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공식적인 블랙리스트 인정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공식적인 블랙리스트 인정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블랙리스트에서 코로나19까지] 블랙리스트 사회적 기억

<프레시안>은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에서 보내오는 기고글을 통해 블랙리스트부터 코로나19까지를 관통하는 실질적 문제와 쟁점들을 공유할 예정이다. 블랙리스트 권고안 전반에 대한 점검과 비판, 예술인권리보장법, 배제되는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목소리, 블랙리스트 가해자들의 안부, 동물복지보다도 무관심하다는 예술인복지와 예술인고용보험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위기에 놓인 예술계의 문제를 사회 전반에 알리고 블랙리스트와 같은 국가폭력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편집자

문재인 대통령은 아직 문화예술인들에게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공식 인정과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물론 대통령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영화산업에 절대 간섭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 2020년 신년 인사회에서 몇몇 문화예술단체장들이나 유명 작가를 만나 "블랙리스트 사태 때문에 문화예술의 자유에 대해 고통을 준 점에 대해 정말 죄송스럽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것이 인정이라면 인정이고 사과라면 사과일 것이다.

2018년 초에는 영화 <1987>을 관람한 뒤에는 피해 예술인들을 만나 "블랙리스트 얘기를 듣거나 피해를 본 분들을 만나면 늘 죄책감이 든다. 늘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적도 있다. 공모사업에서 배제된 건수가 가장 많아서 주요 피해자로 이날 간담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을 만났던 어떤 연출가 분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주요 피해자를 만나는) 그런 자린지 모르고 갔다, 정말 고통 받은 분들이 따로 있는데 제가 다녀와서 미안하다."

대통령의 진심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정말 고통 받은 분들'이 누구인지 미처 다 알지 못한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도 없다. 대통령이 모든 피해자들을 다 만날 수는 없으니 정부의 수반으로서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실 인정과 사과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설치되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조사위원회)의 조사 활동이 끝난 지 어느 덧 2년도 더 지났다. 조사위원회가 재발 방지를 위해 권고한 후속 조치 중 1번 과제는 대통령의 책임 인정과 사과였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청와대'의 부당한 지시에 따라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산하 공공기관에 강요하였던 사건이다. 일부 혐의가 파기 환송되었다고는 하나 김기춘과 조윤선에 대한 대법원 유죄 판결도 확정되었다. '문재인 지지'를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은 '청와대'와 대통령의 공식적인 블랙리스트 국가폭력 인정과 사과를 아직 받지 못했다.

만약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국가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여 정확한 메시지를 주었더라면, 21대 첫 국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출한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사회적 기억 사업 예산을 기획재정부가 거절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사용하여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위한 사회적 기억 사업' 예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하였다. 만약 문화체육관광부가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다소 애매한 명칭으로 예산안을 제출하였다면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반영하여 주었을까? 그야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억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였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스스로 기억의 주체가 되어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사회적 기억 사업을 하라고 권고한 것은 도종환 전 장관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조사위원회였다. 도종환 전 장관은 기획재정부가 거절한 사회적 기억사업 예산을 상임위에 상정하였다. 국민의힘 최형두 의원은 이를 두고 "어이가 없는 사업이다. 사법적 단죄의 대상으로 잘잘못을 가려서 단죄하고, 이런 일이 없게 해야 하는 사안", "검찰이나 법원이 할 일을 문화계가 기념한다", "나중에 소설이 되거나 영화로 제작되거나 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사회적 기억 사업은 납득이 안 된다"며 "누가 이런 발상을 했나"고 물었다.

누가 처음 그런 발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발상을 권고한 것은 조사위원회였고, 그 권고를 약속대로 수행하고자 한 사람들은 도종환, 박양우 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 최형두 의원의 말처럼 나중에 누군가 블랙리스트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도 있고, 영화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기억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스스로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사업이다. 사업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아카이빙 하는 일이고, 여기에 재발방지를 위한 교육 교재를 개발하는 일,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학술 논문을 공모하는 일,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한 행사 주간을 진행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조사위원회 조사까지 했는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왜 다시 듣겠다고 하는지 궁금한가? 혹시 김기춘 재판에서 피해 예술인들이 법정 증언을 하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김기춘 재판에서 피해자 진술을 한 사람들은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과 산하기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청와대로부터 직권남용과 문화예술인 배제를 강요당한 피해자로서 법정에서 진술을 할 기회를 얻었지만 정작 그들에게 배제된 피해 예술인들은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블랙리스트 재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재판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설치된 조사위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 6000쪽이 넘게 공개된 블랙리스트 백서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청와대 → 문화체육관광부 → 공공기관으로 이어지는 블랙리스트 지시, 실행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목소리다. 우리는 아직 피해 예술인의 목소리로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검찰과 법원이 할 일이 형사처벌과 피해사실 인정이라면, 문화체육관광부가 할 일은 예술인 스스로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말하고 회복해 갈 수 있도록 돕고, 공무원들에 대한 재발방지 교육 교재를 개발하여 보급하고, 관련 학술 연구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원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달곤 의원이 말하듯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사회적 기억사업이 그저 '정쟁을 유발하는' 사업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저 누군가 소설로 쓰고 영화로 만들면 충분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기억사업은 그저 '정쟁을 유발하는' 사업이 아니다. 이달곤 의원이 말하듯 "많이 힘들어했던 공직자들"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그 법정에서 피해자 진술을 하느라 "많이 힘들어했던 공직자들" 이전에 법정에서조차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했던 피해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먼저 기억하고자 하는 사업일 뿐이다.

2015년 10월 18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학로예술극장 씨어터 카페에서는 <이 아이>라는 약 15분 정도 짧은 공연이 관객을 만날 예정이었다. 수학여행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확인하려는 두 엄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세월호를 연상시킨다며 예술위원회 공연예술센터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공연을 방해하려고 몰려와 있었다. 공연 시작 직후 예술위원회 간부 하나가 배우들의 가족과 지인, 공연을 기획한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공연 진행을 중단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얼마 후 공연은 재개되었으나 배우들은 누가 공연을 방해하러 온 사람들이고, 누가 공연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겨우 마치고 나서야 펑펑 울 수 있었다.

4년 후 이 사건에 대한 공개 사과를 위해 사건 현장을 찾아온 박양우 장관이 피해 예술인들과 당시 (세월호가 문제가 되었다는) 사건 경위를 외부에 알린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 조치를 받고 퇴사한 담당 직원에게 건넨 첫 마디는 "속상합니다. (예술경영) 후배에게 미안합니다"였다. 박근혜 정부의 집권당이었던 국민의힘 의원들 중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상임위에 제출한 블랙리스트 사회적 기억 사업 예산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로 상임위가 중단되자 더불어민주당 스스로 철회하였다. 정회 시간 동안 여야 간에 어떠한 대화가 오고갔는지, 예산을 철회한 심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국회 밖에서는 알 수가 없으니 근거 없는 추측은 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국가폭력 사실과 책임 인정"을 요구하며 다시 겨울의 거리로 나선다. 누군가 대답이 있을 거라 믿으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