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비판, 동력을 상실하다
최근 한국에서 공정성과 능력주의만큼 화두였던 개념도 드물 것이다. 왜곡된 '공정성' 가치를 앞세우며 '능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능력주의 그 자체의 문제점을 해부하는 날카로운 글도 쏟아져나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난 수년간 능력주의 기제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담론이 크게 증가했는데, 몇몇 논의들은 이미 한국에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 논쟁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에 관해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샌델의 책이 범접할 수 없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그 내용이 반복적으로 전달되면서, 역설적으로 능력주의 비판 담론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그 동력을 잃게 되었다. 새로운 관점을 탐색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다른 주장들이 주목받지 못했으며, 미국의 상황과는 구별되는 한국의 주요 사건이나 사회적 맥락에 대한 논의도 힘을 얻지 못했다.
물론 샌델의 주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능력주의 신화는 성공한 사람들이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을 정당화한다. 반대로 세속적인 기준으로 "실패했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능력이 없어서, 노력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부모가 길을 지나가는 환경 미화원을 가리키며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라고 자신의 자녀에게 말했다는 도시 전설은 가장 천박하고 비인간적인, 그러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처럼 뿌리 깊은 박탈감과 모멸감이 손쉽게 발현되는 경쟁 사회에서 '자만'과 '굴욕'이라는 키워드로 능력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비록 샌델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박탈감과 같은 대중 정서에 기댄 비판은 누구나 반감 없이 받아들이기 쉽고, 때문에 대안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대안의 길로 가는 통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샌델은 능력주의 기제의 뿌리는 건드리지 않는 길을 택한다. 사회 구조와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혁신하는 방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피해간다는 얘기다. 능력주의는 (1) 구조적 불평등, (2) 차별, 그리고 (3) 행운이 미치는 영향을 은폐하고 우리의 위치를 "순수한 개인적 성취"로 포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샌델은 이 중에서도 특히 운에 방점을 둔다. 즉, 우리가 행운과 신의 은총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해결책은 추첨이다.) 능력주의가 "불평등과 차별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동시에 이를 재생산한다"는 담론과 비교할 때, 샌델의 주장은 단순히 온건한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비판 담론의 보수화와 개인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동안 한국의 지식인들이 발전시켜 온 능력주의 비판과도 크게 대치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주의 비판
어느 정도의 부와 성공은 당연히 운의 영향이다. 그러나 (심지어 미국처럼 빌리어네어가 등장하는 국가에서) 행운을 그 주요 기제로 설명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빌리어네어는 한 개인의 운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가문의 운으로도 절대 설명 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제프 베이조스의 순자산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화로 220조 원 안팎이다. 일론 머스크도 마찬가지다. 어떤 개인도 순수하게 그 능력만으로 220조 원을 벌어들일 수는 없다. 이 "성취"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적 혜택의 장기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며, 심한 경우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아마존의 노동 환경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 정도의 성공은 노동 정책 개선이나 세제 개편과 같은 구조적 개혁 및 수정 조치 없이는 재조정될 수 없다. (샌델이 소득세를 없애거나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특히 흥미롭다.)
