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의 피해자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밝혔다. 피해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을 고소한 뒤 처음이다.
피해자는 지원단체 및 변호인단과 함께 17일 서울 중구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피해자는 기자회견을 연 이유에 대해 "본래 선거가 치러지게 된 이유가 많이 묻혔다고 생각한다. 저의 피해 사실을 왜곡하고 저를 상처 줬던 정당에서 시장이 선출되었을 때, 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며 "어떤 결과가 생겼을 때 후회가 덜한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기자회견을 시작하며 피해자는 박 전 시장의 위력과,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음에도 여전히 가해지는 2차 가해를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첫 입장문은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가 대독했다.
피해자는 기자회견 막바지에 직접 심경을 전했다. 준비한 입장문을 읽으며 눈물을 터뜨리기도 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용서하고 싶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용서하기 위해서는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먼저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는 "사실의 인정과 멀어지도록 만들었던 '피해호소인' 명칭과 사실 왜곡, 당헌 개정, 극심한 2차 가해를 묵인하는 상황들. 처음부터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 모든 일이 상식과 정의의 부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런 일들로 인해 너무도 괴롭다"면서 "잘못한 일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인정하신다면 용서하고 싶다. 고인의 잘못뿐만이 아니다. 지금 행해지는, 그리고 지금까지 저에게 상처 준 모든 일들에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그분과, 많은 사람들의 위력 때문에 겁이 나서 하는 용서가 아니다. 저의 회복을 위해 용서하고 싶다"며 "저는 그저 불쌍하고 가여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다.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이번 일로 소모적 논쟁이 아닌 진정성 있는 반성과 용서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사회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피해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이 나온 후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사과했다. 사과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진정성 없는 사과였으며 사실 인정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가 없었다는 취지로 답했다.
피해자는 "이낙연 대표님과 박영선 후보님께서는 (사과를 하면서) 어떤 것에 대한 사과인지 짚어주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민주당에는 소속 정치인의 중대한 잘못이라는 책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피해호소인' 이라는 명칭으로 저의 피해 사실을 축소·은폐하려고 했고, 투표율 23%의 당원 투표로 서울 시장 선거에 결국 후보를 냈다. 그리고 지금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캠프에는 저를 상처 주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는 사과를 하기 전에 사실에 대한 인정과 그리고 후속적인 조치가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사과는 진정성도, 현실성도 없는 사과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영선 후보의 캠프에 '피해호소인'이라 지칭한 사람들이 소속된 데에 대응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분들이 조치하고 행동해야 할 때"라고 했다.
또 이날 오전 박영선 후보가 "피해자의 기자회견을 들어보고 답변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서울시장이 되면 두 배로 열심히 하겠다"고 한 발언을 두고서도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진정한 사과의 조건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질의가 이어졌다.
피해자는 "정말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제 신분상 그리고 지금은 선거기간이기 때문에 저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조심스럽다"면서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이번 선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과의 방법으로는 민주당에서는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저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명명했던 그 의원들이 직접 저에게 사과하도록 박영선 후보님께서 따끔하게 혼내주셨으면 좋겠다. 그 의원들에 대한 당 차원의 징계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저는 지난 1월에도 남인순 의원의 사퇴를 요구했다"며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로 인한 저의 상처와 사회적 손실은 회복하기 불가능한 지경이다. 저는 그분들이 반드시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민주당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 민주당 차원의 징계를 요청한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선거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보궐선거를 하게 된 이유가 묻히고 정쟁으로만 소비되는 점을 비판했다. 또 성폭력·성평등 관련 제도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공공기관에서 일어난 성폭력 때문에 시작된 선거인데, 성폭력이 다시 정치적 쟁점으로 소비된다. 박 시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가, 오거돈 시장 개인 문제였다가 하고 그것은 다 선거운동이라고 허용되는 말인가"라며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도, 애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선거법 위반이 되어야 하나"고 비판했다.
피해자의 전 직장 동료인 이대호 전 서울시 미디어 비서관은 서울시장 후보들을 향해 당부했다. 이 씨는 "서울시장이 되신 후 몇 가지를 꼭 부탁드리고 싶다. 우선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회사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다.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잘못된 일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짚어주셔야 한다. 그리고 조직 내 성폭력 예방이 실질적으로 이뤄지게 노력해 달라"면서 "피해자를 향한 과도한 관심이나 특별한 인사조치보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울시장이 되신 후에 이 사건에 대한 인식과 입장을 분명히 밝혀주셔야 한다. 조직 내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건 정당한 일이며 조직에 누를 끼치는 일도, 다른 정치적 의도나 개인적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달라"고 강조했다.
이가현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공동대표는 "2016년 탄핵정국에서 여성들이 외쳤던 구호 중 하나는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갈 수 없다'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촛불 이후의 정치에서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며 "여기에 책임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재보궐 선거 원인제공시 불출마'라는 당헌을 바꿔 출마했고, 보궐선거를 왜 하는지 언급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공동대표는 "이번 보궐선거의 쟁점은 부동산이다. 부동산 문제도 중요하지만 연이은 성폭력과 이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가 신뢰를 무너뜨린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지난해 7월 피해자가 위력 성폭력을 고발한 후, 정치는 2차 가해에 급급하고 혐오와 비방만 난무했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과 대안에 대한 고민 없이 정쟁의 도구로만 이용했다. 정치인 중 그 누구도 이를 제지하거나 피해자 편에 서지 않았다"면서 "그러다가 다시 선거철이 되니 때늦은 사과를 한다. 누군가에게는 서울시장이란 자리가 욕망과 패권의 범주이겠지만 용기를 낸 여성노동자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이 보궐선거가 왜 치러지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정치는 용기낸 여성노동자가 일상을 되찾고 더이상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도 "이번 선거는 피해자가 돌아갈 자리를 만드는, 여성이 동등한 노동자로서 존중받는 서울시를 만드는 선거가 돼야 한다"며 "그러나 여당은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 위력이 지속되는 장을 만들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박원순의 치적을 떠올리게 했다.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우상호 의원,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른 이들을 선거캠프에 중용한 박영선 후보 등. 박영선 후보는 이들에 대한 공격을 '여성비하'라고 했다. 누가 여성을 비하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권김 소장은 "야당 후보들도 마찬가지"라며 "서울시는 어느 지자체보다 훌륭한 성평등 정책과 제도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위력 성폭력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제도가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더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이번 사건을 정쟁으로 쓰는 데 급급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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