과정에서 고문 등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한편, "집단폭행을 당한 어용노조위원장의 처 김순이 씨를 위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적절한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고 있다. 김 씨는 이원갑 씨 등에 대한 민주유공자 지정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지만 기각됐다. 다만 이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민사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고 한다. 항쟁 참여자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사북에 가면 이제 사북 항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석탄 산업의 구조조정에 의해 광부들이 목숨을 걸고 일했던 동원탄좌는 이제 폐광이 되어 사북탄광문화관광촌이라는 광산 체험관으로 변했다. 대신 강원랜드라는 카지노가 들어서 한국 최대의 탄광촌은 카지노마을로 변했다.
광부들과 경찰들이 격전을 벌였던 안경다리에는 카지노 광고가 설치되어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근처의 노조사무실은 뿌리관으로 변했고, 그 옆에 광부들의 생활과 사북 항쟁을 요약한 기념비와 산업전사의 탑이 세워졌다. 사북에서 30분을 달려 태백시로 들어가면 태백석탄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탄광의 모든 것에 대해 잘 전시되어 있지만, 사북 항쟁에 대해서는 '사북 사태'라는 제목으로 종이 한 장에 간단히 써놓았다.
이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총이라는 자주적 노동조합연합체가 생겨났고, 한국노총도 변신을 하여 자주성을 많이 회복했다. 41년 전 사북 광부들이 계엄정부에 저항해 돌을 들고 싸웠던 안경다리에 서자, 이 같은 변화의 밑바탕에는 어용노조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났던 사북 항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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