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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니 감수하라? 그런 말 마시죠

[예술인 고용보험이 필요하다 ③] '그 헛짓'도 노동이다

아이에게 읽어줄 책을 고르다 문득 책의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문다.

"면을 고를 때는 헛짓한다 싶을 정도로 살살 해야 돼. 망치로 치는 듯 안치는 듯 오래 오래."<초정리 편지>(배유안 지음, 창비 펴냄)

석공이 되고 싶은 12살 장운에게 석수장이가 하는 충고다. 동화책을 안고 어느새 질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놈의 헛짓거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

노모(老母)의 일갈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 놈의 헛짓'을, 치는 듯 안치는 듯 오래오래 해야 한단다. 그래도 잘할까 말까 싶은 이 죽일 놈의 일을 말이다. 똑같은 짓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고 밤새는 일을 밥 먹듯 해도, 노동이 아니라고, 저 좋아하는 일이라 가난은 필수 옵션이라는 말을 듣는 게 이 짓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연극은 늘, 가장 낮은 곳에 서있다.

▲ '연극인 어떻게 살 것인가' 행사 장면. ⓒ정안나

지난 해 11월, 연극인들은 오로지 연극인만의 실태조사를 시행했다. 설문도 조사도 통계분석도 모두 연극인들 스스로 설계해 열흘 만에 현장연극인 875명의 데이터를 얻어낸 의미 있는 수확이었다. 이름하여 '연극인, 우리 스스로의 복지' 실태조사 사업, 이 사업을 연극인들 스스로 온전히 해냈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늘 '공연예술인'으로 한데 묶여 세밀한 실태파악이 힘든 지점을 극복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조사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다. 한해 평균 4.6편을 만들고 작품 한 편당 평균 70일을 할애하는데 연평균 총수입이 1319만 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연극공연을 통한 수익은 그 중 351만 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연극교육 활동과 비정기적인 알바를 통해 월 100만 원을 간신히 넘기고 있는 것이다. 20대 직장인의 평균연봉이 3000만원인 현실에서 말이다.
▲ <그림 1> 연극인의 지난 1년간 수입_2017년 12월 기준

연극인의 4대 보험 가입률은 한술 더 뜬다. 건강보험을 제외하면 가입률이 현저하게 낮다. '사회보험'의 정의가 '국가가 질병, 사망, 노령, 실업 등의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 정해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제도'라면 연극인은 어쩌면,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술인 고용보험의 도입이 이 모든 문제의 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사업주의 경계가 모호하고 극단의 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라 한 곳에만 소속되어 있지 않은데다 단기 계약과 복수공연계약이 일상인 연극인들에게 예술인 고용보험은 '꿈속의 떡'(꿈에서라도 먹으면 감기 걸린다는!)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운이 좋아 실업급여를 받는다 해도 연극인의 삶이 하루아침에 나아질 리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을 '노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예술인 고용보험을 원한다. 우리의 노동이 당신의 노동보다 더 값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 노동이 당신의 노동처럼 똑같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일’이라는 걸 증명 받고 싶을 뿐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비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이 예술행위라는 얘기는 이제 우리조차도 지긋지긋하다. 단언컨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비약적인 발전은 연극인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들이 단순히 뛰어난 사람들이라서 방송계와 영화계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예술노동을 통해 연마한 그들의 시간이 빛을 발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어떤 기업이나 방송국도 전담 교육기관이나 마찬가지인 연극계를 위해 빚 갚을 생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날 잡아 일수가방 하나 들고 상암동으로 빚 받으러 가고 싶을 지경이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는 물론 좋아서했다. 하다 보니 미쳤고 멈출 수가 없었다. 3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도, 가난이 성격이 돼버려도 이제,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다. 어느새 이 일이 가장 잘하는 일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미쳐서 좋아서 하던 시절은 갔다. 우리는 지금 가장 잘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무수한 '헛짓'을 거듭하며 쌓아올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연구를 치열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극인'은 그저 연극을 남들보다 '잘하는' 사람들일뿐이다. 수학을 잘하거나 체육을 잘하는 사람들이 수학자, 체육인으로 먹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직업인으로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에게 "좋아서 하는 일이니 감수하라"는 식의 말은 부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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