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서울 서교동에 있는 퀴어 페미니즘 책방 '꼴'에 대한 '테러'가 있었다. 서점 벽에 래커로 X를 그리고, 포스터에 "동성애 하면 부모님이 슬프셨겠죠?", "동성애는 죄입니다!" 등의 글자를 쓰는 등 악의적인 훼손이 가해졌던 것이다. 범인은 얼마 안 가 잡혔고 '재물손괴'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범인은 책방 꼴 측에 합의해 달라며 남긴 글에서, "미성년자 보호 차원에서", "미성년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염려되어" 한 행동이었다며, 도리어 책방 꼴에 "회개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차별금지법도 무엇도 없는 상황에서 비록 법에 의한 처벌은 재물손괴로만 가해지겠으나, 범인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차별 선동, 혐오 표현 행위로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범인이 자신의 범행 동기로 "미성년자"를 언급한 점이 눈에 띈다. 사실 상당히 흔한 경우이긴 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하려 드는 사람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말도 "청소년, 미성년자들도 다 지나 다니면서 보는 공개된 장소인데" 어찌 공공연히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표출하느냐는 것이다. 몇 년 전 EBS의 토크쇼 '까칠남녀'에 항의하던 단체들 역시 "교육방송인데 아이들을 망친다"라며 프로그램 중단을 요구했던 바 있다.
이처럼 성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언행에 청소년을 들먹이는 것이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대표적 예로 러시아에서는 2013년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미성년자에게 비전통적 성 관념을 형성하는 정보, 비전통적 성관계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정보를 선전하거나 주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비전통적"이란 개념은 말할 것도 없이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타깃으로 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러시아에서는 '비전통적 성 관계'(동성애)가 '전통적 성 관계'(이성애)와 평등하다고 미성년자에게 홍보하는 것도 불법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혐오의 명분을 '청소년들에게 전통적인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데서 가져오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 '청소년'이 불러일으키는 것
성소수자를 차별하고자 하는 사람들, 혐오하는 사람들은 왜 단순히 '동성애는 나쁘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아이들을 동성애로부터 지켜야 한다'라고 말할까?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청소년이 평등한 구성원이 아닌 교육·선도의 대상으로 먼저 여겨지는 것과 관계가 깊다.
비록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으나, 다양성 존중은 우리 사회가 표방하는 주요 가치 중 하나이다. 그래서 대놓고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예컨대 2017년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동성애도 사랑의 한 형태로 본다"라는 것을 긍정하는 응답이 56%로 과반이 나오기도 했다. 즉, 성소수자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진 않지만, 잘 이해할 순 없지만, 다른 것뿐이니 존중할 수는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린이·청소년을 불러오면, 사람들이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비청소년(성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서로의 취향이나 삶을 존중한다'라는 원칙이 힘을 발휘하는 편이다. 반면 어린이·청소년들의 경우에는, '바람직한 것', '사회적으로 올바른 것'을 가르치고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청소년'과 '동성애'를 연결시키면, 프레임이 달라지는 효과가 생긴다. '동성애를 사랑의 한 형태로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르치거나 알려줄 만큼 동성애가 바람직하고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이성애가 동성애에 비해 우월한 것도 아니요,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에 비해서 잘못되었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차별적인 편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그저 다양성이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 정도에 머물러 있는 실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큼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한층 더 대답을 주저하기가 쉽다.
즉, '아이들'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프레임을 우열의 문제, 사회의 주류적이고 더 인정받고 권장받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리는 문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문제를 시민들 사이의 평등과 존중이 아니라, '부모(어른)'와 '자식(아이)' 사이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면,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은 쉽사리 공존과 존중의 대상이 아닌, 독선적 판단, 교정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청소년을 보호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말은 강력한 도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린이·청소년의 순수성이나 무고함에 의해 뒷받침되고, 사회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정당성을 얻는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에게 긴급하게 나설 것을 요청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서 행동해야 한다'는 호소는 차별을 선동하고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동기이자 명분이 되어 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과격한 행동, 폭력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해 준다. 책방 꼴에 래커와 매직 등으로 공격을 가한 사람처럼 말이다.
청소년을 존중했다면
어린이·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성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물론 명백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자 혐오이다. 그리고 이런 행태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깔고 있기도 하다. 어린이·청소년을 자신의 개성과 인격을 가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일방적인 선도·교육·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을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어린이·청소년들이 제각각 존중받아야 할 다양성과 개성을 가진 존재들임을, 어린이·청소년 중에도 여러 소수자들이 있을 것임을 인정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어린이·청소년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차별 선동이 더 설득력을 가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성소수자의 경우가 대표적이긴 하나,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각종 소수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이들'이 소환되곤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외국인이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면서 '아이들을 그들의 범죄로부터 지켜야 한다'라는 식의 논리를 펴는 식이다. 노숙인이나 빈민, 때로는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청소년을 혐오의 핑계로 삼는 것이 유독 더 힘을 얻는 것은, 어린이·청소년을 함께 살아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을 대할 때 존중하는 태도보다도 가르치려 들고 선도해야 한다는 태도가 앞세워지는 사회는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서로 얽혀 있는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고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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