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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일 '평화 삼각형' 만들어야 미·중 영향력 극복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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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북·일 '평화 삼각형' 만들어야 미·중 영향력 극복 가능"

[인터뷰]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① 한반도 평화와 한일관계 개선은 함께 진행

2018년 손에 잡힐 듯했던 한반도 평화가 다시금 멀어져 가고 있다. 남북, 북미, 한일 관계 등이 모두 교착과 갈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고 한국에서는 강창일 신임 대사가 일본에 부임하면서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한일 관계가 주로 과거사 청산의 시각으로 조명되고 있지만, 이보다는 한반도 평화 구축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의 대표적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 과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월 27일 남 교수를 만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일본의 상관관계, 그리고 양국 간 가장 민감한 현안인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 등에 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세 차례에 나눠 소개할 예정이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을 어떻게 관여시킬 것인가

프레시안 :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5년의 위안부 합의 이행에 관한 갈등을 시작으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배상 판결, 2019년 7월 일본 정부의 대한국 수출 규제, 그리고 지난 8일 한국 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에 이르기까지 양국 관계는 꼬일대로 꼬여가고 있다. 2018년 급진전됐던 남북, 북미 관계가 2019년 이후 후퇴한 가운데 한일 관계는 계속 악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대체로 한국에서는 한일 관계를 과거사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반면, 남기정 교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성공을 위해 양호한 한일 관계가 중요한 전제 조건의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과거사 관련 응징의 대상인 동시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 협력해야 할 상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2018년 이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왔다. 이에 대해 남 교수는 "일본이 아직 분단과 전쟁을 끝내고 담대한 평화로 나아가는 한반도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이것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꼬이게 하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을 어떻게 관여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북핵 해결을 고리로 남북 화해 및 북미, 북일 수교를 통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를 이루려는 한국과, 미일 동맹 강화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한 대중국 봉쇄로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려는 일본의 전략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일본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식민과 분단, 전쟁에 일본의 책임이 크고 그 해결의 책무가 있다고 했는데.

남기정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란 쉽게 말해 한반도를 전쟁과 대립의 무대에서 평화와 협력의 무대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동북아에 전쟁의 논리를 강요해온 '두 개의 전후'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는 2차 대전 '전후'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전후'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극복은 평화 구축의 과제이며 2차 대전 전후의 극복은 역사 화해의 과제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동북아시아는 1894년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1975년 베트남전쟁 종료까지 80년 간 전쟁의 고통을 겪었다. 이른바 동북아 80년 전쟁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정전으로 전투가 중지됐을 뿐 북한과 미국, 일본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북아의 전쟁 상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킨 주역이고 한국전쟁에서는 미국을 지원했다. 앞의 두 전쟁은 한반도를 식민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한국전쟁은 남북한 및 동북아의 분단과 대결을 고착화한 전쟁이었다. 결국 근대 이래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무대로 세 번의 전쟁이 있었던 것이고 이를 총체적으로 극복하는 것, 즉 식민 청산과 분단 해소가 우리의 과제가 됐다.

이 세 전쟁에서 일본은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세 차례 한반도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 가해자 내지 참여 당사자였던 일본의 협력이나 관여는 필연적이다. 어떻게 관여시킬 것인지는 그 다음 문제지만, 역사적으로 얽힌 실타래 속 하나로 일본이라는 실이 들어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어떻게 풀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보이지 않았던 엉킨 실타래가 드러나기 시작한 건데, 그게 볼턴 회고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2018-19년 북미 교섭 과정에서 일본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어그러뜨린 것으로 나타났다.

▲ 지난 2017년 2월 10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레시안 : 말하자면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1945년까지는 동북아 평화 교란의 주범이고 이후에는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한국전쟁에 대해 남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일본을 빼고 한국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빼고 전후 일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한일 양국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은 채 서로를 적대시한 결과가 2019년의 한일 '경제'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남기정 : 사실 한국전쟁에 일본이 깊이 관여돼 있는데 우리가 이걸 잘 모르고 있고, 일본 역시 자신들의 전후사에서 한국전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일 양측은 근현대사 이래 침략과 전쟁으로 얼룩진 과거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서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일본의 전후 총결산을, 일본의 전후 총결산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상호 규정하는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일본의 전후 총결산도 개별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또 동북아시아에 대립과 갈등의 질서를 극복하여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양국이 마주 앉아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서로 상대하지 않는 구조가 있다. 이 문제가 안 풀리니까 나머지 부분도 같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프레시안 :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주일 미 대사가 "일본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일본이 한국전쟁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나?

남기정 : 실질적 역할과 정치적 명분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일본은 당시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전 16개국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에 동원된 자국민의 인원수로 따지면 일본은 8000명 정도로 6위권에 속한다.

특히 일본의 중요한 역할은 미군에 군사 기지를 제공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은 모두 72만 회 출격했는데 주로 일본의 15개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함대는 요코스카와 사세보 등 해군기지에서 발진했으며 일본 전국 730여 개의 미군 기지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 와중에 일본은 미국 등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미국과의 안보조약을 하나 더 붙이는 것이었다. 일본 침략의 피해자인 남북한과 중국, 대만은 초대받지 못했고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참석을 거부한 이 평화조약은 일본의 과거 침략이나 전쟁행위에 대해 책임 추궁도 하지 않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 조약이 미국 주도의 단독 강화라 불리는 이유다. 바로 이런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시스템이 동북아에 전쟁구조를 영속화시키는 형태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전쟁구조를 영속화시킨 그 시스템이 절반 정도는 냉전으로 옮겨가면서 2차 대전을 냉전 속에 그대로 온존시키는 구조로 굳어지게 됐다. 2차 대전 '전후'와 한국전쟁 '전후'가 일본을 매개로 해서 한반도에서 온존되고, 해소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를 해결하려면 일본과 담판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사실 미국은 한국전쟁 직후 일본과의 평화조약을 서둘렀고, 그 이유는 동아시아의 평화라기보다는 이 지역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을 군사기지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에 대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한 조약 아니었냐는 평가도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1991년 동서독이 통일되는 과정에서야 평화조약(최종규정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나.

