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의 열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끌어낸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의 '촛불혁명'에서 우리가 경험한, 안도의 한숨이 뒤섞인 묵직한 희열 비슷한 것을 저들도 느꼈을 법하다. 전운마저 감돌던 제46대 미국 대통령선거는 1908년 이래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우편투표와 조기 현장투표만 무려 1억 명을 넘겼다. 곳곳에서 막판까지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처럼 공전의 투표 열기가 표출된 것 자체는 부정투표와 불복, 소송전 같은 소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라 할 만하다. 물론 양편의 지지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대선에 전례없이 참여한 것은 1930년대 경제공황을 능가하는 팬데믹의 가공한(11월 11일 현재 미국 내 확진자 1000만 명 돌파, 사망자 약 24만 명) 여파와 무관치 않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코로나경제'의 현실에서 민심도 들끓었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의사를 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도 코로나19는 이번 미국 대선의 향방을 결정지은 주요 동인 가운데 하나다. 또한 창궐 일로에 있는 전염병에 미개하게 대응한 트럼프를 지지한 48%에 가까운 민의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민주주의 선거는 정해진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그에 기반하여 입후보자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로 나타내는 제도이니만큼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결이 될 수도 없다. 기후변화야 어찌 되든 당장 주머니에 사탕 몇 개 더 넣어주겠다는 사람을 찍을 자유가 있는 것도 민주주의다. 그러한 자유를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매몰 비용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트럼프를 지옥 불에 떨어질 절대 악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판단한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당선 즉시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하겠다는 선언만으로도 조 바이든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밝아진 세상을 약속한 셈이다.
새로운 반체제운동들의 등장과 트럼프의 몰락
선거에서 정책이나 공약을 넘어서 세계관 자체를 다투는 일이 드물지는 않지만 이번 미 대선만큼 세계관의 전선이 극명하게 그어진 사례는 찾기 힘들 듯하다. 두 후보 간의 차이는 무수하지만 기후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에서도 점진적으로 글로벌 그린뉴딜 쪽을 향하는 바이든과 그와는 정반대로 미국 내 석유 및 셰일가스 개발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트럼프는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자본주의세계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과 그런 체제 자체를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 그러니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 사람들이 이번에는 선거라는 형식으로 맞붙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런 연유다. 거대한 대세를 이룬 '푸른 물결'(바이든 지지)과 그와는 또 다른 차원의 대세임이 분명한 '붉은 물결'(트럼프 지지)의 전면적 대결은 근대세계체제 변혁의 맥락에서 역사적 시각과 성찰을 요청한다. 이 문제는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누구의 당선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떻게 더 유리한가에 골몰하거나 미국의 지도를 앞에 두고 정치공학적 설명 또는 해석에 몰두해온 터라 온전히 부각되지 못했다.
2020년 미국 대선의 역사적 열기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가랑비에 옷이 조금씩 젖다가 불현듯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대선 국면에서 사신(死神) 코로나19의 개입은 야릇했다. 경제를 망가뜨리고 엄청난 인명을 앗아가는 와중에 코로나19가 트럼프의 (그나마 가리고 있던) 가면을 완전히 벗겼고 그 민얼굴을 확인한 두 진영의 사람들은 제각각 더 열렬하게 투표현장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는 팬데믹은 아랑곳없이 재임 대통령이 누리는 온갖 특권과 특혜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용했다. 그러나 그의 초·중반 우위가 주요 경합주에서 - 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팬데믹 상황에서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한 - 우편투표로써 말 그대로 피 말리는 초접전 끝에 뒤집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이 역전의 동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도 아니다. 가깝게는 1968년 5월 혁명의 정신을 이어간 변혁 운동이야말로 그같은 동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10년 사이에 열성 운동가들의 네트워크가 독특한 구심력을 발휘하는 와중에 수평적·탈위계적 방식으로 - SNS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 전개된 저항운동은 괄목할 만하다.
