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한국도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이주노동자 평등연대, 차별금지법제정 이주인권연대 등 8개 시민단체는 21일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구 홍대청년공간JU에서 기념대회 및 토론회를 열었다.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존의 혐오와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이주노동자·결혼이주민·동포·유학생 등 2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그러나 차별적인 정책과 법·제도, 사회적 인식이 변하지 않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특히 고용허가제 등 이주민에게 차별적인 제도, '이주민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라는 등의 기존의 편견을 지적하며 코로나19 재난이 이러한 혐오와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 설명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도 한국인과 동일한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면서 "방역대책이나 재난지원금 등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 죽었을 때만 관심..."고용허가제는 오래된 문제"
네팔 출신인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지만 정부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 씨의 사례처럼, 이주노동자가 죽어야만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공공기관에서 통·번역사로 근무하는 뚜완(한국이름 안은경) 씨는 공공기관조차 이주민을 차별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뚜완 씨는 "10년차나 1년차가 같은 월급을 받는다. 전문자격증을 취득해도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선주민과는 다른 처우"라며 "심지어 정규직 전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1년 미만의 쪼개기 계약을 수년째 한다. 이런 불안정한 조건 때문에 이주여성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의를 하거나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성이주노동자, 성폭력의 위험까지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여성노동자 부당한 노동조건에 더해 성폭력의 위험에 처한 현실을 고발했다. 캄보디아에서 온 뽕란 씨는 "하루에 10시간, 12시간씩 일하는데 휴일은 한달에 이틀밖에 안 된다. 휴게시간도 근로계약서에는 하루 3시간으로 돼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고용주에게 이렇게 일하는데 왜 임금은 최저임금 미만이냐고 물으면 '다른 곳도 다 똑같다'고만 한다"고 했다.
뽕란 씨도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들을 억압한다고 지적했다. 뽕란 씨는 "등록노동자들은 그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위협을 당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다"면서 "제가 그만두고 싶다 했을 때도 그 고용주는 '3년 계약했으니까 여기서 3년 일해야 한다'고만 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라는 걸 무시하는 고용주들이 많다"고 했다.
차별적인 법과 제도가 코로나19 확산 사태에 이주노동자들을 더욱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라셰드 씨는 "코로나19 기간 동안 고용허가제 E-9 비자 기간이 끝난 동료들은 코로나 때문에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출국유예로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며 "그 기간 동안 일도 못하고 외국인등록증도 반납해야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미등록이주민 카를로 씨는 "우리는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방의 위험을 안고 매일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며 "코로나19 팬데믹은 더욱 나쁜 상황을 만들었다. 우리는 보건의료에서 배제되고 백신 접종 여부도 불확실하다. 언제 코로나에 감염되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차별과 혐오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중동 출신의 난민 이브라힘 씨는 차별이 권력자들에게 착취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지적했다. 이브라힘 씨는 "차별은 사회적 약자, 여성, 흑인, 그리고 아이들에게 적은 임금을 준다는 의미"라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서로 고립시키고 대립시켜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면서도 이들이 연대해 저항하는 것도 막는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주민 집단인 중국동포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심각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됐다고 호소했다. 중국동포 박연희 씨는 "코로나19 발생지가 중국 우한이라는 이유로 '중국 사람을 한국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들이 쏟아졌다. 언론도 '대림도 위생 불량 심각',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한국, 차별금지법 더는 미룰 수 없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인종차별이 단순히 인종이나 출신국가 등의 이유뿐 아니라 종교, 문화적 차이와 결부돼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을 향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에 "인종차별의 정의를 법제화하고, 인종차별을 포괄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권고했다. 위원회는 권고를 하면서 "지난 보고에 이은 지속적인 권고"임을 강조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차별금지법제정에 대해 전혀 노력하고 있지 않음에 대해 우려"의 뜻을 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해 4월, 바이러스가 사람을 가리지는 않지만 불평등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들어 "인권이 코로나19 대응의 열쇠"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국제사회는 특히 재난 대응에서 '이주민 포함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국제이주기구(IOM), 세계난민기구(UNHCR) 등은 지난해 '난민, 이주민, 무국적자의 권리에 관한 공동성명'을 통해 "이 질병은 모든 사람의 생명과 건강권을 보호하는 포함적 접근이 있어야만 통제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도 지난해 '코로나19와 이주민의 인권 가이드'를 발표하며 '이주민 포함의 원칙'을 명시했다. 가이드에서는 "체류자격과 관계없이 모든 이주민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효과적인 보건의료와 코로나19에 대한 회복 대응에서 통합된 부분으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며 "이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이주민을 포함하는 것은 이주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고 외국인혐오에 불을 지피는 것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효과적 방법이다"라고 밝혔다.
토론에 참여한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외국인을 불리하게 대우하는 정책은 결국 국적에 따라 구분되는 불평등한 계층을 양산"하고 동시에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더욱 정당화함으로써 구조적 차별을 공고화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모두를 삶을 위협하는 재난에 대한 대응으로 분리와 배제가 합리적인 답이 될 수 없다"며 "재난에 대한 대응은 상호연대의 원리를 바탕으로 국적이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재난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치가 되어야 한다. 재난을 함께 이겨낸 이 경험을 통해 국적에 따라 분리하여 설계된 기존의 차별적 제도를 재정비하고, 동등한 시민 또는 주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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