남기정 : 그렇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동북아 냉전을 위한 조약이었고 주로 미국의 의도가 관철됐다. 하지만 일본도 미국을 상대로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다.

일본은 이탈리아의 평화회담을 참고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43년 자신들의 힘으로 무솔리니를 제거하고 민주정부를 새로 수립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신정부는 연합국 측과의 평화협상에 회담 주체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해 이탈리아 나름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상황이 달랐다.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이탈리아 수준의 조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이든 소련이든 유력한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예외로 메이지 유신 이후 꾸준히 친영, 친미 노선을 걸었던 일본은 이번에도 미국을 선택했다.

마침 당시 미국-소련 관계가 대립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시킬 수 있다는 것이 요시다 시게루의 노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본 나름의 세계전략이 있었고 그게 미국과 맞아 떨어지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형식적으로는 수동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능동적인 일본의 외교가 있었고. 이게 동북아 냉전을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지는 이러한 위치나 전략 등을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에서의 우리의 전략을 짜야 한다.

프레시안 :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상당히 관철한 것으로 보인다.

남기정 : 일본의 전쟁 책임, 식민지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냉전 시스템으로 올라타는 외교를 일본이 스스로 한 부분이 있다. 이게 다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1951년 9월 8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세 차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프레시안 : 그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을 관여시키려는 한국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나.

남기정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그 동안의 한반도 전쟁을 극복하고 동북아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 그 노력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라고 구체적으로 명명한 것이 2018년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1988년과 1998년, 2018년 이렇게 세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1988년 7.7 선언은 남북 간 화해‧협력을 추진하면서 이를 동아시아의 화해‧협력 질서 속에 안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한반도 정전체제와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엮어서 이를 같이 극복하는 프로세스였다. 여기에는 한국은 중국‧ 소련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은 일본‧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목표로 담겨 있었다.

실제 1992년까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어느 정도 목표가 달성됐다.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고 남북 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등이 채택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소련(러시아)‧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룬 반면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는 진전되지 못했다. 즉 북한의 과거 적대국이었던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미완의 프로세스로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북한은 국제사회에 문을 열고 나갔지만 결국 당하기만 했다고 평가했을 것이며, 국제적 고립을 어떻게 만회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핵 개발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일본에게 크게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 3당 선언(북한 노동당,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을 통해 국교 수립 프로세스를 만들었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본 외무성이 끼어들어 협상의 기준을 높였고 이후 핵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수교 협상은 좌초했다.

또 당시 남한에서는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진입하는 시기로 이른바 '북한 붕괴론'이 나오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일본이 먼저 북한과 관계개선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북해했고, 그러다 보니 일본 외무성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게 북한에게 하나의 중대한 역사적 경험으로 남게 됐다.

여기에 사회주의 국제관계가 붕괴하면서 과거 교환경제로 이뤄졌던 북한의 경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위해 핵이라는 것이 손쉬운 수단으로, 선택지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삼는다면 이런 역사적 과정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북미, 북일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북한은 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북한을 비핵화 시키려면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북한 비핵화와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 구축과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함께 생각하지 않고 있다. 즉 남북 화해와 한반도 및 일본의 관계개선은 함께 진행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1998년 김대중-오부치의 한일 공동선언에서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2002년 평양 북일 공동선언을 남북 및 한일 관계 개선이 선순환을 이뤘던 모범적 사례로 꼽고 있는데.

남기정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 진행됐던 제2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때는 한반도-동북아 화해 협력 프로세스를 구상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가 북일 관계였기 때문에 이를 목표로 설정해놓고, 당시 가장 쉬운 것이 한일 관계였으니 이를 입구로 삼아 남북관계를 풀고 최종적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를 연결하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명목은 한일관계 개선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남북관계와 북일관계 개선이라는 목표도 있었다는 것인가?

남기정 :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일본으로부터 오는 견제나 걸림돌을 제한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을 것이다. 1992년 미야자와 키이치 총리가 한국에 와서 국회연설을 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환영하고 이를 지원한다고 했다.

이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를 끌어갔다. 남북관계 개선에 일본이 협력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노력이 먼저 필요했고 그것이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었다. 거기에는 역사 문제가 앞에 놓여있지만 그 뒤에는 한반도 평화와 협력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남북관계를 토대로 북일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의도다.

이후 김대중-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고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평양 공동선언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김정일과 일본 자민당 정치인들에 대한 독려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미국 관계도 활용하면서 주변국들에게 북일의 만남을 설득했다.

그러다 보니 고이즈미 총리 역시 미국과 관계에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고, 개선이 가능하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북아에서 남북한과 일본으로 이뤄진 평화 삼각형을 만들어가는 노력이었고 그럼으로써 한반도에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효과를 갖게 됐던 것이다.

프레시안 : 한일 관계 개선이 남북관계에서 남한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밑바탕이 됐다?

남기정 : 그렇다.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작은 삼각형을 우리가 주도적으로 운영하면서 이니셔티브를 가져가는 기점으로 삼았고, 그를 통해 중국이나 미국 등 강대국 정치에 한반도가 끌려가지 않는 영역이나 장을 만든 것이다. 그 삼각형으로 중국과 미국을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한국이 주도하는 세 가지 양자관계 즉 남북, 한일, 북일 등 세 가지 양자관계를 축으로 미국이나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을 상대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나 중국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밀어내는 기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을 관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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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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