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인가 7월 어느 날의 일이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다음해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할 무렵인데, 민주노총이 참여를 거부하고 있었다. 참여하게 되면 기존 입장을 변경하여 최저임금 산입 범위와 관련하여 일정한 타협이 불가피한 국면이었다.
당시 필자는 민주노총 부설 정책연구원의 객원연구위원 자격으로 때마침 열린 자문회의에 참가하여 민주노총의 분위기를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상견례로 열린 첫 회의였지만 현안인 최저임금위원회 참여 건으로 논의가 뜨거웠다.
민주노총 내부의 민족해방(NL) 정파인 '전국회의'에 속한 이는 최저임금위원회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그해 4월 말 남북정상 간의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하반기가 되면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테니 최저임금위원회 참여 같은 사소한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민중민주(PD) 성향으로 '민교협'과 교수노조에 속한 이 역시 자잘한 내부 논란만 일으키는 최저임금위원회에 복귀할 필요 없이 하반기에 있을 사회적 대화 기구의 출범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노동' 정권인 노무현 정권과 달리 문재인 정권은 '친노동' 정권이기에 최저임금같은 작은 문제에 얽매이기보다 큰 스케일에서 노사정 대화로 직행해야 한다는 분석을 곁들였다.
사회적 대화 경험의 일상적 축적이 중요
그해 1월 출범한 김명환 위원장의 민주노총 집행부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 문제를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최저임금위원회가 아닌 국회로 넘기는 실수를 범했고, 그 결과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데도 최저임금위원회에 불참하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필자에게 발언 순서가 오자, 당연히 최저임금위원회에 하루빨리 복귀하여 민주노총이 최저임금 결정에서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은 '보수적 자유주의' 정부라는 데서 그 성격이 동일함을 지적하고 박근혜-이명박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친노동적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보수 정권'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사회적 대화 기구에의 참여는 해야 하나, 이는 사회적 대화가 잘 될 것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의 전국 중앙(national center)으로서 민주노총이 정부와 자본을 상대로 한 정보와 협의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축적할 필요가 있어서 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최저임금위원회 역시 사회적 대화 기구의 하나임을 지적하고, 일상적인 사회적 대화 활동을 중시할 때 노사정위원회 같은 전국 수준의 사회적 대화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민주노총이 더이상 아웃사이더로 겉돌지 말고 한국 사회의 주류(main stream)로 올라설 수 있는 역량과 비전을 다져야 한다는 속내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2년 전 기억을 들추는 이유는 사회적 대화와 노사정 관계에 대한 민주노총 내부의 분위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대개 NL은 민족 모순을 중시하고 PD는 계급 모순을 중시한다고 평가한다. 필자가 보기에, 두 정파는 조합원 권익 향상을 위한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보다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거대 이념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필자 역시 궁극적으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요하다고 보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단체교섭과 민주적 노사관계의 구축 같은 일상 활동이 중요하며 그 연장선에서 중층적(multi-layer) 사회적 대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적 축적이 전제되지 않는 질적 도약은 존재할 수 없다.
'대중 운동' 중심이냐, '변혁 운동' 중심이냐
조합원의 권익 향상을 위한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day-to-day activity)에 기반한 대중 운동에 중심을 두는 입장에서는 최저임금과 사회적 대화 같은 제도적 변화가 중요하다. 하지만, NL이든 PD든 간에 정파의 노선에 상관없이 체제 변혁이라는 거대 담론에 중심을 두는 입장에서는 노동조합 일상 활동과 대중 운동은 이념적 목적 달성의 하위에 자리 잡게 된다.
