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산재 사망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 해 10만 명 정도가 산업재해를 당하고 한 해 2000명 정도가 유명을 달리한다. 2019년 2020명, 2018년 2142명, 2017년 1957명의 소중한 생명이 산재로 스러졌다. 2020년 통계는 올해 3월 발표 예정이지만 그다지 큰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산재 공화국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 처벌법)은 이러한 비극의 행진을 어떤 식으로든 막아보자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 1월 8일 이 법의 국회 통과로 경영책임자 등에게 종사자의 안전보건을 확보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 법의 근본적인 의미는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이윤보다 우선 순위'라는 지극히 당연한 가치를 기업과 사회 전체에 확인해 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인의 처벌이 아니라 기업인이 '안전경영'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안전투자'를 확대하여 중대재해를 최대한 예방해 보자는 데 있다.
중대재해 처벌법 통과 이후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산업재해 예방과 관련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2021 산재 사망사고 감축 추진 방향 고용노동부 장관 브리핑'(1월 21일), '2021 산업안전보건감독 종합계획'(2월 9일), '사망재해 발생 등 예방조치의무 위반사업장 명단 공표'(2월 10일) 등은 그 일련의 조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 중 '산업재해 사업장과 기업에 관한 정보공개 대책'은 매우 미흡하다. 현재 산업재해 등 안전과 관련한 정보는 정부와 기업과 전문가 집단이 독점하고 있다. 시장과 시민사회 영역에서 유통되고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며 파편적이다. 정보의 이러한 비대칭은 위험사회를 더욱 가속화 하고 구조화 시킨다. 그래서 현대 산업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정부와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을 '위험관리의 사회적 지혜'라고 역설한다. 정보공개는 위험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안이다. 기업이 발간하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산업재해와 관련한 정보를 일부 공개하지만 발행 기업도 적은데다 정보도 매우 제한적이며 회사에 유리한 정보가 주를 이룬다.
이 시점에서 행정안전부가 발간한 '2018 공공데이터 제공 분쟁조정 사례집'에 실린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보를 수집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 성과와 지속가능성을 분석하는 '지속가능발전소'와 '고용노동부'와의 분재조정 사례다.
지속가능발전소는 기업의 ESG 성과 분석을 위하여 고용노동부에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 제공을 신청했다. 기업명, 사업장명, 재해율, 재해인원, 재해정도(사망·부상), 처리결과, 신고누락 여부, 산재다발 여부 등이다. 이에 대하여 고용노동부가 산재 데이터가 통계자료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법인 또는 단체 등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자, 데이터 전체 제공을 요구하며 분쟁조정을 신청한 사례다.
조정결과는 '고용노동부가 지속가능발전소에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를 제공하여야 한다'였다. 공공데이터에 해당하고,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 제공시 법인 등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국민의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소기업에 관한 데이터를 제외할 수 있으며, 지속가능발전소가 데이터를 이용함에 있어서 데이터의 출처 등을 표시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특별한 사유를 소명하지 않고 15일 이내에 이 조정안 수락 여부를 알리지 않아 '조정 불성립'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한마디로 뭉개버렸다. 장애인 고용 현황 데이터, 육아휴직 및 육아휴직급여 현황 데이터도 역시 공개를 권고하는 조정결과를 통보했지만 역시 무시해 버렸다.
고용노동부가 공개하는 현행 데이터만으로는 '산업재해'와 관련한 기업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비교할 수 없다. 사실 지속가능발전소가 정보제공을 요청한 산업재해 현황은 요청하는 기관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할 정보다. 기본적으로 안전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투자자, 시민사회, 노동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용이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산업재해, 특히 중대재해 위험관리를 위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하여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연금이 포스코와 CJ 대한통운에 산재와 관련하여 책임이 있는 이사 선임을 추주총회에서 반대하고 공익이사를 선임하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침, 국민연금은 지배구조(G) 중심의 현행 수탁자 책임 활동을 올해부터는 환경(E)와 사회(S)로 확대한다는 방침 아래 환경, 사회 각 분야에 어떤 이슈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지정할지에 대하여 논의 중이다. 지난 9일 열린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서는 이와 관련된 사안도 보고되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환경(E)에서는 기후변화. 사회(S)에서는 산업재해(중대재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자는 지난 2019년 11월 말 '국민연금 책임투자 로드맵'인 '국민연금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이 의결된 이후, 환경과 사회 중점관리사안으로 기후변화와 산업재해가 될 가능성이 높고, 또 ESG 관련 국내외 흐름을 보면 그래야만 한다고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하여 줄곧 주장해 왔다. 이 두 이슈는 기업의 사회적 평판 리스크는 물론 재무적 리스크와도 밀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국제사회가 이미 공인한 재무적 리스크이며, 산업재해는 중대재해 처벌법 통과로 리스크는 더욱 증대되었다.
현재 국민연금은 ESG 지표에 '산업안전' 이슈를 두고 보건안전시스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외부인증, 산재다발사업장 지정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표만으로는 사실 변별력 확보가 쉽지 않다. 달라진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과 여건을 반영하여 지표를 좀 더 풍부하게 하고, 관련 정보 획득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연금이 사회(S) 분야의 중점관리사안으로 '중대재해 등 산업재해'를 지정한다면, 더욱 그래야만 한다. 투자지표만이 아니라 일상적 관여활동(engagement)과 주주제안 등의 근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향후 자본시장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산재 관련 데이터 요구는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 제공과 관련한 분쟁조정 과정에서 드러난 고용노동부의 논리를 읽어보면 기대난망이다. 철저할 정도로 기업 측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위한 부처인지 재계를 위한 부처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중대재해 처벌법 통과 이후 중대재해 등 산재예방을 위한 고용노동부의 일련의 조치들이 그다지 미덥지 않는 이유다. 중대재해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 대한 관성적인 대응 행정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공개조차 뭉개버리는 고용노동부의 의지와 진정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1월 21일 '2021년 산재 사망사고 감축 추진 방향' 브리핑을 통하여 "중대재해의 획기적 감축은 어려운 목표”라고 전제하며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전체가 안전을 중시하고 재해를 예방하는 기본 인프라를 갖추어 사람 중심 문화를 정착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당한 말이다.
이 장관이 언급한 '재해를 예방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에는 바로 투명한 정보공개도 포함된다. 물론 정보공개가 만능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보공개를 통한 투명성 확보는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 역할을 한다. 공공데이터 제공 분쟁조정위원회에서도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 제공이 기업 등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국민의 생명과 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개가 필요한 정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한 해에만 10만 명 이상이 산재를 당하고 2000명 이상이 김용균처럼 스러져 가는 이 비참한 현실 앞에서 기업의 피해부터 걱정하며, 공공 정보를 독점하는 태도가 과연 온당한가. 생명을 이윤의 발 아래 놓는 전형적인 정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ESG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ESG 시대에 부흥하여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를 모든 이해관계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 이재갑 장관은 기본부터 챙기고 중대재해, 산업재해 감소 대책을 내놓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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