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었을 때 내가 경험해 본 성교육을 돌아본다. 나의 경우에는 다른 청소년들보다 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았다. 기껏해야 2~3번 정도 차이겠지만, 주변에 아는 성교육 강사가 있었기에 센터에서 성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성교육의 경우에는 주로 임신과 피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성차별적인 내용도 많았다. '여성은 나중에 출산을 해야 되니 몸을 조심히 해야 된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월경을 해야지만 진정한 여성이 될 수 있다' 같은 말을 듣기도 했다. 학교 밖의 센터에서 겪어 본 성교육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임신을 하면 몸이 얼마나 무거워지고 신체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체험하기 위한 옷을 입어 보는 등 임신 대비가 주된 내용이었다. 이렇듯 다수의 청소년들이 학교 등에서 겪는 성교육은 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 내용을 잘 다루지 않는다. 특히 여성 청소년은 '이후에 임신을 준비해야 될 존재'로서만 생각되는 교육을 받곤 한다.
나의 성교육 경험을 떠올리게 된 것은, 올해 8월, 여성가족부가 초등학생 성교육을 위해 진행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을 두고 때아닌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에서 2019년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의 일환으로 5개 초등학교에 배포한 145종의 책 중 7종에 대해 일부 단체들이 문제 삼은 것이 시작이었다. 문제제기를 한 단체에서는 책들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지운 뒤, 일부 그림과 설명을 부각시켰다. 성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담은 책이 어린이에게 성관계를 부추긴다거나, 다양한 성소수자를 평등하게 묘사한 책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급기야 2020년 8월 25일 김병욱 국민의힘 국회의원도 나다움 어린이책 중 일부를 놓고 '조기성애화 야기 우려',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표현' 등의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정부는 해당 책들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린이·청소년의 알 권리와 교육권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정보에 접근할 권리, 특히 복지와 건강을 위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17조 : 당사국은 대중매체가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을 인정하며, 아동이 다양한 국내적 및 국제적 정보원으로부터의 정보와 자료, 특히 아동의 사회적·정신적·도덕적 복지와 신체적·정신적 건강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정보와 자료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후략)
해당 책들에 대해 김병욱 의원 등이 문제 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성교에 대한 적나라한 그림, 정보',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부정적 편견 없이 성에 대하여 정확하고 명확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국제인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의 정보 접근권이다. 일부 비청소년들이 자의적 가치관으로 '어떻게 성에 대한 이런 구체적 내용을 애들에게 알려 주나' 하며 함부로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교육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 등에 대한 존중의 진전',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집단 및 원주민 등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 평화, 관용, 성(性)의 평등 및 우정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유사회에서 책임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준비'를 목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교육이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이해나 관용, 평등, 그리고 인권의 존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성교육에 대한 국제지침에서도 차별금지, 평등, 성적 다양성 등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이번 논란에서 지목된 책들에서 소수자들이 평등하게 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차별 없이 묘사한 내용 등은 이러한 교육의 목적과 지침에 일치한다. 오히려 해당 책들 중에는 1970년대에 처음 집필된 책 등이 포함되어 있고, 다양성이나 평등의 관점에서 부족한 내용도 눈에 띌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미진한 부분은 '어린이들이 봐선 안 될 책'이라고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 독서와 교육의 과정에서 다른 교육 자료를 함께 사용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보충하도록 할 문제이다. 그러나 김병욱 의원 등은 동성애자나 성소수자, 다양한 가족 형태 등을 긍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어린이·청소년의 온전한 교육에 대한 권리 보장에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나다움 어린이책' 논란과 정부의 책 회수 조치는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국회와 정부가 학교 현장에서 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 성소수자에 대한 반차별적 내용 등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해당 책의 보급이나 교육 활용이 어려워진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내용을 다루는 교육 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차별과 편견 없이 정확한 내용을 담은 성교육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 소수자 등에 대한 교육에 참여할 어린이·청소년의 권리 실현에 부정적인 환경이 된 것이다.
이 논란에서 간과되고 있는 점은, 바로 어린이·청소년의 알 권리와 교육권이다. 나다움 어린이책을 둘러싼 논란에서는 어린이·청소년에게 '뭘 가르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마치 한쪽은 보수적인 성교육을, 한쪽은 진보적인 성교육을 주장하는 것처럼 다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어린이·청소년을 이 사태에서 단지 가르치는 대로 배워야만 하는 존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어린이·청소년은 성교육의 과정에서 성적 자기결정권과 알 권리, 교육권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의 주체이다. 성교육의 내용과 방식 역시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너무나 쉽게 해당 책들을 회수하겠다고 결정하면서 '문화적 수용성' 문제라고 이유를 댔다. 정부가 보편적 인권의 관점이 결여된 채, 이 문제를 문화적 차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다
이 사태의 1차적 책임은 일각의 반인권적 의견을 그대로 국회에 들고 와 논란을 일으킨 김병욱 국민의힘 국회의원에게 있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곧바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에서 거론된 책들을 회수하겠다고 밝힌 정부에게 있다. 사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청소년의 인권을 존중하는 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2015년, 국가 수준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청소년의 성적 권리나 성소수자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 말라고 직접 언급하기까지 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도 2019년, 대한민국에 대한 심의 결과 학교 성교육에서 성소수자 등을 다루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며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관련 내용을 적절히 포괄하여 적합한 성교육을 제공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심의 당시 한국 정부 담당자의 답변은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청소년의 인권이나 성소수자의 인권을 논란이 되고 부담스러운 요소로 보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모습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 김병욱 의원의 지적 하루 만에 정부가 책 회수 등을 결정했던 것은, 한국 정부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할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일관된 태도의 산물인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일까. '나다움 어린이책' 사건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성교육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부디 이 사태가 정부가 반인권적 주장에 굴복하여 책을 회수하고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를 후퇴시킨 결말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의 소극적·미온적 태도는 청소년을 비롯해 소수자의 인권 현실을 후퇴시킬 뿐이다. 이번 사건을 그동안 한국 정부의 방침과 학교 성교육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청소년의 인권과 소수자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학교 운영 방침과 교육과정을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고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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