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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처음 듣는 김지은의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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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처음 듣는 김지은의 두 번째 이야기

[프레시안books] <김지은입니다>

"그 '안희정'이 정말? 말도 안 돼. 뭐가 아쉬워서? '저 여자'가 정말 성폭력을 당한 게 맞나? 그러기엔 너무 차분해 보이는 걸. 이제 와서 미투를 하는 이유는 뭘까.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불륜이었는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미투'로 복수하려고 한 거 아닐까."

안희정의 미투는 다른 누구의 미투보다 큰 충격이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 인물이었다. 충남도지사 출마 당시 그의 여성 관련 공약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정치에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런 그가 권력형 성폭력의 주범이라니.

배신감과 충격을 견디기 어려웠나보다. 기존의 현실(대권주자·진보인사·페미니스트·젠틀한 이미지의 안희정)을 뒤집고 새로운 현실(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위선자 안희정)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당장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그것도 아주 비겁한 방식으로. 피해자를 의심했다. 같은 여성인 나도 별 수 없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그 후의 일들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2019년 9월 9일,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을 받기까지, 아니 그 후에도 세상은 김지은에게 참 잔인했다. 재판 내내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안희정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언론을 통해 파편화되어 전해졌다. 마누라비서, 안희정을 좋아해서 직장도 때려치고 쫓아다니던 팬, 부부 침실이 어쨌고 순두부가 저쨌고. 모두가 법원에서 객관적인 증거로 반박된 거짓들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그 '김지은'으로부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책 <김지은입니다>(봄알람 펴냄)는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토해내듯 전하는 당사자 김지은의 이야기다. 저자 김지은은 "적어도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 싶었다"며 글을 쓴 이유를 밝혔다. 책에는 권력형 성폭력이 이뤄지는 과정과 이를 고발했을 때 가해지는 2차 가해, 그로 인한 고통이 절절하게 담겼다. 문장 문장이 아프게 읽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크고 무거운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 같다.

대법원으로부터 안희정 성폭력 유죄 확정 판결이 났지만 여전히 김지은의 피해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그게 2차 가해인 줄도 모르고 '합리적 의심' 운운하는 사람에게 더더욱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됐다. 책은 '1장 미투 : 권력을 향한 고발'로 시작한다. 안희정에게 마지막 성폭행을 겪고 미투를 결심하고 방송에 나서기까지 심정을 숨 가쁘게 그린다. '2장 노동자 김지은'에서는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만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성폭력 피해자 이전에 그는 노동자였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그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모습과 같다.

'3장 피해자 김지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김지은이다. 재판 과정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안희정 측의 거짓말과 이를 밝혀내는 과정이 반복된다. 안희정 측의 조직적인 2차 가해도 이야기한다. 절정은 '4장 세상과 단절'이다. 숨어 지내면서 기록한 메모 형식의 글들을 실었다. '5장 그래도 살아간다'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현실과 극복의 과정이 정리됐다. '6장 위드유 : 연대의 마음이 모이다'에서 저자는 554일간 함께 해준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외에도 JTBC 앵커룸 미투 당시 했던 말들이 스크립트 형태로 남았다. 김지은의 편에 선 동료들이 보낸 탄원서, 1심과 2심, 대법원 재판 때의 최후 진술과 판결이 끝났을 때 냈던 입장문, 2018년 9월 <노동과 세계>에 기고한 글도 실렸다. 세상과 단절됐던 그가 얼마나 세상에 전하고 싶던 이야기가 많았는지, 남겨진 그 글들을 통해 느낄 수 있다.

