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젖는다. 능력주의가 계층 이동 가능성을 활성화하여 사회적 평등에 이바지한 역사를 몸소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계층, 성별, 인종, 지역 등에 상관없이 공평한 능력 경쟁을 통해 사회적 상승을 보장하므로 여전히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비판자들은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격화시킨다고 우려한다. 이에 대해 옹호자들은 능력주의의 충분한 실현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응수한다.
과연 그럴까? 능력주의의 이상이 충분히 실현된다고 해도 어차피 승자가 더 많은 재화를 가져가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상존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능력 차가 역전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지는 경우 사회적 이동을 통한 평등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롤스는 능력주의가 야기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 사회적 약소자에게 재화의 일부를 분배하는 자유주의 원칙을 제안했다.
능력주의 신봉자들은 선별된 소수 능력자만이 막대한 부를 제공받고 사회적 명망을 누릴만한 응분의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능력을 키운 만큼 그럴 만한 마땅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같은 논리대로 라면 능력 없는 사람들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망도 가질 자격이 응당 없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변변한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건 부정의한 게 아니라 그래 마땅한 일이 된다.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불행한 삶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패자의 불행한 삶을 그래 마땅한 거라고 손 놓고 있는 사회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 변화가 격심한 사회일수록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따라서 미래를 염려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내일의 불행을 대비하기 위해 사회적 약소자에 대한 배려를 제도화 하고자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임을 이론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사회운영의 근본 원칙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능력을 갖춘 엘리트가 사회적 약소자에게 경제적 양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정의의 관점에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롤스는 사회적 자원의 활용과 제도의 지원 없이 온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능력을 개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쉽게 말해 손흥민의 높은 연봉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사회적 자원(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축적된 축구 기술과 그것을 전수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 출중한 축구 능력을 높이 사 줄 프로축구 제도, 팬들 등) 덕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능력자들의 성과는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 만일 그것을 거부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능력 개발에 필수적인 사회적 자원의 이용과 제도의 지원은 중단될 것이고, 능력에 따른 보상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합리적 추론을 할 줄 아는 능력자라면 자신이 벌어들인 부의 일부를 능력주의의 패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에 동의함으로써 이런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회적 협력이 지속되게끔 할 것이다.
그렇지만 능력주의의 폐해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기만 할까? 그것도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문제는 능력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존재 가치와 자긍심을 해친다는 데에 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엘리트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포퓰리즘이 확대되는 현대적 현상은 능력주의의 이러한 폐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보상하는 롤스식 해법만으로는 능력주의의 폐해를 방지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격차는 일정 부분 보상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 명망의 격차는 더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재산의 일부를 환원하는 대가로 많은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인정과 존경은 단순한 명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자본으로 환산되어 축적되고 권위와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희귀한 자원이기도 하다. 이미 인플루언서들은 상징자본을 통해 물질자본을 축적하고 있다. 엘리트들은 능력주의 하에서 이런 기회를 거의 독차지 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노동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생계수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을 통해 자기가 소속된 집단, 즉 가족과 회사와 지역사회와 국가 등에 이바지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사람들은 노동활동을 통해 사회적 분업 체계에 참여함으로써 한 사람의 당당한 몫을 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실존의 가치를 스스로 확보하게 된다. 나아가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신망과 존경을 얻는다. 낮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이 견디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노고에 신망과 존경을 보냄으로써 낮은 급여를 보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사회적 인정과 존경의 기회를 부여한 사회 공동체에 열심히 협력한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사회적 실존으로서 살아갈 기회를 박탈한다.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 선별하여 일자리를 주고 나머지는 반실업 상태로 남겨두도록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경제적 보상의 기회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경과 인정을 얻게 되는 기회까지 독차지하게 된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경제적 박탈감과 문화적 소외감 그리고 모멸감에 휩싸인다. 능력주의 사회는 이들을 '잉여'나 '쓰레기', '벌레'라고 조롱한다. 결국 이들은 엘리트들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품게 된다. 샌델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포퓰리즘의 준동에는 이러한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샌델의 우려는 바다 건너의 일만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와 생계 수단을 잃어버렸다. 비대면 상황에서 오히려 경영 효율성이 높아졌음을 알게 된 기업들은 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나설 기세다. 시장에서 높은 값으로 평가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실직자들은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 일도 못하면서 주변에 폐만 끼친다는 모멸감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실존의 위기가 겹치고, 국가와 엘리트는 그러한 위기를 나몰라라 방치하면서 조롱이나 일삼는다면, 굴욕감을 밑천으로 한 원한의 정치는 우리가 이룩한 모든 성취들을 일거에 휩쓸어 버릴 수 있다. 나치즘과 트럼피즘의 위기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여태까지 능력주의의 폐해는 경제적 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만 비판되어 왔다. 하지만 포퓰리즘 현상과 능력주의를 연결해 본다면 그것의 폐해는 경제적 재분배의 관점에서만 고려될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인정 기회의 평등한 분배라는 관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누구도 무시당하면서 굴욕감을 느끼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 능력주의는 특출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 대한 조롱과 무시 그리고 모욕의 문화를 조장한다. 능력주의의 폐해를 실업급여나 기본소득을 통해 일부 교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정과 명망의 기회를 박탈한 채 분배적 정의만 강화하는 것으로는 모멸의 정치를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레시안과 참여사회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시민정치시평은 오늘부터 '능력주의'를 키워드로 3편의 글을 연속 게재합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능력주의는 한때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신분 상승의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능력주의, 그리고 이와 맞물린 공정성 담론이 사회의 원자화와 해체를 가속화하고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3편의 연속 기획은 이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담고 있습니다.
한길석 중부대 교수는 능력주의가 경제적 격차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능력주의로 포장된 공정 담론이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저해하는 현상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는 최근 능력주의 비판에 자주 인용되는 샌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주의와 사회의 구조적 차별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합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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