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간다. 배가 아프면 내과, 눈이 아프면 안과, 목이 아프면 이비인후과. 증상에 맞는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진료를 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면 된다. 아주 어렸을 땐 부모나 보호자와 함께 병원을 찾지만, 익숙해지기만 하면 누구나 혼자서도 병원을 방문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별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면 청소년이 혼자 병원을 찾았다고 해도 왜 혼자 왔는지, 보호자는 왜 같이 오지 않는지 묻지 않는다. 필요한 처치와 처방을 받는 데도 아무 문제없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다. 청소년이 혼자 정신과를 가면 대부분 부모와 함께 올 것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부한다. 진료는 받아주더라도 부모가 함께 오지 않으면 약은 처방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진료과의 병원처럼 별다른 조건 없이 청소년을 진료해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정신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엔 "청소년이 혼자 정신과 갈 수 있나요?"하는 질문들이 넘쳐나고, 혼자 정신과를 찾았다가 쫓겨난 청소년들의 사례담이 수두룩하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질문&답변 서비스 등에는 이러한 일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법적으로 청소년이 정신과에 가기 위해선 부모와 함께 가야하는 것처럼 서술된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청소년의 정신과 진료에 부모 동행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의료법' 제15조에 따르면 현행법은 정당한 사유 없는 진료거부를 금지하고 있다. 정신과에서 혼자 찾아오는 청소년들의 진료나 처방을 거부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불법적인 행위다.
정신병과 청소년에 대한 편견
왜 대부분의 정신과들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을 상대로 진료 거부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돌보고 치료해야 할 정신과 의사들은 왜 청소년 환자를 거부하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한국 사회에서의 '정신과'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과 청소년에 대한 억압과 통제에 관해 함께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신병과 정신과에 대한 한국의 사회적 시선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감기 등의 질병에 걸리거나 팔다리 등을 다친다고 그 '사람'을 문제 있는 사람 취급을 하진 않지만,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정신병자'나 '정신병' 자체가 비하의 의미를 담아서 쓰이는 일도 잦다. 한번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다른 질병이나 부상과는 달리 정신병에 걸린 사람 자체가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신병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터부시되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정신과를 찾아갈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정신과를 다니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이러한데 만약 어떤 청소년이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복용 중이란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간의 정신병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어린 말을 듣는 건 물론이고 대번에 "너 그거 부모님은 알고 계시니?"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우리 사회는 유독 청소년들의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 부모라는 존재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질환 또한 마찬가지다. 청소년이 정신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부모가 해당 사실을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려고 든다.
하지만 한국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부모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주범일 확률이 높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식에게 뭔가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청소년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한 상담을 하거나 정신과 진료를 원한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밝히면 '그런 약은 정신병자들이나 먹는 거야', '네가 너무 부정적인 생각만 해서 그래' 같은 말을 듣기 십상이다. 부모가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를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돕기보단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키고 치료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에겐 학업 성적만이 우선인
어찌어찌 부모 동행을 요구하지 않는 정신과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청소년들은 꾸준한 치료를 받기 어렵다. 학교와 학원, 입시에 매여 있는 한국의 청소년들은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정신과에 방문하고 병원비와 약값을 부담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나 저러나 청소년이 원활히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부모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를 설득해 정신과를 방문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부모와 함께 정신과를 방문했다고 쳐 보자. 많은 부모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뿐이다. '학업 성적이 떨어지면 어쩌죠?'
적지 않은 부모들이 청소년의 본질적인 회복보다는 당장의 학업과 입시 성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정신과 치료 과정이나 복용하는 약의 효과가 당장의 학업 수행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다면 대번에 치료를 반대하고 나선다. '청소년기는 원래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청소년의 정신질환을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 취급하는 풍조도 한몫한다. 청소년의 정신질환이 '문제'로 여겨지고 적극적인 치료가 쉽게 용인되는 경우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 정신질환 자체가 학업 능력을 현저히 방해한다고 여겨질 때뿐이다. 학업 수행에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는 정신질환의 경우엔 쉽게 무시되고 청소년의 정신건강은 뒷전이 된다.
청소년의 정신건강 의료 접근권을 보장하라
이러한 상황에서 전문가로서, 의료인으로서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돌볼 책임이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한 채 청소년 단독 환자들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정신과의 진료 거부와 부모들의 부정적인 태도가 더해진 결과 청소년들은 자신의 정신건강을 스스로 챙기고 싶어도 챙길 수 없는 무능력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현실과 세계적으로 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한국 청소년들의 실태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이미 유래를 찾기 힘든 살인적인 입시경쟁, 과도한 학습시간과 이로 인한 수면부족, 성적에 대한 압박감과 죄책감 등으로 인해 정신건강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에 놓여 있다.
'청소년들의 행복도가 세계 꼴찌이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등의 심각한 통계들이 심심하면 뉴스거리가 되지만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다. 위클래스, 청소년상담전화 등의 정책들은 청소년들의 근본적인 정신건강 회복보다는 당장의 자살 예방, 학업 부적응 예방 등 피상적 성과에만 치중하고 있다. 모두가 청소년을 보호해야한다고 말로만 떠들지만 과연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건강과 안녕에 관심이 있긴 한 건지 의문스럽다.
"청소년의 정신과 치료를 국가에서 지원해주세요" 지난 1월 마감된 청와대 국민청원 제목이다. 스스로를 청소년이라고 밝힌 청원 제안자는 청소년에게 무료 정신과 상담을 지원할 것, 부모의 동행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할 것 등의 내용들을 요청했다. 5000여 명의 동의를 얻고 종료된 해당 청원의 의미는 명확하다. 더 이상 국가는, 정신과 의사들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보다 적극적으로 정신질환 및 정신과 치료에 관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부모를 비롯해 청소년의 정신과 진료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해결하여 모든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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