평범한 노동자에서 평범하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로

그는 열심히 살아온 노동자였다. 집안의 가장이었고 아픈 가족이 있었고 갚아야 하는 학자금이 있었다. 노동 조건은 평균보다 열악했다. 출퇴근의 구분이 없었다. 게다가 인사권자인 안희정의 '심기'에 따라 고용여부가 결정됐다. 심기를 맞추는 일, 그가 처음 수행비서가 됐을 때 전임자에게 받은 인수인계다. 그런 자리에서 '첫 여성 수행비서'라는 부담과 편견을 지고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성실히 살아왔던 그의 인생은 되려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으로 의심을 샀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자 대학원에 간 것은 '범죄를 거절했어야 마땅한 판단력 있는 고학력 여성'이라는 근거가 됐다. 선거 캠프에 들어간 이유는 팬심으로 해석됐고, 근무 시간 제한 없이 일에 매진했던 것은 피고인을 좋아해서였다고 매도됐다.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한 미투의 후폭풍은 예상했지만 고통스러웠다. 안희정의 조직이 나서서 온갖 거짓말로 그를 '이상한 여자'로 만들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었다. 김지은은 "2차 피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배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며 "재판 내내 안희정의 성폭행을 증명하는 것보다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들을 탄핵하고 공방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평범한 일상

미투 이후 그의 일상은 무너졌다. 꽁꽁 싸매고 다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게 되는 미세먼지가 반갑기까지 했다. 작은 약봉지도 거기 적힌 이름도 누가 알아볼까 두려워 잘게 잘라 버렸다. 신변보호 팔찌를 신청할까 했지만 권력기관 곳곳에 퍼진 안희정의 위력이 두려워 포기했다.

'피해자다움'에 갇혀갔다. 예쁜 파자마 잠옷도 입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느 활동가가 사다 준 호떡을 먹어도 되는 건가 고민했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것도, 아끼는 동생의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는 것도 변호사에게 물어봤다. 신경쇠약과 강박증이 왔다.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여러 날을 생각했다.

"일상이 살얼음판처럼 조심스럽다. 발을 내딛으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고, 발밑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그물을 치고 기다리는 것 같다"는 말이, 위태로운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지은은 언제까지고 혼자가 아니었다. 홀로 나선 그의 곁에 연대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며 더 단단해졌다.

김지은은 "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이 직장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오랜 시간에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특히나 그렇다.

"피해자들은 해당 직종에 남지 못했고 전향을 하거나 프리랜서가 된다. 가해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을 쉽게 떨쳐버리지도 못한다."

가해자가 감옥에 가 분리되어 있는 시간은 잠깐뿐이다. 실제로 가해자 출소 이후 맞닥뜨리기도 하고 위협을 받기도 한다. 가해자에 대한 공포는 평생 따라다닌다. 김지은은 "미투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진짜 현실"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나 겪는 아주 보통의 위력

우리 모두는 시시때때로 위력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적 관계 자체가 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력은 존재와 동시에 행사된다. 그래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일상 속 폭력의 또 다른 형태다.

위력은 수많은 노동자, 수직 관계의 약자들이 느끼는 폭력 중 하나다. 폭행과 협박뿐만이 아니라 침묵과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바로 위력이다. 달갑지 않은 농담을 참고 들어야 하는 것, 가고 싶지 않은 회식에 참여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위력이다.

심지어 안희정은 권력자였다. 그것도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그의 조직은 위계가 지배했다. 폭력이 일상적이었다. 김지은은 단지 여성 노동자였기 때문에 성적 폭력까지 당해야 했다.

김지은은 "꼭 이름에 얼굴까지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만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에게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뒤 내가 제일 두려웠던 것은, 문제제기를 한 후 내가 조용히 묻히고 사건도 사라지는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말고 다른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길 바랐다"고 말한다.

"다시 자립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직접 일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나누며 살고 싶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다시 노동자가 되어, 일정한 수입이 생기는 삶을 기대한다."

그는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상사와,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돕는 동료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다. 노동자 김지은, 그것이 그가 되찾아야 할 일상이다.

'김지은'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며

김지은은 "피해자의 편에 서 달라"고 호소한다. 이 책을 통틀어 그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 달라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달라고. 김지은은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서서히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이다. 최근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보다 앞서 성폭력을 고발했던 미투 선배들에게 용기를 얻는다고도 했다. 성폭력상담소의 일상회복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성폭력 관련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김지은의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책 에필로그의 이름은 '살아서 증명할 것이다'이다. 그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성폭력 피해자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다시 한명의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기를. 그래야만 한다.

▲<김지은입니다>(봄알람 펴냄, 김지은 지음, 값 1만 7000원)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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