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무원에 대한 북한군의 살인, 시신 훼손 사건은 묵과할 수 없는 범죄다. 북한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사건 보고를 받고 나서 어떤 일을 했는지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국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고, 국가의 시민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해야 할 일이 있다. 재발 방지 장치다. 이것은 특히 북한의 시스템을 움직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실용적으로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박왕자 씨 피살 사건 이후 우린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년 된 문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치권의 대응이나 언론의 보도 방향을 보면 우려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국정감사와 내년 '지방선거급' 재보선을 앞둔 시기라 남북 대결 정치를 부추기고 지난 4년간의 남북관계(보수 야당의 표현대로라면 위장 평화 쇼)를 해체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해는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21세기에 '계몽군주'라는 말이 극찬으로 들리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국민의힘 김소연 당협위원장이 '달님은 영창으로'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논란이 되자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를 비하한 표현)들, 무슨 국가원수 모독인가"라며 "흥분하신 대깨문들에게 두 번 사과하면 저도 '계몽군주'되는 것인가?"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사과 메시지와 북한의 반응을 본 유시민 작가가 "(김정은에) 계몽주의 군주의 면모"가 있다고 분석한 일을 꼬집은 것이다. 김소연 위원장은 왕정 체제의 절대 군주가 되고 싶었나 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칭송하면서 독재자의 친구, 폭정의 방관자로 나섰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계몽군주라는 말 안에는 독재와 폭정이 이미 내재돼 있다. 계몽군주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절대왕정시대의 유물이며 기본적으로 잔혹한 군주 독재를 의미한다. 계몽 절대 군주들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다지고 현대적 의미로서 '국가'란 틀의 초석(물론 사후 역사적 평가다)을 놓는데 꽤 성공하기도 했으나, 권력과 내치를 위해 군사를 키워 전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탄압했다. 거칠게 말해 '절대 왕정 시대의 노력하는 독재자'란 의미다.
군주의 '선함'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이런 체제는 근대로 들어가는 과도기 형태로 평가받기도 한다. 요컨대 유시민 씨의 계몽군주 비유는 북한의 '군주정'이 현재 '과도기적 상태'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계몽군주는 칭송도 아니고, 계몽군주같다는 말은 계몽군주와 친구가 되고싶다는 말도 아니다. 계몽군주가 칭송이라는 "요설"은 오히려 주호영 원내대표가 구사하고 있는 셈이고, '나도 사과하면 계몽군주가 되느냐'는 반응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논리의 잡동사니다.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당신은 계몽군주 같다'고 하는 것은 조롱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민주주의 지도자에게 계몽군주같다는 말은 모욕에 가깝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이나 프리드리히2세를 계몽군주라고 하면 칭송의 의미가 있지만, 문재인이나 메르켈을 계몽군주라고 하면 모욕이다. 21세기에 몇 안 남은 유사 군주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계몽군주같다고 한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을 사용한 분석이고, 풀어 말하면 김정은이란 전제군주가, 다양한 목소리를 배척하면서(다양한 목소리는 전체주의적 개혁에선 비효율적으로 취급받는다) '짐=국가'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 스스로 개혁가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북한의 특수성에 빗대 '계몽군주'라는 비유로 상황을 설명하려 한 것인데, '유화책을 사용할 줄 아는 왕정 독재자'라는 말이 무슨 칭송인지 알 길이 없다.
한국 국민 살해 사건과 함께 언급된 '계몽군주'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이물감이 든다고 해서 '이것은 칭송이다'라고 의미를 비틀어버리는 이유는 뭘까. 국회의원도 아니고 민주당 정부 인사도 아닌 일개 정치 평론가의 해설을 두고 며칠 째 '실검 장사'에 나선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대체 뭘까. 비유를 통한 정세 분석을 미치광이 독재자에 대한 칭송으로 치환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지금은 대결적 남북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북한을 다루려는 사람들의 분석적 레토릭을 오염시키고 있다.
북한의 만행에 대해 비군사적 규탄 방식을 총동원할 수 있다. 다만 북한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면, 남북관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당연하지만 동시에 남북 긴장 완화와 재발 방지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그는 28일 "여권 일각에서 우리 국민의 생명보다 남북관계를 우선에 두는 듯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현, 유시민, 이인영, 그리고 여당 일부 의원들을 두고 한 말 같은데, 의도하진 않겠겠지만, 그의 발언은 보수 진영의 레토릭에 근접해 보인다. 이를테면 국민의힘이 내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 국민 생명보다 김정은과 관계가 우선'이라는 식의 비난이다. 대통령과 북한최고지도자의 관계를 사적 관계와 사적 이익으로 교묘히 오염시키며 대북 강경 여론을 부추긴다.
남북관계와 국민의 생명은 별 건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바로 국민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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