가령 2011년 9월 17일에 뉴욕시의 주코티(Zuccotti) 공원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명된 '월가 점령'운동을 떠올려보자. 팬데믹은 99% 대 1%의 현실이 바뀌기는커녕 더 심화되었음을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재확인해주었다. 2017년 1월 21일,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 바로 다음 날에, 그 인종주의적이며 성차별적인 대통령의 선출에 항의하여 워싱턴 DC와 미국 각지에서―그에 호응한 673곳에 이르는 세계의 무수한 도시에서 -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여성행진'(Women's March)은 어떤가. 미국 역사상 단일 시위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300~400만 명 추정) 참여한 이 행진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미투운동은 자본주의체제에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의 끈질긴 해악을 고발하고 맞섰다.
그런가 하면 지난 5월 25일에 공권력에 의해 백주대낮에 살해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은 흑인생명권운동(Black Lives Matter, BLM)을 전국적으로 맹렬하게 재점화했다. BLM운동을 사실상 촉발시킨 가르자(A. Garza), 토메티(O. Tometi), 컬러즈(P. Cullors) 같은 흑인/여성/성소수자들은 여성운동과 힘을 합쳐 미대륙 곳곳에 남아 있는 식민주의 유제를 청산하는 투쟁으로까지 나아갔다. 이 운동은 오바마 행정부 때 관 주도의 흑인 생활 향상 프로그램인 MBK(My Brother's Keeper)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의식을 내장한바, 체제 자체와 싸우지 않는 한 인종주의의 구조적 현실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싸움의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요컨대 형식적으로 시민적 권리는 부여받았으면서도 자신의 몫을 끊임없이 빼앗기는 노동자와 여성, 흑인은 여전히 근대세계체제 변혁의 주역이며, 이들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표로 발화된 것이다. 목하 비공식노동자들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소수자들, 소수인종들 사이의 새로운 화학적 연대가 형성 중에 있다.
'바이든 시대'의 미국
2010년대에 들어 맹렬하게 분출되면서 선거 국면에서도 저류를 이룬 이 변혁운동의 정치적 파장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서 2020년 미국 대선의 투표 열기와 바이든의 승기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몇 차례의 예열 과정을 거쳐 폭발한 열기는 기득권세력과 트럼프 추종자들의 대대적인 결집을 불러오기도 했으니, 바이든의 당선은 한 노회한 정치가 개인을 넘어 사실상 미국 반체제운동의 신승(辛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바로 그 점을 주목하면서 변혁운동의 세계적 연대를 상상하기보다 미국의 분열이나 '실패한' 또는 '망가진' 국가로서의 미국을 (재)발견하는 데 자족한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최악의 팬데믹 현실에서 가까스로 얻어낸 이 승리는 어쩌면 대대적인 반동과 더 많은 좌절을 예고하는 서곡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바이든 행정부가 물려받게 될 '트럼피즘(Trumpism, 트럼프식 작태)'의 분열적 유산과 팬데믹이 파괴한 미국 경제의 실상, 점점 가중되는 기후재난의 사회적·경제적 비용, 민주당의 현재 역량 등을 따져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정치공학적 계산 내지는 전망에 너무 매달릴 일은 아니다. 최후의 순간에 바이든을 승좌에 올려놓은 그 거대한 푸른 물결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4년 전 한반도의 남쪽 전역에서 물밀듯이 퍼져나간 '촛불'의 함성까지를 겹쳐서 보면 '권불십년'이라는 진실은 변치 않으며 교만하고 무책임한 권력(자)을 바꾸는 민중의 존재만이 미래를 결정짓는 역사의 주역임이 더없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속 현재 미국은 분명히 '실패한 국가'이고 세계에 엄청난 '부수적 피해'를 끼친 희대의 어릿광대 같은 권력자는 역시나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그리고 바이든의 승리조차 자본주의근대 너머로 가는 긴 싸움의 견지에서 보면 작은 이정표에 불과하겠지만, 이번 대선에서 존재를 드러낸 시민들은 미국의 앞날을 밝히면서 우리에게도 '촛불'의 의미에 대한 발본적인 성찰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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