1995년 11월 출범 이래 민주노총 운동 안에는 단체교섭과 사회적 대화 같은 노동조합 일상 활동에 기반한 대중 운동을 중시하는 흐름과 체제 변혁을 통한 이념의 실현을 지향하는 '선진 인자(정파)'가 주도하는 변혁 운동을 중시하는 흐름이 협력하고 갈등하면서 공존해왔다. 두 흐름의 경쟁은 때로는 민주노총 운동의 강점으로, 때로는 민주노총 운동의 약점으로 상호작용해 왔다.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은 1998년 2월에 합의된 정리해고제와 파견노동제에서 파생된 '트라우마'보다는 운동의 중심을 대중 운동과 변혁 운동 중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이념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할 때, 2017년 말 '투쟁과 교섭을 통한 사회적 대화'를 내걸고 조합원 직선제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김명환 위원장이 임기 2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핵심 공약인 사회적 대화를 힘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참여한 '코로나19 노사정 합의'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격론을 벌였으나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
5개 장에 걸쳐 64개 실천방안을 다룬 10쪽의 합의문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는 가늠하기 어려운 침체를 겪고 있다"로 시작된다.
전문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생존을 걱정하고, 비정규직∙하청업체∙특수형태근로종사자∙장애인 등 취약 계층들에게 그 어려움이 집중되고 있다"면서 "기업이 위기에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하고, 하나의 일자리라도 더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노사정 대표자들은 국난에 준한 위기를 맞아 기업의 힘만으로는 고용유지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며 노사정의 연대와 협력이 절실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비상한 각오로 이번 사회적 대화에 나섰다"고 합의안의 배경을 밝혔다.
경제활동 일선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기업의 힘만으로는" 고용 유지가 힘들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국제노동기구는 6월 30일 나온 <코로나19와 일의 세계> 다섯 번 째 보고서에서 지난해 4/4분기와 비교할 때 올해 들어 세계적으로 4억 명 분의 전일제(full-time)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민주노총이 요구한 '해고 금지'와 '총고용 보장' 문구는 합의문에 담기지 못했는데, 이는 교섭단의 문제라기보다 현재 노사정 힘 관계의 결과로 보인다. 민주노총의 조직 역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해고 금지와 총고용 보장은 "고용유지 지원제도 확충, 특별고용지원업종 기간 연장 및 추가 지정, 고용유지 지원제도 사각지대 축소,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간 협업 강화, 고용유지를 위한 노사의 고통분담, 상생 협력 확산" 등을 정리한 합의문 1장에 내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고용 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영세사업장 취약 노동자 등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효과적인 대책으로 의미가 있다.
또 하나 필자가 주목하는 바는 "정부와 공공부문은 모범적 사용자로서 위기 극복과 고용유지를 위한 노력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대목이다. 정부가 "모범적 사용자"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인정한 것은 향후 공공부문 노사관계를 풀어가는 데서 중요한 계기로 평가할 수 있다.
노사관계의 '사'는 회사가 아니다
민주노총 일각에서는 "노동계는 코로나19에 따른 매출 급감 등 경영위기에 직면한 기업에서 근로시간 단축, 휴업 등 고용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 이에 적극 협력한다"는 문구를 두고 '투항 선언'으로 본다. 하지만, "경영위기에 직면한 기업"에서 "고용 유지"를 위해 "근로시간 단축" 및 "휴업"과 관련하여 노사가 "협력"하는 것은 노동자 삶의 터전인 기업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여기서 기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업은 노동자의 적이 아니다. 기업은 생산 현장인 동시에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 즉 노사관계(勞使關係)가 이뤄지는 마당이다. 어느 나라에도 '기업 죽이기'를 하는 노동조합은 없다.
노동자라면 사용자 이상으로 자기가 일하는 기업이 잘되길 바란다. '현대자동차가 망하면 좋겠다'는 현대자동차 조합원이 있을까. "기업이 (코로나19) 위기에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들을 위해 노사가 협력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업 살리기 및 산업생태계 보전"을 명시한 합의문 2장에서 제안된 "(기업의 생존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재정∙금융∙외환 등 거시정책 수단들의 적극적 운용"과 이를 위한 "금융기관과의 협력 강화", "기간산업 안정기금 등 자금 조달", "내수 진작을 통한 경기회복 및 투자여건 개선", "(공공조달 분야가 선도하는) 임대료 인하, 착한 프랜차이즈 운동, 선결제" 등의 대책은 공급 사슬(supply chain) 하위에 있는 하청업체와 중소영세업체의 고용 유지를 위한 기업 지원책의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된다.