샌델이 강조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운을 인정하고, 겸허한 태도를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남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한다고 해서 능력주의의 본질적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같은 개인화된 해결책은 구조적 문제를 개별적 마음가짐과 자세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심지어 전 인류가 샌델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다고 하더라도 능력주의와 결합한 차별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았으니 너의 책임"이라는 비난은 언제나 소수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수자들을 동일한 집단으로 묶어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흑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떤가? 샌델이 말하듯 "나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으로 보일까? 그렇지 않다.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무식한" 이들이기 때문에 게토에 산다고 여길 것이다. 팬데믹 이후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가 급증한 것은 또 어떤가? 만약 면접 심사관이 한국계 미국인에게 (스스로도 그 반감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낮은 점수를 주었다면? 이처럼 소수자들이 더 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그저 운이 덜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하게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여성이나 소수인종을 우선 채용하는 다양성 정책은 언제나 '능력에 따른 공정한 평가'를 위협하는 것으로 공격받아왔다. 한국에서도 최근 비정규직, 저소득층, 지역 인재 우대 정책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거세지고 있다.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소수자와 약자에게 더욱 차별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능력주의 논쟁에서 가장 첨예한 지점이지만 샌델은 여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구조적 불평등과 문화적 차별 모두 핵심 의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운의 영향을 강조하는 것은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내가 백인이라서" (혹은 지배 계급이어서) 더 성공하기 쉬웠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내가 좀 더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말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추첨은 과연 능력주의의 대안일까? 샌델이 제시하듯 일정 기준을 넘어선 대학 지원자들 사이에서 추첨으로 합격을 결정하면 단지 기존의 불평등 분포를 재생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샌델은 추첨권의 배분을 달리하자고 추가 조건을 제시한다. 예컨대 저소득층 지원자에게 추첨권을 여러 장 주는 것이다. 물론 추첨권의 배분 기준을 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지만, 최선의 경우 기존의 수정 조치와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결과론적으로 비슷한 모양새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가치론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말 그대로 추첨, 즉 행운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은 오히려 그동안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왔고 투쟁을 통해 얻어낸 다양한 수정 조항들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지배적 패러다임과 차별적 기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구조는 면죄부를 얻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물론 대학 혹은 대졸자의 과대평가된 사회적 지위를 낮추는 데에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굴욕을 넘어 연대로 갈 수 있을까
줄곧 탈정치적이고 개인화된 해결책을 제시하던 샌델은 책의 후반부에서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타인과 연대하자고 제안한다. 연대는 최근 정치철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진일보한 개념인데 반해, 샌델의 논의는 매우 빈약하다. 그는 "성공은 능력이 아닌 우연에 기반한다"는 깨달음이 어떻게 타인과의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잘 설명하지 못한다. 능력주의가 생산하는 자만과 굴욕의 정서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대의 정서를 키우는 것도 학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조건의 평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조건의 평등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존엄한 대우를 받고 모두가 함께 숙의하고 학습할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공통 경험 혹은 교류의 경험이 자동적으로 연대로 이어진다고 믿는 것은 나이브하다. 물론 공감, 겸손, 그리고 상호 이해는 당연히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이같은 "인간적 삶"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며 능력주의의 물적 조건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굴욕감이 없는 개인'도 여전히 '개인'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관계와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구조와 차별을 함께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연대는 타인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샌델의 주장에 깊이 감화된, 혹은 그의 주장에 탄복한 사람들이 그래서 책장을 덮은 후 과연 무엇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무언가를 바꾸는 실천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방송으로, 언론으로, 유튜브 동영상으로 수도 없이 반복된 그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의 언설에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힘, 우리의 손을 마주잡게 만드는 힘이 있는가? 물론 겸허해질 것을 다짐하는 것도 중요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나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구조적 상처를 치유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능력주의를 둘러싼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도 반드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우연과 운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상처를 봉합할 수는 없다. '능력'을 무기로 경쟁과 각자도생에 충실해왔던 우리의 삶을 진정한 연대의 삶으로 바꾸기 위해, 능력주의 논쟁은 더욱 치열해져야 한다. 마이클 샌델을 넘어, 이제 다시 능력주의 담론에 불을 지피자.
프레시안과 참여사회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시민정치시평은 이번에 '능력주의'를 키워드로 3편의 글을 연속 게재합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능력주의는 한때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신분상승의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능력주의, 그리고 이와 맞물린 공정성 담론이 사회의 원자화와 해체를 가속화하고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3편의 연속 기획은 이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담고 있습니다.
한길석 중부대 교수는 능력주의가 경제적 격차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진단했고,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능력주의로 포장된 공정 담론이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저해하는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는 최근 능력주의 비판에 자주 인용되는 샌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주의와 사회의 구조적 차별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합니다. (☞관련 기사 : "능력주의, 제2의 트럼프 탄생시킬 수 있다", "'공정'이라는 허상, 그 틈을 파고든 '능력 독재'")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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