전 국민 고용보험과 상병수당을 향한 로드맵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 등 사회안전망 확충"에 관련된 노사정 합의문 3장은 "전 국민 고용보험을 위해 금년 말까지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로드맵>을 수립"하고,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고용보험 가입을 위한 정부 입법을 추진"한다는 방향을 밝히고 있다. 고용 불안정과 실업에서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취약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3장은 "자영업자 등으로 고용보험 적용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소득정보 현행화, 유관기관 간 정보공유 체계 강화를 추진"하고, "국민취업지원제도 대상을 기준 중위소득 50% 이하 저소득층으로" 하며, "고용센터의 상담 인력 및 인프라"를 강화하고, "고용보험기금에 대한 일반회계 지원 확대 등 재정안정성 강화 방안을 적극 검토"하며, "고용위기 업종 재직 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팬데믹 위기 국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4장은 "국가 방역체계 및 공공의료 인프라 확대"에 관한 것이다.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을 위해 "공동 노력"하고, "정부는 감염병 대응과 지역 필수의료 확충을 위한 공공병원을 늘리고", "지역공공-민간병원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며, "국립공공의료대학 설립 등을 통해 전문 의료인력을 안정적으로 양성"하며, "보건의료 인력의 확충과 근무환경 개선"을 추진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한 휴가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은 바람직하다.
민주노총이 요구한 '상병수당'과 관련된 직접적인 문구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업무와 연관이 없는 질병 등으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득의 손실로 인한 생계 불안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및 재정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적 논의를 추진한다"는 대목은 상병수당과 유급병가(paid sick leave) 제도화를 위한 논의의 출발점을 확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행점검 및 후속 논의"를 명시한 5장은 노사정 3자, 특히 양대 노총의 입장을 적절하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총리실의 부처 간 역할 조정 지원"과 "부처별 위원회와 이미 설치되어 운영 중인 회의체 활용"을 언급한 대목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가 어려운 민주노총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합의 전망에 얼굴 찌푸렸을 경총과 수구 관료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는 부족하고 아쉽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노총 일각에서 말하듯 "야합·배신"은 아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교협 이도흠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주장한 "노동 배제의 연장"은 더더욱 아니다.(☞ 관련기사 : '노사정의 잠정 합의안은 노동 배제의 연장이다')
필자가 보기에 "임금 삭감과 고용 보장의 맞교환"을 원했던 경총의 의도는 관철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 노사정 합의안에 경악할 집단은 경총을 비롯한 사용자단체와 수구 관료들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다수의 반발로 무산될 위기에 처한 사회적 대화의 실패를 가장 환호할 이들은 다름 아닌 '독점 자본-관료 동맹'인 것이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어찌하여 물잔에 물이 절반밖에 없느냐'가 아니라, '어렵사리 애써 절반을 채웠다'는 마중물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필자는 이번 합의안을 건너갈 강 너머에 있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코로나19 위기 사태라는 강을 건너려는 우리 코앞에 놓인 첫 디딤돌로 평가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동계 선배가 민주노총 정파의 반발로 무산될 위기에 처한 노사정 합의안을 두고 "버스 떠났다"고 하길래, "걷기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버스 놓쳤으니 어떡하냐"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선배 대답이 걸작이었다. "각자 다 자가용 있슈."
내부 갈등 종식 위해 대의원대회 열어야
김명환 집행부는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에서 만들어진 합의문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중앙집행위원회를 넘어 산하 가맹조직 조합원들의 폭넓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임시대의원대회 소집을 요청했다. '투쟁과 교섭을 병행한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조합원 직선제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위원장의 당연한 행보로 판단된다.
필자는 민주노총 일각에서 '야합'으로 평가하는 이번 노사정 합의문을 민주노총 조합원과 대의원이 자기 눈으로 읽고 자기 머리로 판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운동 상층부의 '정파적' 판단이 아니라, 점점 비어 가는 주머니에서 꼬박꼬박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의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 종식을 위해 진짜 주인인 조합원들의 건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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